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8시, 민주노총 원정투쟁단은 워싱턴DC 백악관 앞에 위치한 헤이-아담스 호텔로 향했다. 8시30분에 미국의 노동계를 대표하는 미국노총산별회의(AFL-CIO)와 승리혁신연맹(The Change to Win Federation), 그리고 한국의 노동계를 대표하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한미FTA 협상 중단을 촉구하는 공동성명 기자회견을 갖기로 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국내 방송사 및 언론사 기자들은 많이 보이는 반면, 미 현지 언론은 적어 보인다. 공동성명의 세부문안에 대한 협상이 어제 늦게까지 진행된 탓에 미국 노동계측의 홍보가 다소 부진했던 모양이다. 호텔 내에서 리차드 트룸카 미국노총산별회의 사무총장, 안나 버거 승리혁신연맹 위원장, 김태일 민주노총 사무총장, 백헌기 한국노총 사무총장이 공동성명서에 서명한 후 모두 손을 굳게 맞잡고 연대의 결의를 다졌다. 이후 공동성명서 발표 및 기자회견은 인근 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진행되었다.

6월6일…“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무역이 아니라 공정무역”

한미 노동자들은 공동성명서를 통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FTA 협상의 중단을 촉구함과 동시에 한미FTA는 노동자의 권리와 환경에 대한 미약한 보호,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고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정부 권한의 침해, 초국적기업의 투자와 이익을 위한 강력한 보호 조항 등을 포함하고 있는 등 실패한 NAFTA 모델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점을 공유했다. 이후 한미 양국 정부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FTA 협상을 중단하고, 노동조합을 비롯하여 시민사회단체와 충분한 협의를 통해 노동친화적인 양국의 무역과 경제협력 모델의 형성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는 등 긴급한 5가지 항목을 요구하고,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FTA 협상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협정이 이행되지 않도록 강력하게 공동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공동성명 발표 및 기자회견 후 초청을 받고 AFL-CIO 빌딩을 방문했다. 소속 조합원이 700만명에 달한다고 하더니 건물도 상당히 크고, 실내도 매우 깔끔하다. 민주노총 사무실이나 사무연맹 사무실을 생각하니 우선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보이는 사람 수에 비해 과도하게 많아 보이는 수많은 회의실과 널찍한 사무 공간 등 부럽기도 하지만 사치스럽고, 귀족적이다는 느낌도 함께 한다.

12시 미국 양대 노총과의 연대 집회를 위해 무역대표부 앞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미국 양대노총과 함께 하고 있는 동안 백악관 앞에서 ‘평택 미국기지 확장 반대’ 집회를 가졌던 다른 원정투쟁단과 재미위원회 동지들은 이미 모여 있었다. 한나절 동안의 이별이었지만, 모두의 얼굴을 보니 정말 반갑다. 함께 연대하여 투쟁한다는 것이 서로가 깊은 동지애를 갖도록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다양한 국제적·사회적 연대에 관하여 더욱 많은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미무역대표부 앞의 공동집회에서 승리혁신연맹의 팀 비티 국제부장은 우리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무역이 아니라 공정무역(Fair Trade)이며, FTA는 기업가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체제라고 역설했다. 왠지 가슴에 쏙 들어오는 말이다. 민주노총 김태일 사무총장은 미국 노동자들의 연설에 화답하며, 양국 노동자의 단결만이 한미FTA를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하 길이며, 오늘 집회에 참석한 노동자의 수는 적지만 향후 한미FTA 저지 투쟁의 소중한 불씨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역설했다. 공동투쟁과 연대라는 오늘의 작은 불씨가 지속적인 연대로 확장되어 서울에서 열리는 7월의 2차협상 투쟁이 더욱 힘차고 견고하게 진행될 것을 기대해 본다.

양국 노동자들의 연대집회 후 조합원 수가 600만명에 달한다는 승리혁신연맹을 방문했다. 선입관 때문인지 모르지만 AFL-CIO 방문 때보다 더 진심으로 환영하고 반기는 분위기다. 마침 한국의 중앙집행위원회와 같은 성격의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회의실에 들어가 민주노총 원정투쟁단 모두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한 후, 김태일 사무총장이 간단하게 인사말을 하였다. 승리혁신동맹 동지들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친다. 의례적 행동일지 몰라도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일정은 5개 부문으로 나누어 진행되는 ‘신자유주의 반대, 한미 FTA 저지 부문별 국제연대 워크숍’이다. 민주노총 동지들은 제3부문 ‘말레시아-미국 자유무역협정, 미국과 아시아지역 자유무역협정 사례를 통해 본 신자유주의의 모순’이라는 주제의 워크숍에 참석했다. ‘제3세계연대’ 소속 연구원인 샤오 룽 인 동지의 미국과 아시아 지역국가간의 FTA 사례 발표가 있었고,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의 FTA 협상 체결 시 서비스 부문의 대미 종속 강화가 우려된다는 내용의 발표도 있었다. 중요한 내용의 토의가 오고가고 있음에도 자꾸 눈이 감긴다. 다른 동지들도 가끔 눈이 감겼다 자세를 바로잡는 모습이 많이 피곤한 모습이다. 다행히 오늘 저녁은 별다른 일정이 없다. 민주노총 동지 4명이 묵고 있는 우리 방이 비교적 쾌적한 편이라 많은 재미위원회 동지들이 찾아와 저녁마다 소주와 함께 열띤 토론의 장이 벌어지고 했는데 오늘은 남은 일정을 위해 마음 굳게 먹고 일찍 취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6월7일…“미국 시민들의 호기심과 뜨거운 햇빛 아래서 진행된 삼보일배”

