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들어 부쩍 금융공공성, 교육공공성, 의료공공성 등 공공성이란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의 주요한 이유로 자유무역, 자유시장이 공공성을 위축시킨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공공성을 진보적 가치의 중심으로?

그런데 과연 이 '공공성'(commonality), 또는 '공공이익'(public interest), '공동선'(common good)이라는 개념이 좋은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진보적 가치의 중심으로 공공성 개념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과연 그런가도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한편, FTA와 관련해서는 '국익'(national interest)라는 용어도 자주 쓰이는데, 그렇다면 이 용어는 공공성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혹자는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중차대한 사안인 한미FTA를 놓고 커다란 싸움이 전개되는 판에 무슨 현학적인 용어 타령이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용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공공성의 개념을 부인하지 않으며, 따라서 공공성 개념을 자유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적극 수용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먼저, 과연 자유무역, 자유시장이 확대 심화되면 공공성은 필연적으로 위축되기 마련인가? 이에 대한 답은 공공성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공공성에 대한 자유주의적 입장

먼저 자유주의의 입장을 보자. 경제적 자유주의의 원조인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개인이 시장을 통해 이기적으로 자기이익만을 열심히 추구할 때 결과적으로 국부도 증진되어 전 사회의 이익이 극대화된다. 즉 개인의 이기적 이익의 극대화가 결과적으로 공공적 이익도 극대화시킨다.

물론 시장 근처에 건달과 사기꾼들이 많게 되면 개인의 경제행위는 위축될 것이다. 따라서 아담 스미스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치안과 재산권 보호가 모든 시장참여자(경제주체)의 공동적 관심사이며, 따라서 공동선이라고 간주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아담 스미스를 비롯한 통상적인 자유주의 사상에서 개인이익의 총합 이외에 어떤 더 고차적인 사회적, 공공적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공유지의 비극

자유주의 사상이 어떻게 공공성 개념을 이해하는지를 하딘(Hardin)이라는 자유주의 학자가 쓴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논문을 통해 보자.

하딘은 주인이 없거나 접근이 자유로운 공유지는 반드시 과다이용 되는 폐단이 있다고 지적한다. 사유지인 경우에는 그 이용자가 100원의 비용을 추가로 지불하는 대가로 100원의 추가이익이 나오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자원을 최적으로 이용한다. 이른바 한계비용=한계수익의 원칙 또는 효율성의 원칙이 작동되며 따라서 사유지는 가장 효율적으로 바람직하게 이용된다.

이에 반해 공유지의 경우에는 이 원칙이 파괴되어 과다이용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공유지의 이용에 지불되는 비용 100원을 사용자 본인이 아닌 공중이 지불하기 때문이다. 가령 공유지인 공원 혹은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릴 경우 그 비용은 지방 납세자가 공동부담 하는 것이지 쓰레기를 버린 특정 개인이 부담하는 것이 아니다. 즉 공유지의 사용에 따른 비용은 상당 정도 타인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식의 사고를 더욱 확장하여, 돈을 주고 거래되는 자원 이외에는 아무런 다른 자원도 없는 세계, 즉 오직 사유재산과 그것의 거래시장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유토피아로서 묘사한다. 그 자유주의적 유토피아에서 모든 개인의 이익(그런데 그것은 정의상 그 자체로서 공공이익과 동일하다)은 극대화된다.

한미FTA와 자유주의적 공공성

이렇듯,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공공성을 긍정하되, 그것을 사적 이익의 총합으로서만 이해한다. 한미FTA 협상의 경우에도 이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한미FTA가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도 역시 그들이 주장하는 국익(즉 공공성)이란 한미FTA를 통해사유재산권 원칙과 자유시장 원칙을 완전하게 관철시키게 되면 사유재산을 가진 자들과 그 시장 참여자들의 사적 이익의 총합이 증대한다는 뜻이지, 사적 이익을 넘어선 어떤 더 높은 차원의 유익한 사회적 효과가 발생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만큼이나 자유시장 교리를 철두철미 신봉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에게 한미FTA의 정당성과 유용성은 자유무역과 자유시장에 대한 성스러운 신앙고백의 차원이며, 따라서 그것을 실사구시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애초부터 그들의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한미FTA의 예상 기대 효과에 대한 노무현 정부와 그 지지학자들, 국책연구소들의 준비가 그토록 빈약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공공성을 넘는 진정한 공공성

필자는 진정으로 진보적인, 따라서 자유주의를 넘어선 공공성의 개념은 바로 개인이 소유한 재산과 부와는 구분되는, 사익을 초월한 더 높은 차원의 '사회적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개인의 소득 혹은 사유재산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간의 올바른 '관계'(즉 사회적 관계) 그 자체가 발생시키는 가치이다.

예를 들어 보자. 필자가 1년을 보내고 온 영국의 옥스퍼드 근처에는 그림 속 풍경보다 아름다운 마을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꽃피는 6월이 오면 집집마다 봄 내 가꾼 정원을 공개하는 행사가 여러 마을에서 펼쳐진다. 이 때 어떤 집들은 자기 집 정원의 꽃을 보러 온 사람들에서 약간의 돈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이 돈을 자기 수익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온 마을이 꽃으로 가득하고 담장 하나도 옆집과 어울리게 하려고 신경을 쓰는데, 그 결과 향기 나고 그림 같은 마을 환경이 만들어진다.

