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존권 벼랑 끝에 서 있는 건설노동자…2000년 11월 말 한국의 '자화상'

현장은 꾸밈없이 잘 표현된 하나의 시나리오다. 시나리오를 읽으면 영화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듯이, 현장을 보고, 그 속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마음으로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현장은 지금 신음하고 있다. '11·3 퇴출'과 건설업의 '몰락'이 사회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현장에서 몸으로 느끼는 그들은 굳이 많은 것을 동원하지 않아도 여실히 보여준다.

"딱 세 발짝만 내디디면 모든 것이 끝날텐데…"

3년째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조아무개씨(48)는 또다시 이런 극단적 생각을 갖게 될까봐 몹시 두렵다고 했다. 어렵게 시작한 건설 관련 사업이 지난 97년 IMF무렵 부도가 나 빚 독촉에 시달리며 이리저리 전전할 때, 지하철이 오는 것을 알려주는 '삐리리…' 소리가 들릴 때면 자주 들곤 했던 생각이란다.

"죽을 바에야 무슨 짓을 못하겠냐고? 남 일이면 쉽게 말할 수 있어. 본인이 닥치면 처절해." 건설업계 불황에 '11·3 퇴출'로 일자리가 '꽁꽁' 얼어붙은 요즘, 한숨만 늘었을 뿐 가슴은 쪼그라들고 있다던 조씨.

"어제 벌어놓은 걸 오늘 써야되는 느낌, 모를 거야." 점차 노을져 오는 얼굴을 한번 훑은 뒤 그는 말을 이었다.

"월급 받는 사람은 오늘 비와도 월급에서 깎이지 않지? 하루 벌어먹고 사는 우린, 비와서 하루 일 못하면 돈이 안 생겨. 안 생겨도 좋다 이거야. 일없는 하룰 때우려면 어제 벌어놓은 걸 써야돼. 오늘 못 벌어서 손해, 오늘 써야 되기 때문에 손해. 난 참 더러워서…." 15년째 건설관계 일을 했고 용접에 남다른 기술을 갖고 있는 조씨는 10월 한달 중 한번은 5일, 또 한번은 3일, 7일 모두 세 번 현장을 뛰어 15일간 일했지만 자금이 돌지 않아 아직 임금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11월엔 그나마 일한 날이 엿새밖에 안된다. "열심히 하고 싶어도 일이 없어. 내 팔자는 이거다. 술 마시며 한(限)으로 시간을 때우는 거야" 주머니에서 꼬깃해진 천원짜리 2장과 백원짜리 서너개를 내보이고 자신의 현실이라며 소주 한잔을 비워버린 조씨. 끓는 감자탕 위로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조씨의 손은 그의 한(限)만큼이나 거칠어 보였다.

"들어오는 일자리는 한자린데 찾아오는 사람은 두 자리 수니..."

"없어. 거의 없다니까. 하루에 2∼3건 일자리가 들어오면 다행이게." 일용직 노동자이자 인천건설일용직노동조합 조직국장 지대경씨(46)는 노조에서 운영하는 무료취업알선센터 자료철을 '추르륵' 훑으며 이렇게 말을 던졌다.

건설업이 '겨울잠'을 자는 동절기인데다가 IMF이후 저성장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정부의 건설정책, '11·3'퇴출까지. 여기에 인천은 영종도신공항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그야말로 건설관련 일자리가 '전멸'되다 시피한 실정이다. 2∼3건 들어오는 일거리도 지방이 대부분이고 기술직이 아닌 남동공단에서 일하는 잡역부일 뿐. 지씨가 보여준 구직알선카드들은 이런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노동자들이 '실직상태로 지낸 기간'을 쓰는 칸에 6개월은 비일비재하고 1년 2개월, 2년까지 적어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온 노조 사무실엔 직업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노동자 4명이 구직카드를 열심히 작성하고 있다. "들어오는 일자리는 한자린데 찾아오는 사람은 두 자리니..." 지씨는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기업의 퇴출 기준이 단순히 수치비교라니..."

"저는 그래도 젊어서 괜찮아요. 40∼50대 직원들이 걱정이죠."

지난 19일 신화건설 노조 사무실. 하루 전날 회사가 파산선고를 받은 충격파의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어지럽게 쌓여있는 라면상자에서 이날까지 신화건설 노조 집행부들이 조를 짜서 지난 11월 1일 법원의 퇴출 결정과 '11·3퇴출'에 반발하며 '철야농성'을 벌여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무실엔 법규부장 김진정씨(33)만이 남아 있었다.

