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4일 MBC 'PD수첩'이 방영한 '론스타와 참여정부의 동상이몽 - 한미FTA'의 중반부쯤을 보다가 필자는 갑자기 굉장히 불쾌한 기시감(旣示感)에 사로잡혀야 했다.

물론 방송 내용에 특별한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날의 'PD수첩'은 그동안 한미FTA를 둘러싸고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다양한 ‘팩트’들을 더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로 잘 정리하고 있었다. 구성도 매우 좋았다.

필자가 기시감을 느꼈던 장면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보고서의 대미무역수지 누락’ 부분이었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보고서의 대미무역수지 누락’이 PD수첩 이외의 다른 매체, 즉 <월간 말>의 특종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기사를 이미 지난 4월에 읽었다. 그러나 'PD수첩'은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PD수첩'의 이같은 보도 태도가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를 필자는 어떤 단행본에서 본 적이 있었다.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필자는 책꽂이를 뒤지기 시작했고, 요행히 그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책의 제목은 <격암유록은 가짜, 정감록은 엉터리, 송하비결은?>이었다. 제목이 좀 길다(이하 <격암유록은 가짜>로).

“남이 몇년 동안 힘들여 밝혀 놓은 일을”

<격암유록>이라는 책,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실 것이다. 450여년전, 조선 명종 때의 도인이라는 격암 남사고 선생이 남긴 것으로 알려진 ‘예언서’다. 일각에서 이 책을 ‘민족의 예언서’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 내용은 한국이 ‘머지않은 장래에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다’는 것이다.

저자 김하원씨는 원래 오컬트 현상에 관심이 많아 ‘예언서’들을 자주 탐독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김씨는 <격암유록>에 일제시대 이후의 단어와 성경 용어(십자, 구세주, 복음, 방주)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팩트’에 의구심을 가지고 이 책의 출처를 추적하게 된다. 1990년대 중반쯤의 일이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격암유록>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긴 하나 그 등록시기는 1977년이고 그나마 원본이 아닌 사본이란 것을 알아내게 된다. 또한 격암유록의 ‘원본’(?)을 필사해 만든 사본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한 당사자 이아무개 노인이 1990년대 중반 당시 신앙촌(부천 소사구)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탐사취재를 통해 밝힌다.

이 신앙촌은 그 유명한 ‘말세 성인’이자 영생교 승리재단 등 ‘한국인 구세주’ 계보의 원조인 박태선 장로가 조성한 곳이다. <격암유록>을 옮겼다는 이아무 노인과 주변의 신앙촌 주민들을 인터뷰한 김씨는 이같은 현장 취재로 <격암유록>에 대한 자신의 가설(가짜다!)을 완성하게 된다. 김씨의 책은 이아무개 노인이 ‘옮긴이’가 아니라 ‘저자’이며, 격암유록이 저술된 목적은 ‘박태선 장로가 구세주’란 ‘사실’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하게 암시한다.

이는 정말 탐사취재의 전형이다, 10여년에 걸친 기자 경력을 가진 필자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김씨가 1995년 중반 <격암유록은 가짜>를 낸 뒤 몇개월 후 'PD수첩'에서 연락이 왔고, 그는 3일간 휴가를 내면서까지 방송국의 취재를 도왔다고 한다. 'PD수첩'은 김씨가 찾아낸 옮긴이 혹은 저자인 이아무개 노인을 찾아가 인터뷰까지 한다. 그리고 1995년 9월 'PD수첩'은 '위대한 예언서인가? 희대의 조작인가?'란 제목으로 관련 내용을 공개한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에 대한 김하원씨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정말 한동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정말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남이 몇년 동안 힘들여 밝혀낸 일을 자기들이 한 것처럼 방송해 버릴 줄은.”

김씨와 그의 저서인 <격암유록은 가짜>의 존재는 'PD수첩'에서 거의 삭제되어 있었다. 다만 프로그램 중간에 격암유록 해설서들을 모아놓고 카메라로 잠시 훑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속에 <격암유록은 가짜>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작지만 중요한 실증 증거”

'PD수첩'의 이번 방송에서 필자가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부분은 다음과 같다.

팩트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지난 3월3일 발표한 <한미FTA의 의의와 기대 효과>에 FTA 체결 이후 기대되는 ‘대미 무역수지’ 항목 등이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보고서에서 ‘무역수지 추정’은 절대로 빠질 수 있는 항목이 아니다. 왜 빠졌을까.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밝혀낸 기사가 바로 <월간말>이 지난 4월 이 회사의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한미 FTA 대미 무역수지 전망 수치 은폐 조작 의혹'다. 이 기사에 따르면 <한미 FTA의 의의와 기대 효과>에는 '원(原)보고서’가 있었고, 여기에는 "대미 무역수지가 한미FTA 체결 이후 72억7천만 달러 흑자 감소"로 분명히 기재되어 있었다.

이 기사를 쓴 고동우 기자는 상당한 취재 과정끝에 ‘원(原)보고서’를 입수했고, 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관계자를 인터뷰해서 확인을 거친 것으로 <월간말> 2006년 5월호에 기록되어 있다. 정태인 전 경제비서관은 이 기사를 두고 “졸속으로 치닫는 한미FTA에 제동을 거는, 작지만 중요한 실증 증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를 보도한 'PD수첩'은 <한미FTA의 의의와 기대 효과>에 ‘대미 무역수지’ 등이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 뒤, ‘원(原)보고서’를 제시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넘어가 버린다. “확인 결과 원래 보고서에는 대미 무역수지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주어가 빠진 좋지 않은 문장이다. 이 ‘원래 보고서’를 입수해서 ‘확인’한 장본인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PD수첩'인가, <월간말>인가. 분명한 것은 <월간말> 독자의 수백배가 넘을 'PD수첩'시청자들은 당연히 'PD수첩'이라고 대답하리라는 추정이다.

