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과 자본, 그리고 어용 한국노총의 ‘9.11 야합’이 ‘결국’ 벌어졌다.

이번 합의의 내용은 언론에서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여 차근차근 보도했을테니 굳이 반복할 이유는 없겠지만, 심각한 문제점들을 두가지만 요약하여 얘기해 보자면 이렇다.

우선 복수노조 허용이 3년간 미뤄졌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조법 제3조5호(복수노조금지조항) 철폐’를 내걸고 전노협이 결성되고 무려 20년 동안 이 조항의 폐지를 내걸고 투쟁을 전개해 왔으나, 97년에 한국노총의 요청으로 이 조항의 폐지가 5년 유예되었고, 2002년에 또다시 한국노총과 정부의 합의로 5년 유예된데 이어, 이번에도 또다시 한국노총이 경총과 밀실합의를 함으로써 1,500만 노동자 단결권 보장이 2009년까지 봉쇄되었다.

부당해고 형사처벌조항을 삭제하고 부당해고 판정시 금전보상을 허용하자는 노무현 정부의 노사관계 로드맵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자가 누려야할 가장 최소한의 권리를 규정한 법으로서, 그중 정당한 이유없이 해고를 할 수 없도록 한 부당해고 금지조항은 핵심에 해당한다. 그래서 부당해고를 할 경우 처벌조항은 근로기준법 위반사항 중 가장 무거운 형벌(5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 벌금)을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부당해고 형사처벌조항 삭제와 금전보상 허용은 근로기준법 무력화에 다름아니다. 사용자들은 언제라도 눈에 가시같은 활동가들, 조합원들을 ‘묻지마 해고’를 해 버리고 문제가 되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야합 시나리오, 과연 모르고 당했는가?

이 글의 목적은 야합의 내용과 파장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자면 야합의 내용과 파장 분석은 이미 훨씬 전부터 완료되어 있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러한 방식의 야합이 진행되리라는 것을 지도자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오히려 이런 야합이 가져올 파장을 줄이기 위해 그동안 움직여 온 것이라고 얘기한다면, 그것이 사실에 가까운 것 아닌가! 이것이 야합이기에 분쇄되어야 한다고 진정으로 생각했다면, 밀실야합의 실체가 드러난 9월2일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된 항의규탄조차 조직되지 않고 있음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한국노총이 전임자 임금에 목숨걸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고, 복수노조 금지는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노총이 요구(!)해 온 조항이었다. 여기에 부당해고 벌칙조항 삭제와 금전보상제까지 정권과 자본에 덤으로 얹어준 꼴이며, 민주노총의 '8대 요구'는 아예 쟁점조차 되지 않았다.

야합 시나리오 뿐이겠는가? 오늘(12일)이면 야합을 규탄하는 각종 성명서가 발표될 것이고 “11월 총파업으로 분쇄”하겠다는 선전문구가 홈페이지 메인을 장식할 것이다. 중집(투본대표자)회의에서는 총파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앞으로 두 달 간은 어느 연맹은 되니 안되니, 국회일정을 따라가니 마니 하며 이런저런 논란을 벌일 것이고, 이 야합이 가져올 사회적 파장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총파업의 수위가 결정되는 ‘향후 대응 시나리오’도 작동되기 시작했다.

복수노조 허용에 민주노조운동은 과연 진정성을 갖고 있었나?

숱한 술자리에서, 그리고 공식 회의 중 정회 시간에 담배 한 대 피우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소리. “복수노조, 전임자 임금지급금지 유예한다면 노사관계 로드맵 투쟁에 어떤 대기업노조가 달라붙겠는가”, “한국노총 야합에 정규직노조들 속으로는 불쾌하지 않을 것” - 이게 과연 보수언론들이 써대는 3류 소설에 불과한 것인지 묻는다면, 어느 누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까?

9월2일 한국노총과 경총·대한상의의 밀실합의가 이뤄진 직후 현대자동차노조 소식지 9월5일자를 보면 "민주노총이 불참한 상태에서 이뤄진 합의라는 점에서 앞으로 이에 대한 민주노총의 대책이 주목된다"고 마치 일반적인 언론보도처럼 글을 맺었다. 밀실합의가 나오기 전인 9월1일자 노조 소식지에 나온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생존권이 달려있는 만큼 전국 노동자와 함께 노무현 정권의 노동조합 무력화에 강고한 투쟁을 통해 반드시 저지할 것"이라는 논조와는 사뭇 다르지 않은가?