바로 이런 것이 차원 높은 공공이익이며 공공성이다. 즉 서로에 대한 배려가 승수효과를 발휘하여 모두가 10배 더 행복해지는 것 말이다. 이런 태도가 가져오는 객관적 효과를 직접 확인한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고 이러한 마음은 자신들이 보지도 못한 이웃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 자기 집을 찾아온 사람들에게서 받은 약간의 찻값 수익을 자선 단체에 기부하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우러나게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각박한 현실과 공공성의 위축

옥스퍼드에서 느낀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처럼 인구의 절반이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 살고, 더구나 이 ‘성냥갑’을 나서게 되면 여러 사람들이 교류하는 ‘광장’이라고는 전혀 없는 생활환경과 극명히 대비된다.

하기야 인터넷의 발달로 가상공간에서 엄청난 교류의 장이 창출되고 있고 이 점에서는 단연 우리나라가 세계 으뜸이라고 하지만, 이는 그만큼 우리나라에 가상이 아닌 현실에서는 공공의 장이 위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모두가 사적 이익 추구에만 광분하고 있고 생활공간은 편리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의 생활공간이 어우러지면서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또다른 높은 차원의 공공적 효과를 알지 못한다. 그 결과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괴기스런 콘크리트 숲 속에서 각박한 이기심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러니 사람들의 심성은 더욱 각박해지고 공격적으로 되며, 외국인이 자주 지적하듯 평소에도 약간 화난 표정을 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에서는 세계 30위 정도 하는 한국 사람들이 행복지수에서는 세계 102번째라는 보도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근 자유주의 학자들과 보수적 이데올로그들은 교육의 사유화, 시장화, 개방화를 목소리 높여 주장하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대로 이 나라에서 교육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만드는 순간 수요자(학부모)와 공급자(학교) 모두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일류대학 입학을 위한 학원으로 전락시키고 학생을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 것이다.

진보진영이 교육의 공공성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교육이 가진 내재적 공공성 때문이다. 즉 학교는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간의 비이기적, 비시장적 교류, 인간적 교류를 통해 지적, 정서적 소통과 대화의 소양을 연마하는 곳이다. 이를 통해 장차 사려깊고 책임있는 시민(citizen), 즉 공인(public personality)을 양성하는 것이다. 교육이 시장판이 되면 이러한 일차적 임무는 사라질 것이다. 특히 교육이라면 모두 약간은 미쳐 있는 한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공익성과 국가공동체의 역할

사익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장사회에서 아무래도 공공성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국가가, 따라서 정치권 및 시민사회가 주도하고 격려해야 한다. 국가는 시장이 공급하지 않는 공적 사회서비스를 직접 제공하거나, 시장에 위탁할 경우에도 시장에서의 사익 추구를 적절하게 억제하여 공공이익이 창달되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영국 등 유럽에서는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는 보존주택(listed house)으로 등록되면 지방정부의 허가 없이는 그 집의 문짝 하나도 집주인 맘대로 교체할 수 없다. 관절염을 앓아 낡은 문을 열기 힘들어하던 노인 한분이 그것을 편리한 현대식 문으로 교체했다가 지방정부로부터 수백만원에 해당하는 벌금과 함께 원상회복 명령을 받은 일이 신문에 보도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한국 사회 같으면 “내가 내 집도 마음대로 못하냐”며 항의가 빗발쳤을 터인데, 영국에서는 조용했다. 왜냐하면 그 노인은 그 집을 잠시 사용하고 떠나지만 앞으로 수많은 다음 세대가 그 집에서 생활하고 그것의 미적 가치를 즐겨야 한다는 공공이익의 관점이 수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공공적 국가권력과 진보의 과제

우리나라의 국가는 과거 경제성장과 개발을 선도했고 지금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심하게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물결을 타고 시장화, 개방화에 앞장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국가권력은 중앙정부가 되었건 지방정부가 되었건, 진정한 공공성의 창달을 위한 노력을 한 적이 별로 없다.

따라서 진정한 공공성의 가치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반 국민들은 개방과 세계화, 시장원리의 강화만이 살길이라는 보수언론과 시장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도무지 어떤 입장과 논리를 가지고 반대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오늘날 진보의 핵심 가치가 공공성이라는 주장은 이런 상황에 비추어 전적으로 타당하다. 국가권력을 사익 지상주의 시장주의 세력에 계속 맡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국가는 서유럽의 고급스런 미학적 공공성은 차치하고라도 국가의 기본책무인 자연재난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동안 아니나 다를까 올해도 어김없이 학교 당국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짧은 메일을 ‘일방적으로’ 통보받았다.

"수해 이재민 구호를 위한 성금 모금 알림 공문입니다. 8월 급여에서 0.7% 공제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총무지원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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