미국에서는 대륙유럽형 자본주의국가에 비해 기업연금제도가 비교적 일찍부터 제도화되어 발전해 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30년대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마련된 공적 연금체제(사회보장체제)가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제도화된 복지국가로 불리는 유럽과 달리 미국을 잔여적 복지국가, 사적·기업복지국가로 불린다.

1950-60년대 미국경제의 황금기 시절에는 민간기업의 높은 생산성으로 고임금이 가능하였고 확정급여형(defined benefit)의 기업연금도  별다른 재정적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60년대 말  생산성상승이 둔화되고 수익률이 하락하면서 기업연금재정 또한 크게 악화되었다. 기업경영실적이 악화되자 기업연금의 적립금이 연금급여에 크게 못 미쳐 기업의 연금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거나 연금스폰서인 기업 자체가 도산하여 노동자들이 아예 연금수급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마련된 법안이 바로 70년대 종업원퇴직소득보장법(ERISA)이었다. 이 법은 노동자들의 연금수급원을 보호하기 위해 연금수탁자들에게 엄격한 수탁자의무를 부과했다. 또한 동시에 이 법은  연금스폰서인  기업이 도산하더라도 일정액의 연금급여를 보장하는 연금급여보증공사를 설립하도록 했다.

이 법이 제정된 지 30여년이 지난 현재 근속연수 및 평균임금에 따라 사전에 연금급여가 일단 확정되면  연금적립금의 운용실적과 무관하게  사전에 정해진 연금급여를 지급해야 하는 확정급여형 기업연금의 경우, 2000년대 초 주식거품붕괴 이후 주식시장에서의 운용실적 악화로 적립금부족사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2006년 7월 현재  확정급여형 기업연금의 지급부족액이 작게는 3130억 달러 많게는 45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동차, 철강, 화학 그리고 항공업계 등에서 연금적립금부족 상태의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기업연금의 폐지와 동결사태가 급속히 증가했다. 이렇게 되자,  확정급여형 기업연금의 파산시  기업연금의 자산·부채를 일괄인수하고 종업원에게  정해진  연급급여를 지급하는 연금급여보증공사의 재정상태도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2000년 연금급여보증공사는  97억 달러의 순자산을 기록했지만 2002년부터  순부채가 발생한 이래 최근 228억 달러의 순부채를 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기업연금제도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의 노동부가  중심이 되어 기업연금개혁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그 이후 이 법안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상하양원을 통과하였다. 최종적으로 부시정부가 올해 8월 17일 이 법에 서명했다.

이 법안의 핵심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확정급여형 기업연금에 관한 적립 룰의 개정이다. 즉 기존에  90%였던 연금부채 대비 기금적립금비율을  향후 7년 이내에 100%로 상향조정 한다는 것이다. 둘째, 기업연금의 자산과 부채를 평가하는 방법을 자산과 부채의 성격에 맞게 시장의 변동을 최대한 신속하게 반영하도록 했다. 즉 지금까지는 기업연금의 자산과 부채를 평가할 때 시장의 상하변동에 따른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smoothing이라는 일종의 평준화방법을 써 왔는데  부시정부는 이 기법 때문에 기업연금이 시장의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했다고 보고 당초 이를 폐지하려고 했다. 결국에는 기업 측의 부담과 반발을 고려하여 평준화기간을 기존의 4년에서 2년으로 단축했다. 끝으로  연금급여보증공사에 대한 기업연금  보험료를 기존의 가입자 1인당  연간  19달러에서 30달러로 인상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제도 변화로 향후  기업들에게 상대적으로 큰 부담이 되는 확정급여형 기업연금을 폐지하거나  이를 확정기여형연금으로 대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의 연금수급권은 더욱더 불안해질 수밖에 없으며  연급급여가 주식시장의 운용실적과 그 변동성에 크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기업연금이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의 이연임금임에도 불구하고  연금설계 및 연금자산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권이 없는  미국의 단일사용자 확정급여형 기업연금의 향후 추이는 기업연금이 제도화된 지 1년도 채 안 된 우리나라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ERISA는 사적 연금, 그 중에서도 기업연금을 관장하는 연방법으로 미국노동자의 연금수급권 보호라는 취지에서 입안되었다. 미국에서 기업연금이 라인형 자본주의에 비해 일찍부터 발달한 것은 기본적으로 30년대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마련된 사회보장체제가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다.1)