출처 밝히기는 최소한의 비용

이런 글을 쓰는 것이 필자에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날 방영된 'PD수첩'의 내용에 100% 공감했고 감탄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은 국정홍보처가 일간지에 전면 반론광고를 내게 하는 등 적잖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데다, 한미FTA에 대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히 하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런데도 필자가 시비를 걸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첫째, 'PD수첩'의 이같은 보도 태도는 명백한 시장에서의 무임승차 행위이다. 일반적으로 특정 재화의 시장에서 무임승차 행위가 빈번한 경우 그 재화의 생산은 억제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A라는 기업이 특정한 규모의 비용을 투입해 생산해내는 상품이나 기술을 동종 업체가 무료로 사용해서 유사품을 만들어내는 경우 A사의 수익은 감소하게 되고, 이에 따라 지속적인 상품 생산이 어려워지게 된다. 즉, 특정 언론사가 애써 생산한 특종이 그 언론사의 성과로 인정되지 않으면 그 언론사의 생존 역시 어려워진다. 특종에 대한 사회적 승인은 언론사의 가장 중요한 수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래서 'PD수첩'의 이같은 보도 태도는 장기적으로 ‘언론과 논조의 다양성’을 해칠 것이다. 거대기업인 방송사나 '조중동'이든 기자 수가 3~10명 수준인 <월간말> 등의 진보언론이든 혹은 김하원씨 같은 개인이든 고유의 관심과 고유의 독자층이 있고, 이에 따라 고유의 상품(기사)을 생산하게 마련이다. 또한 이 기사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

MBC 같은 거대언론이 작은 진보언론들이 한계비용으로 힘겹게 취재한 성과를 무단으로 인용해서 이 언론들의 활로를 더욱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다. 거대언론인 MBC는 ‘원(原) 취재의 출처’ 정도는 분명히 밝히는, 최소한의 ‘비용’은 치러야 했다. 이는 '조중동'의 신문시장 과점을 질타하는 것보다 ‘언론시장과 논조의 다양성’을 위해 훨씬 쉬운 일이다.

그리고 진보언론의 논조가 ‘언론의 다양성’ 차원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월간말>을 비롯한 한국 진보언론들의 역사는 진보적 의제가 전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꾸준히 입증해 온 과정이었다(방송사들이 최근 들어 접근하고 있는 한미FTA에 대해서도 <월간말>은 이미 수년전부터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해 왔다).

셋째, 'PD수첩'의 이같은 보도 태도는 자기 정당성을 허무는 행위이다. 이미 밝혔듯이 김하원씨나 <월간말> 기사에 대한 'PD수첩'의 무단 인용은 이 소규모 언론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으로 적절한 시장질서에 대한 침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미FTA 비판은 ‘극단적인 시장 지배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PD수첩'이 극단적 시장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방법이 적절한 시장질서에 대한 침해라면 정말 곤란하다.

진보언론, ‘진보’보다 ‘생존’이 더 급하다

이같은 해프닝은 최근 한국 언론시장에서 진보언론의 지위 약화를 반영한다. '조중동'의 특종이라면 어느 언론사가 감히 출처 없이 보도할 수 있겠는가. 진보언론 관계자들(경영진과 사무직, 기자직)은 긴장해야 한다. MBC 같은 거대언론과 그 구성원들은 향후 상황이 어떻게 되든 생존할 수 있지만 진보언론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후 전망은 진보언론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그동안 진보언론들이 그나마의 자본과 인력, 내부 추진력을 동원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경제외적 요인들, 즉 역사적 정당성과 이데올로기는 이미 소진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진보언론들은 이제 노골적인 자본주의 시장질서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아무리 싫어도 그런 상황이 닥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현재의 상황에서 진보언론 구성원들이 당면 문제로 고민해야 할 것은 ‘진보’보다 ‘생존’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언론들은 이른바 성장지상주의를 반대해 왔지만 기실 진보언론들이야말로 성장하고 확장하지 않으면 살 길이 없다. 안 그런가?

진보언론의 노동자들은 ‘진보의 이념’을 지키고자 사내에서도 ‘자본의 절대적, 상대적 착취’를 저지하기 위해 열심히 투쟁해야겠지만, 그 회사들 대다수는 잉여가치가 ‘착취’되는(이윤이 나오는) 기업도 아니다. 사실 적자 기업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진보언론은 ‘경영이 문제’라고 하지만, 그 경영자들, 노동에 대한 통제(control)권이나 제대로 부여받고 있는가? 경영 행위의 핵심은 광고나 사장의 대출 능력 따위가 아니다. 노동을 조직하는 권한이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진보언론 구성원들은 자사의 정체성(자본주의 기업? 조합? 이에 따른 경제적 리스크와 통제의 배분 방법), 자사의 목적(민중의 이익에 대한 복무? 이윤 극대화? 구성원 복지?), 신자유주의 심화에 대한 대안적 세계관(노동자 보편주의? 국민주의?), 노동규율(노동자들의 웰빙? 기업확장을 위한 과잉노동?), 경영진에 대한 관점(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잉여가치 착취자? 동지?) 등 주요한 주제에 대한 합의와 이에 기반한 생존구조를 찾아내야 한다. 내년 대통령 선거 이후라면 이미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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