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유예'에 합의했다. 그것도 5년간. 벌써 3번째다. 기업단위 복수의 노조설립 허용과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라는 노동법 조항은 합의대로라면 5년씩 3차례, 무려 '15년간' 미뤄진 조항이 되는 셈이다. '딜(거래)'의 대상일 수 없는 노동기본권을, 그것도 노동계 양축 중의 하나인 한국노총이, '유예'키로 합의한 데 대해 비난의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그런 한편에서는 그것이 노사정 모두 '바랐던 바' 아니냐는 현실론도 적지 않게 제기되곤 한다. 한국노총은 왜, 이 같은 합의를 했을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 같은 합의를 왜 '주도'한 것일까.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이 그 이유와 최근 자신의 심정까지 담은 기고문을 <매일노동뉴스>에 보내왔다. <편집자주>


요즘 심정은 정말 갑갑하다 못해 괴롭다.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정상적인 우리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지 너무 막막하다.

현행법의 전임자임금 지급 금지 및 복수노조 허용 조항의 시행과 변경을 두고 전 사회가 시끄럽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깊은 관심들이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언론에 이같은 심정을 토로하고 이해를 구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내 심정을 이해하기는커녕 자기 언론사의 기조대로 내 얘기를 편집, 왜곡하지는 않을까, 아니면 이해부족으로 오히려 잘못 전달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다.

최근 노총과 재계가 현행법을 5년간 유예키로 합의한 것에 대해 일부는 '야합'이니 '편의주의'니 하고 비난하고 있다. 그래서 정부 여당은 여론을 의식해서 노사합의안 수용을 주저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노사가 얼마나 많은 협상을 하면서 현실에 대해 고민을 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저 서로의 입장이 어려우니 일단 유예하자고 쉽게 합의한 것이 아니라, 현행법 기조대로 실시했을 때 발생할 부분에 대해 엄청난 고민들을 함께했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우선 전임자 임금지급을 금지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느냐의 문제이다.

노조의 반발과 함께 법시행의 목적도 달성될 수 없다는 문제다. 설사 이 법의 취지를 긍정적으로 인정하더라도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결과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내 고민을 하나하나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노조가 반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분명히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조가 전임자임금을 부담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원천적 이유이다. 외국의 사례를 들어 전임자임금을 노조 자체에서 지급하라는 게 법 취지이지만 우리 현실은 다른 것이다.

유럽의 경우 노조가 전임자임금을 부담하고 있지만 그들의 노조형태는 산별체제이다. 그리고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어 충분히 준비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군사독재정권이 노조의 약화를 위해 수십 년간 기업별체제로 강제하고 심지어 산별체제를 법으로 금지하기까지 했다. 산별체제에서는 조합비가 산별로 집중되지만, 기업별노조의 조합비는 대부분이 기업노조에 있고 그 돈은 대부분 사업장내 조합원의 화합과 단결을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용자 입장에서도 필요한 활동일 수 있다.

근본적으로 유럽과 다른 전통과 체제에서 유럽과 똑같이 하라는 것에 문제가 있다. 더구나 외국에서 전임자임금지급을 법으로 금지하는 나라도 없다. 법으로 금지하지 않더라도 노조형태상 부담할 능력이 있고 또한 긴 역사에서 그들은 전통으로 만들어 갈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수용할 수가 없는 현실에서 노조의 반발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법 시행 목적이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법의 목적은 사용자에게서 전임자임금 부담을 덜어주자는 것이다. 특히 전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 몇몇 대기업노조의 지나치게 많은 전임자수를 줄여보고자 하는데 있다. 그러나 실제 이대로 법이 시행될 경우 노조가 부담할 능력이 없다는 원천적 이유로 노조의 반발이 커질 것이고 결국은 다른 형태로 노사간에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전임자임금 부분만큼 조합원 수로 나누어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그 몫을 노조에서 받아 전임자임금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나타날 것이다. 조합원당 10만원의 교통비 인상을 요구하고 그것을 체크오프(check-off)로 노조에 내도록 하는 식이다. 결국은 사용자부담이 되어 원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힘 있는 대기업노조는 요구를 관철하게 되겠지만 힘없는 중소노조만 피해를 입게 되는 결과가 온다. 오히려 사용자가 임금을 주고 싶어도 처벌 때문에 줄 수 없는 경우가 나오게 된다.

