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입니다. 2006년 7월6일이면 코오롱 노동자들이 이웅렬 회장의 ‘황제경영’이 불러온 부실 덕분에 일자리를 모조리 빼앗기고 참담함과 처절함으로 싸워온 지 500일이 됩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100일을 무사히 보낸 것을 기뻐하고, 첫돌을 맞은 것을 함께 축하하지요. 방실방실 웃는 아이의 해맑은 웃음을 보며 우리는 많은 기원을 합니다. 무병장수하기를 바라고, 사회의 큰 일꾼이 되기를 바라고, 무엇보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남의 권리를 짓밟지 않는 어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코오롱 노동자들이 맞은 이 500일, 노무현 대통령님은 저희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더이상 목숨 걸지 말고, 더이상 울지 말고, 더 이상 사고치지 말고 참여정부의 침묵하는 국민으로 돌아가길 바라십니까?


노무현 대통령님이 저희를 축하해야 하는 이유!

노무현 대통령님, 어느 누구보다 당신은 코오롱 노동자들의 500일을 축하해주셔야 합니다. 대기업노동자의 양보만이 사회양극화를 해결하고, 비정규직 문제를 해소한다고 주장해 오신 당신은 코오롱 노동자들이 2005년 2월 얼마나 많은 양보를 했는지 모르시지 않겠지요?

당시 언론은 코오롱 노동자들의 양보를 기업을 살리기 위한 희생이라 묘사하며 대서특필한 바 있습니다. “앞으로 인적 구조조정은 없다”는 약속을 회사가 일방적으로 어겼음에도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임금을 삭감하면 정리해고는 않겠다는 감언이설을 믿고 1인당 1천만원의 임금도 삭감했습니다. 당신의 믿음처럼 대기업노동자는 양보했지만 코오롱의 비정규직은 확대되었습니다. 그들의 노동조건은 더욱 나빠졌고, 살아남은 정규직의 고용은 매일매일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당신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도 당신은 우리의 500일을 축하하고 ‘좀 더 버텨서 양보의 미덕이 옳았음을 확인하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타워크레인 진압이 준 ‘확연한 깨달음’에 감사드립니다

내친 김에 더 하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500일의 소회가 어찌 간결하고 담백할 수만 있겠습니까? 5월26일 대통령님의 집무실이 보인다는 금융감독원 신축공사장 타워크레인에 올라간 세명의 코오롱 노동자들이 11일만인 지난 6월6일 새벽 경찰특공대의 물대포를 맞으며 개처럼 끌려내려 올 때 짐승같이 울부짖던 노동자의 외침을 들으셨습니까?

탁한 새벽 공기를 가르던 그 외침은 청와대 담장을 넘지도, 앞마당에 닿지도 못했을 테지요. 진압이 결정되던 바로 그 순간 당신은 모든 것을 닫아 버렸을테니까요.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후보 시절의 당신조차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고 계실 테니까요. 그때 우리는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당신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을 우리가 애써 들추려는 것 자체가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린 짓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당신의 말씀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찬물을 뒤집어 쓴 듯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웅렬 회장의 ‘가학’과 ‘자학’으로 얼룩진 코오롱의 500일!

코오롱이 보낸 500일은 잔혹한 폭력과 가학의 시간입니다. 용역깡패와 노동자 매수와 블랙리스트, 철제울타리와 감시카메라로 채워진 시간입니다. 그 잔혹한 가학은 코오롱이 노동자에게 가한 것이었지만 실제 상처받은 것은 우리만이 아닙니다.

이웅렬 회장이 인정하든, 인정치 않든 코오롱과 이웅렬 회장 자신에 대한 자학이기도 했습니다. 왜? 그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모두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윤리경영과 현장밀착경영이라는 이웅렬 회장의 경영방침은 사실상 거짓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코오롱은 정리해고가 경영상의 어려움에 따른 불가피한 구조조정이라고 강변했지만 용역고용에 사용된 백억에 달하는 경비는 그것이 핑계임을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시장에 맡겨진 기업의 합리성을 믿고 싶겠지만 애시당초 신뢰를 깨버린 코오롱의 비합리적 선택은 파괴와 억지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법과 원칙, 대화의 타협의 실존을 보고 싶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저희들은 대통령님이 말하시는 법과 원칙, 대화와 타협이 어떤 때 어떻게 적용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코오롱은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조합을 철저히 부정했습니다. 9개월 동안이나 정당한 선거로 당선된 집행부를 단 한차례도 인정한 적이 없었으며, 조합원을 대표하는 위원장에게 “위원장을 사칭하지 말라”는 공문까지 보냈습니다. 노동조합의 모든 교섭요청공문을 내용증명으로 반송했고, 시청과 노동부, 즉 국가기관이 노동조합을 인정해도 코오롱은 인정할 수 없다고 공언했습니다. 이렇게 코오롱에서 법과 원칙은 한번도 실존하지 않았습니다.

대화와 타협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사 직접교섭의 물꼬가 터진 것은 위원장이 칼로 자신의 동맥을 긋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대화 한번 하는데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현실이 참담합니다. 저희가 만난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동자들은 5년간 노동조합을 한다는 이유로 해고되고 집단적으로 따돌림 당해 전 조합원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이 기막힌 현실이 대통령이 계신 대한민국 노동자의 오늘입니다. 법과 원칙, 대화와 타협은 철저히 박제 당해 통치의 장식물로만 남았습니다.

축하의 선물을 부탁드립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끝으로 한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코오롱 구조조정의 결정타로 작용했던 2004년 코오롱캐피탈 자금횡령 사건의 진실을 밝혀주십시오. 자본금의 절반이 넘는 480억이란 거금을 한 개인이 몇년에 걸쳐 횡령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수년간 회사 회계를 맡았던 회계법인조차 이를 알지 못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이유는 지금도 법정공방이 진행되고 있는 이 사건이 바로 내 일자리를 빼앗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참 험난한 시간이 남았다는 예감이 듭니다. 지나온 500일도 우리에겐 참으로 모질고 험난한 시간이었습니다. 피해갈 수 없었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나온 500일의 시간이 배수의 진이 되어 흐릅니다.

지금 이 시간, 구속된 코오롱노동조합 최일배 위원장, 황윤석, 송진만 부위원장의 재판이 열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투쟁에 부끄럽지 않았던 노동자. 한 인간으로 최선을 다했던 우리의 동료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존경과 사랑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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