"억울했죠. 퇴출 선정기준 자체가 기업의 지적능력·노하우 등 내적 가치를 무시하고 현 시점에서 발생한 이윤만을 가지고 단순히 수치 비교를 통해 결정됐으니..." 신화건설이 주로 하는 플랜트 공사는 고부가가치 및 지식기반 산업으로 잘 훈련된 한 명의 엔지니어를 키우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고 강조하는 김씨. "현재 직원이 700여명 정돈데 파산 이후 남은 공사를 마무리하는 인력을 제외하고 2/3 가량이 그만 둬야 합니다. 3000여 가족의 생존권이 헌 신짝처럼 내던져 지는 거죠. 새롭게 일자리 구할 수 있는 놈만 구해봐라. 그거겠죠?" 김씨는 긴 한숨을 쉬며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이해시키고 싶은 듯 신화건설 관련 자료를 복사한 후 읽어보라며 건냈다.

'11·3 퇴출' 선정, "현장 확인 없이 졸속으로 이뤄졌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11월 9일 당시 대동주택, 일성건설을 청산 대상에 집어넣은 것은 채권단이 '회사정리절차 폐지 또는 화의취소 신청'을 한다는 의미일 뿐이라며 이들 기업의 퇴출여부 판단은 법원의 소관이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져 '11·3 퇴출'에 포함됐던 두 건설회사가 사실상 퇴출명단에서 제외된 것이나 마찬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1·3퇴출' 선정기준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퇴출 발표 직후 대동주택노조는 "화의 이후 순수 대동주택자금으로 140억원을 상환했다"며 창원 민주당사 앞에서 집회를 갖는 등 강하게 반발한 바 있다.

또한 일성건설노조도 "올 상반기 2천억여원의 흑자를 냈고 법원도 정리 계획이 원활히 수행된다고 평가한 만큼 청산 대상기업은 어불성설"이라며 법원 소송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이 밖에 건설업체는 아니지만 광주의 양영제지는 이미 올 4월 법원의 경매가 끝나 회사이름도 '두림제지'로 바꿔 아예 사라진 회사인데도 '11·3퇴출' 명단에 존재하지도 않은 '양영제지'가 올라온 것은 '해프닝'이라고 하기엔 '살생부'로 통칭된 이번 퇴출발표가 갖고 있는 무게가 너무 무겁다. 이로써 '11·3 퇴출'이 현장 확인 없이 졸속으로 이뤄졌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공감되는 분위기다.

'퇴출' 2년 후 또 '반복'…대책 여전히 '미흡'

"선진국과 달리 우리는 금융기관의 부실판정 기능이 오랫동안 작동하지 않아 부실기업이 누적돼왔기 때문에 시한을 잡아 일괄정리가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금융이 정상화돼 금융기관의 부실기업 판정이 상시적인 경영활동으로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98년 6월 55개 퇴출대상 기업을 발표할 당시 정부가 발표문에서 굳게 다짐한 약속이었다. 그러나 2년이 조금 지난 지금, 무색하게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무책임'이란 말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또 다시 노동자들이나 국민들에게 일방적으로 고통을 전가시키고 있다는 원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 구조조정의 당위성을 설득시키는 일은 낙타의 바늘구멍 통과보다 어려워 보인다.

건설산업연맹은 건설업체 퇴출만 집계한 통계자료를 통해 '11·3 퇴출'로 6600여 협력업체와 18만명이 실업자가 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반해 정부의 대책은 이전과 '별다르지 않다.' 노동부가 3일 오후 발표한 '부실 퇴출에 따른 노사관계 지원 및 고용안정 대책' 역시 "11·3 퇴출 조치로 일자리를 잃은 근로자들도 미지급된 임금·퇴직금에 대한 정부의 보전 및 실업급여 지급 등 기존 실직자들이 받던 혜택을 그대로 받을 수 있다"는 정도였다. 이밖에 정부가 장려금을 지원한다고 해도 기업들이 다른 회사 실직자를 얼마나 채용할지 의문이며 실직자 재취업훈련도 여태까지 그러하듯 별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이렇듯 반복되는 쳇바퀴처럼 또 노동자만 생존권의 벼랑 끝에서 가슴 졸이며 서있게 되는 현실이 2000년 11월 말 한국의 '자화상'이다. 조금이라도 해결을 바란다면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인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지금, 이 시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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