그러면 법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하면서 전체노조의 투쟁만 야기해 경제적 손실과 사회불안 초래, 국가대외신인도 추락 등의 결과만 가져오는 것 아닌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고 빈대도 못 잡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러한 엄중한 결과가 예상됨에도 과거 정부가 추진하려던 정책에 집착하고 명분만 앞세우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답답할 뿐이다.


셋째 과연 정부가 대안으로 마련하려는 내용, 즉 조합원 수 규모별로 전임자임금 지급을 차등 제한하는 안이 어떤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나는 이러한 정부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여 내 스스로 집과 사무실에서 얼마나 많은 방법들을 연구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론은 너무나 현장을 감안하지 않은 탁상행정의 표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산업현장은 매우 다양한 가운데 각자의 특수성이 있다. 건설산업과 금융산업, 그리고 제조산업과 서비스산업 등 근로자들의 근무형태가 다르고 그에 따라 전임자들의 활동방식도 다르다. 또한 산업현장이 한 곳에 모여 있을 수도 있지만, 몇 개 심지어 수십 개로 나뉘어 있기도 해서 전임자들의 활동범위가 사업체마다 다르다.

그럼에도 행정부에서 획일적으로 전임자 숫자를 정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인가.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방안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사업장 유형이 수백 개가 되어 몇 줄의 법조문으로는 해결방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현재도 대부분의 사업장에서는 노사간에 사업장 특수성을 감안하여 불편 없이 타협점을 찾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 않는가.

넷째 지난 10년간 법 시행을 위해 정부가 현실을 감안하여 어떤 고민을 했는가 하는 문제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금융산업노조 위원장으로 재직하던 2003년에 현행법을 시행하도록 금융권 노사가 합의한 것을 노동부가 오히려 제동을 걸었다. 당시 8월에 노사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4년간 각 은행들이 평균 20억원씩 출연하여 80억원 정도의 재정자립기금을 만들기로 합의하였다. 2007년부터는 기금에서 나오는 4억원 가량의 이자소득으로 노조전임자임금의 70~80% 정도를 부담하고 나머지 20~30% 정도는 노조 조합비로 분담하기로 한 것이다. 기금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자소득은 불변이지만 임금은 점차 높아지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사용자부담을 점차 줄여나가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노동부는 2003년 8월 11일과 8월 21일자 두 차례의 질의회시 공문을 통해 사용자부담의 기금설립은 부당노동행위라고 못 박는 바람에 노사합의가 무산되고 말았다. 정부는 대안마련에 전혀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노사가 고민 속에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보려는 노력을 오히려 방해하고 만 것이다.

복수노조 허용에 대해 노사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ILO의 정신은 결사의 자유를 보장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수노조를 전면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국제규범에 얽매여서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서로의 입장이 다른 바, 대화를 할 때는 자기 입장만 얘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노조나 사용자들도 각자 내부적으로 보면 입장이 다를 수 있다.

우선 노조는 조합 집행부와 조합원들이 다를 것이다. 집행부는 선거에서 승리한 만큼 선거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또 다른 노조를 만드는 것이 내심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집행부가 뒷날 선거에서 실패했을 때를 생각한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일단은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 사업장에서는 선거 이후에 복수노조가 많이 생길 것이다. 특히 대규모 사업장의 경우는 반드시 복수노조들이 만들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로드맵이 협상중인 지금, 산하노조에서 복수노조 허용을 반드시 관철하라는 요구가 많다고 볼 수는 없다.