다시 말해 미국에서는 사회복지보다는 기업복지가 훨씬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포드주의 황금기에는 민간기업의 높은 생산성으로 고임금이 가능하였고 확정급여형(defined benefit)의 기업연금도  별다른 재정적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60년대 말  생산성상승이 둔화되고 수익률이 하락하면서 기업연금재정 또한 크게 악화되었다. 기업경영실적이 악화되자 기업연금의 적립금이 연금급여에 크게 못 미치거나 연금스폰서인 기업 자체(Studebaker의 도산) 하여 노동자들의 연금수급권이 훼손되었던 것이다. 이에 의회 내의 노동자 지지세력과 진보세력이 중심이 되어 노동자의 연금수급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을 제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ERISA로 구체화되었다(Montagne, 2000, pp.1-3).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당초 노동자의 연금수급권 보호를 위해 제정된 ERISA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을 근저에서 뒤흔드는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를 촉진했다는 점이다.

ERISA는 민간기업의 연금계획에 대한 최소한의 조건과 기준을 설정하여 그것을 고용주가 이행하도록 의무화하는 연방법이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금계획의 관리와 연금자산관리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수탁자(fiduciary)에게 연금재정의 건실화를 위해 일정한 책임과 의무를 부과한다는 점이다.2) 

수탁자들에게 일정한 책임과 의무가 부과된 이상, 수탁자들은 그 반대급부로  연금자산운용에 대한 각종 규제를 철폐할 것을 요구하였다. 수탁자들은 적어도 시장평균에 준하는 수익을 올리도록 포트폴리오 투자를 수행하였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주식에 대한 포트폴리오 투자가 증가하였다. 또한 이들은 해당 기업의 기업지배구조에도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경영자에 대한 감시, 회계의 투명성 요구가 70년대 말 이후 중요하게 대두된 것도 넓게 보면 수탁자의 책임규정 및 시장평균의 금융수익성 달성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3)


1) 1935년 루즈벨트정부 하에서 사회보장법이 제정되면서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사회보장체제가 처음으로 갖추어졌다. 초기에는 뉴딜 정책에 대한 저항이 만만치 않아 사회보장체제는 노령자 유족보험(Old-Age Survivors Insurance:OASI)로 시작되었다. 그 이후 1939년  장애자 보험(Disability Insurance:DI)이 추가되었으며 건강보험(Health Insurance:HI)은 1960년에 와서 비로소 도입되었다. 요즈음은 이상의 보험체제를 통괄한 노령자유족 장애자 건강보험(OASDI:OADHI)을 미국의 사회보장체제로 부른다. 특기할 것은 주요 선진국 중에서 미국만이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공적 의료보험제도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HI(흔히 Medicare로 불림)는 65세 이상의 고령자와 일정한 장애자를 대상으로 한 제도일 뿐이다. 뉴딜 개혁의 한계로 인한 미국사회보장체제의 취약성에 대해서는 Skocpol(1987)을 참조. 미국의 사회복지제도와 연금제도의 특성에 대해서는 이상호(2001), 송원근(2001)을 참조.

2)또한 수탁자들이 이 의무를 위반할 경우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외에도 확정급여형 기업연금의 경우, 연금계획이 종료되면 일정한 급여의 지급을 보장하고 있으며 연금급여보증공사(PBGC)를 설립하여 연금스폰서인 기업이 파산하더라도 노동자의 연금수급권이 유지될 수 있게 하였다.

3) Montagne은 이런 측면을 연금가버넌스의 기업가버넌스로의 전파 내지 금융영역의 가버넌스양식의 기업가버넌스양식으로의 전파로 이해한다(Montagne, 2001, p.63). 이 이후 사회복지 내지 사회정책이 금융적 논리 내지 금융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전개되어 간다. 신자유주의세력들이 금융화를 촉진하기 위해 사회복지체제의 개조에 관심을 갖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Ghilarducci, 2001; Minns,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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