이러한 논조가 현재 야합에 대한 대기업노조들의 애매한 포지션을 그대로 반영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복수노조 허용되면 자본의 2중대 노조가 만들어지니까 복수노조 허용은 자본에게 유리하다”는 인식이 주를 이루었고, 복수노조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산별전환투표를 가결시켜야 한다는 선전이 현장에 난무하지 않았던가! 그나마 기아자동차노조를 비롯한 다른 대기업노조들의 소식지에서는 아예 노사관계 로드맵 관련 항목을 찾아보기조차 어렵다.


전해투의 조준호와 민주노총의 조준호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이번 야합의 주체였던 한국노총과 경총은 당시(94년) 임금가이드라인을 3%로 한다는 기만적 합의를 한 바 있다. 당연히 이 합의는 민주노조운동진영의 거센 비판과 항의에 부딪혔지만, 실제 항의규탄을 직접행동으로 가장 먼저 옮긴 조직은 “전국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투쟁위원회(전해투)”였다. 전해투는 당시 전격적으로 어용 한국노총 사무실 점거농성에 돌입하여 기만적인 노·경총 합의 분쇄투쟁을 전개했다.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당시 한국노총 점거농성을 전개했던 전해투 위원장이 바로, 십이간지가 지난 2006년 메이데이 행사에서 전격적으로 한국노총에 공조를 제안한 민주노총 조준호 위원장이었다.

1994년 당시는 물론 민주노총이 건설되기 전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임금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 노-경총 협상 자리에 “한국노총이 뻘짓을 할게 뻔하니까 그것을 막기 위해서 협상장에 들어가자”고 주장하는 이는 없었다.

사용자들은 앞다투어 기만적 합의를 지지하고 일제히 3% 이상은 들어줄 수 없다는 선언을 했지만,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전해투의 선도적 투쟁을 시작으로 노-경총 기만적 합의를 인정할 수 없으며 이를 현장 총파업으로 분쇄하겠다고 선언하고 싸웠다.

“투쟁하면 답이 나오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이들도 없었다. 하지만 수많은 이들이 해고와 구속을 무릅쓰고 기만적 합의를 분쇄하기 위해 싸웠으며, 결국 노·경총의 기만적 임금가이드라인 합의는 현장으로부터 분쇄되기 시작했다.

야합을 막기 위해 협상장을 잘 단도리한 것도 아니고, 야합을 규탄하며 협상장을 박차고 나올 기회조차 놓쳐버린 채, 민주노조운동 내부조차 투쟁의 기운으로 조직하지도 못하는 민주노총의 모습을 과연 어떤 명분으로 변명할 수 있겠는가!

'대안없는 꼴통' 소리 명예롭게 받겠다

싸우려는 자는 행동으로 말을 입증하고, 회피하려는 자는 말로 행동을 변명한다.

전임자 임금지급이라는 당연한 권리가 부정되는 악법이 강행통과될지라도 복수노조 허용과 부당해고 처벌조항 수호를 위해 당당하게 총파업을 조직하겠다고 나서야 한다. 지금 투쟁만이 답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그래, 정답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저 따위 야합을 막는데 목숨걸지 않고서 무슨 답을 찾을 수 있겠는가!”라며 나서야 한다.

“대안도 없이 싸우는 꼴통”이란 소리를 듣는다면 명예롭게 그 호칭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꼴통이 되지 않으면 노조혐오증에 빠져있는 저 꼴통 노무현을 어떻게 상대하겠단 말인가. 그리고 노동운동의 역사는 그런 꼴통들이 원칙을 지키고 중심을 잡아왔기에 사수되어온 역사가 아니던가!

“이 야합에 진정한 저항과 투쟁을 조직하지 않는 자는 이 야합에 동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하자. 정말이다! “이 야합에 진정으로 싸우지 않는 자는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이 훌륭한 결단을 내렸다고 치하하러 가라!” “복수노조 허용이 산별노조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복수노조 허용에 벌벌 떠는 산별은 무늬만 산별이지 기업별노조의 연합체일 뿐”이라고 천명하자. “이번 싸움이야말로 누가 ‘진짜’ 민주고 누가 ‘허울만’ 민주인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라고 선언하자. 이러한 정신을 갖고 싸우지 않는다면 어찌 ‘진정성’이란 말을 감히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비정규직노조들은 답이 보이지 않을지언정 “노사관계 로드맵 분쇄! 특수고용을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해 하반기 투쟁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더욱 분명하게 얘기할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진정성’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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