사용자들은 노동조합보다는 복수노조 허용에 대해 반대 입장이 더욱 분명한 것 같다.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이 복수노조 허용에 대한 부담이 더 클 것이다. 물론 대기업 중에서도 악성 노사관계로 쟁의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곳은 복수노조를 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계 전체적으로 보면 단기적으로 6~7년 간은 혼란이 예상되기 때문에 중소기업에서도 불안감을 갖고 있어 대부분이 복수노조 허용을 반대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예상해볼 때 상당기간 혼란은 있겠지만, 현재 노동운동이 다수가 아닌 소수에 의해 장악되는 기형적 경향들이 있기 때문에 복수노조 허용으로 다수노조와 소수노조로 나뉘어 질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아 소외된 다수의 조합원들에 의해 노동운동이 나가야 된다고 본다.

이렇게 노사의 생각들이 서로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해서 중복된 감은 있지만 가지고 있는 정확한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협상에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속마음을 감추고 겉과 속이 다른 얘기들을 하면 어떻게 진정한 대화가 진행 될 수 있으며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더구나 현재 노조조직률이 10% 수준이고 양 노총의 조합원 수가 거의 비슷한 상태이다. 양대노총의 경쟁구도가 일선 사업장에서까지 격화되면 노동운동이 얻을 것은 없다. 이 상태에서 전임자를 강제로 축소하면서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을 전면화하는 것은 노조운동 괴멸로 이어지고, 노사간 엄청난 분쟁과 혼란을 초래하는 퇴행적 결과만 낳을 수 있다. 선진화와 정반대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나도 일선 노조들이 규약에 형식적으로만 비정규직을 가입대상으로 해놓고 실제로는 가입시키지 않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문제를 반드시 복수노조 허용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잘못이다. 비정규직을 규약에만 가입대상에 포함시키고 실제로는 가입시키지 않는 경우는 복수노조로 보지 않는다는 적극적인 행정해석이 필요하다. 이런 것이 노동부가 해야 할 역할이 아닌가. 노조는 산별노조를 통해서 조직하려는 노력도 해야 한다.

노사정은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고 이제는 정직해져야 한다.
정부는 명분에만 집착하는 자세에서 탈피해야 한다.

현재의 제도는 잘못된 것이고 반드시 개정을 해야만 무언가 성과를 남긴다는 막연한 선악의 이분법적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따라서 경험에 의하지 않는 행정적 사고를 버리고 산업현장에서 직접 경험하는 노사의 고민을 수용해야 한다. 언론이 이해하지 못해 부담스럽다면 언론에 적극적으로 이해를 구해야 한다.

사용자들도 자기 것만 챙기려 하고 서로 미루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에게 속내를 숨기고 책임을 전가하려는 자세나, 혹은 자기들이 노사협상 테이블에 참석치 않는다고 노사 대화창구로 역할을 하는 경총과 대한상의에게 책임을 미루려는 자세는 적합지 않다. 협상은 서로 상대가 있는 것이다. 자기 것만을 챙기고 싶지만 결국은 파국을 거쳐 사용자부담으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기 때문이다. 서로를 격려하고 입을 모아야한다.

노조도 현실을 인정하고 함께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조직적 이해관계로 명분만 내세워 반대하려는 자세는 구태의연하다. 속셈을 드러내지 않고 남이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미온적 태도도 맞지 않다. 태도를 솔직히 하고 인정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중요한 시기에 사회의 주체로서 함께 책임지는 지혜가 필요하다.

얼마나 많은 고민의 시간을 가졌는지 모른다.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인 것 같다. 어떤 제도이더라도 노사가 서로 갈등과 불신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효과가 없다. 이제 더 이상은 불필요한 다툼을 마감하고 노사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봐야 할 때이다.

이러한 진정성을 왜곡하고 무관심속에서 또는 정직하지 못한 자세에서 무책임하게 비난하는 것은 미래를 어둡게 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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