어제 일찍 잠든 덕분에 우리 방 동지들 모두 5시경 일어났다. 가볍게 산책이나 하자며 나갔는데, 1시간 이상이나 워싱턴DC 시가지를 돌고 왔다. 어젯밤에 보충한 힘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오늘은 한미 양국의 국회의원들이 한미FTA와 관련하여 공동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기자회견 장소인 미국 하원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안의 미국 시민들은 단체복과 손수건을 걸친 우리들의 모습이 신기한지 자꾸 바라본다. 일부 재미위원회 동지들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FTA 관련 유인물을 주기도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10시경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기자회견에는 강기갑 의원 외에 미국 민주당 소속 하원의원들인 데니스 쿠치니치(오하이오주), 마시 캡터(오하이오주), 셰일라 잭슨 리(텍사스), 존 코나이어스(미시간)와 무소속 하원의원인 버니 샌더스(버몬트) 등이 참여했다.

기자회견을 통해 한미 양국 의원들은 7월 한국에서 열릴 예정인 한미FTA 2차 본협상에 맞춰 양국 국회의원들의 공동성명 발표 등 공동행동을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데니스 쿠치니치 하원의원은 한미FTA는 양국의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대다수 국민들을 위한 협상이 아니라 거대 자본과 소수의 기득권층만을 위한 협상이라며, 미 하원에서 한미FTA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적극적으로 모으겠다고 밝혀 기자회견에 참석한 원정투쟁단원들의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마시 캡터 의원도 FTA는 자유로운 삶의 기회를 앗아가는 기회의 박탈이며, 이에 따라 FTA에 대한 지지자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역설하여 원정투쟁단에게 힘을 더해 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국에서 온 언론매체 뿐만 아니라 AP통신 등 여러 현지 매체들도 보인다.

기자회견 후 도로로 나서, 원정투쟁단 뿐만 아니라 재미위원회 동지 모두가 기대했던 삼보일배 행진이 시작됐다. 삼보일배 경험자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모두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다소 긴장된 모습이다. 현지 시각은 오전11시경. 아직 도로 위의 아스팔트가 심하게 달구어지진 않았겠지만, 삼보일배 행렬을 비추는 워싱턴의 햇빛은 상당히 뜨겁다. 행렬의 선두에는 소속 단체들의 깃발이 섰다. 그뒤를 풍물패가 뒤따르고, 이어 삼보일배 행렬이 3열종대로 이어졌다. 행렬의 뒤에는 민주노총에서 제작한 대형 플랭카드와 만장 행렬이 뒤따랐다. 꽹과리와 북을 신호로 세걸음을 내딛고 한번 절하는 방식으로 삼보일배 행렬이 진행되었다.

엎드려 절을 하는데 뜨거운 햇빛에 달구어진 아스팔트의 열기가 얼굴까지 덮쳐온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괜찮겠지 했던 생각은 오산이었다. 초보자도 많고 여성 동지들도 많은데 걱정이 앞선다. 엎드려 절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다. 모든 동지들이 삼보일배가 끝나는 순간까지 무사히 완수하게 해 달라고. 잠깐 동안의 행진에도 땀이 비오듯 흘러내린다. 연도에서 신기한 눈빛으로 우리 행렬을 바라보고 있을 미국 시민들을 생각하면 다시 힘이 솟는다.


삼보일배 행진은 도로의 차선 하나를 따라 이루어졌는데, 현지 경찰이 앞뒤에서 교통통제를 하고 있다. 행진 중 행렬이 한 차선을 다소 넘어가는 순간 현지 경찰이 타고 있는 오토바이 한 대가 행렬을 스치며 위험하게 지나간다. ‘나쁜 놈’ 소리가 절로 나올 판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저런 사람이 있다. 중간 중간 휴식을 취하며 진행하다 보니 행렬이 거의 3시간 가량 진행된 것 같다. 우리들이 입은 옷은 땀으로 축축하고, 수건 한 장을 달랑 두른 약식 무릎 보호대도 너덜너덜 해지고,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삼보일배를 무사히 마친 동지들의 모습만큼은 매우 밝았다.

약 5분간 최종 목적지인 평화광장에서 ‘DOWN! DOWN! FTA!" 등 갈고 닦은 구호를 신명나게 외쳤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현지 시민들의 관심이 대단했단다.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는 것은 물론이고, 디지털카메라와 비디오카메라로 삼보일배 행렬을 촬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삼보일배의 종착지인 평화광장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투쟁단은 USTR까지 가두 행진을 하고 USTR 앞에서 약식 집회를 가졌다. 이후 숙소로 이동하여 원정투쟁단 참가 단체별로 중간평가회의가 진행되었다. 사전 준비 부족부터 원정투쟁활동과 관련한 의사소통의 소홀 등 여러 가지 비판도 많이 나왔지만, 재미위원회 동지들의 헌신적 투쟁에 감동받았다는 소감은 모든 동지들이 전폭적으로 공감을 표했다. 원정투쟁단을 민주노총은 물론이고 범국본 차원에서 더 적극적으로 조직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는 아쉬움도 모두가 같은 의견이다. 원정투쟁이 지금까지 거둔 성과 역시 높이 평가해야 하고, 원정투쟁단이 귀국 후 한미FTA 저지 투쟁에서 보다 더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논의로 평가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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