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관계 로드맵(법·제도 선진화 방안)이 노동계를 유령처럼 짓누르고 있다. 그 유령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불가사리처럼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 버리지는 않을지 불안은 안개처럼 퍼지고 있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2007년 1월1일을 계기로 이른바 ‘2007년 노동체제’의 도래를 점치기도 한다. 그렇건만 노동계의 모습은 갈피를 못잡고 허둥대기만 할 뿐 전망을 찾는 노력에선 강태공의 낚시질마냥 한가롭게만 비친다.

노사관계 로드맵의 초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복수노조의 허용과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에 모아진다. 현재까지의 주요 논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전임자는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한시적으로 그것도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 그리고 복수노조의 창구단일화에 관해서는 다수교섭대표제를 택한다. 물론 구체적인 사안은 노사정대표자회의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선 궁금한 것은 로드맵이 과연 타결이나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비록 노사정대표자회의에 한국노총이 참여하고 있다고는 하나 합의의 전망은 밝지 않다. 게다가 민주노총의 역량이 “되게는 할 수 없어도 안 되게는 할 수 있다”는 비토의 권력으로 한정된다면 상황은 꼬일 수 있다. 이 경우 결론은 전임자 임금의 전면적인 금지와 복수의 노조에 대한 자율교섭체제의 보장일 터이다. 복수노조의 허용이 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온상 노릇을 한다면 이 지점에선 사용자측으로서는 표정관리가 필요한 지점일 것이다. 노조에 대한 차별행위가 교섭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들러리 서기 싫다면 투쟁력이라도 남든지

주지하다시피 민주노총은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노사정위원회 거부의 연장으로서 정부의 들러리를 서기는 싫다는 논리인 듯하다. 그렇다면 투쟁으로 돌파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는 데 딜레마는 존재한다.

먼저 복수노조 문제는 직접적으로 대공장노조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중소규모 노조가 우선적인 타격 대상이 될 것이다. 특히 전임자는 지금까지 “기업별 노조를 지탱하여 온 핵심적인 기둥”이었다는 점에서 중소기업노조가 설 땅은 옹송스레 줄어들 것이다. 게다가 복수노조는 노조가 로드맵의 대안으로 내세우는 산별 프로젝트의 기반을 허물 수도 있다.

복수노조가 출현하다면 그것이 반드시 노동자만의 선택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측이 ‘열중 쉬어’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합원 경쟁이 단기적인 경제주의와 분파주의의 심화로 나타난다면 이는 곧바로 초기업별 노조에 대한 도전으로 바뀔 것이다. 일본에서의 산별운동이 복수노조가 허용되고 사용자측의 부당노동행위가 기승을 떨치면서 좌절된 사례는 닛산자동차 노조에서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제1노조(산별노조)가 소멸하는 데는 일년반이면 충분하였다! 일본에서 기업별 체제가 고착되고 노사협조주의가 뿌리를 내린 바탕에는 복수노조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산별 프로젝트가 시간을 요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산별이란 하나의 대안일 뿐 만병통치약도 ‘전가의 보도’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복수노조는 산별노조마저 허물 수 있어

이제 와서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해 왈가왈부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관성의 법칙’에 철저히 복무하는 노동계의 자세도 간과할 일은 아닌 듯하다. 투쟁이 떠나버린 공간에서 애타게 투쟁을 외치는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라 하더라도 투쟁이란 단어에서 사고가 멈춰버린 그 단세포는 또 어찌할 것인가? 모든 노조는 교섭권을 가져야 하고 전임자에 대해선 노사 자율로 결정지어야 한다는 공자님의 말씀은 또 얼마나 공허한가?

“도대체 대안이 뭡니까?” 묻는 필자의 질문도 허탈하기만 하다.
“노동배제적인 노동정책 속에서 스스로 노동배제를 택하는 건 고단수의 필사즉생 전략이겠죠.” 답하는 말에서도 자심감은 배어나오지는 않는다. 비아냥거림일까.
”이보세요, 필사즉생을 달리 말하면 필사가살(必死可殺)입니다.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면 진짜로 죽어버린다는 뜻이죠. 그럴 만한 힘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중국집에서 로비나 하려들겠죠, 아마?”
“누굴 상대로?“

답답한 심정에 전화를 걸어봐도 영양가 없는 대화뿐이다. 이 순간에도 단위노조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온 몸이 바작바작 타들어갈 판인데 정치적·정책적 대응의 주체라는 민주노총은 오히려 느긋하게 노동운동의 원론이나 얼음이 박밀 듯이 되뇌고 있는 판이다. 같이 술이라도 마실 양이면 ‘옳은 소리’를 잘도 하다가도 ‘조직’에만 들어가면 입장이 바꿔는 걸 보면 ‘조직’은 무슨 마술이라도 거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일은 많아 민주노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대한민국의 고민은 죄다 걸머지고 가고 있기도 하다.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노동운동이 ‘공공의 적’이 되어 시민사회로부터도 질타당하는 건 민주노총의 아이러니일까 딜레마일까.

메아리 없는 외침, 출구 없는 고민

고백컨대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이 순간에 뾰족한 대안을 갖고 있지 못하다. 몇마디 대안을 주워섬기는 게 글의 형식을 봐서라도 필요하겠지만 상상력의 부족은 그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이미 막차는 민주노총에 먼지만 뒤짚어 씌운 채 떠나고 민주노총은 뒤에서 감자나 먹이고…. 그리하여 민주노총은 역사의 소용돌이치는 현장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아니, 주체적으로 스스로를 떼어놓고 있는 셈이다.

노동운동이 망한다고 진단을 하면서도 ‘투쟁’이라는 단어밖에는 떠올리지 못하는 그 알량한 상상력은 차라리 마르쿠제가 말했던 일차원적 인간을 떠올리게 할 판이다. 현실의 모순을 타파하려는 가능성의 차원을 무시하고 현실성의 차원에 매몰되어 각설이 타령만 되풀이하는…. 사회적 대화 없이 로드맵에 맞설 수 있다는 오만함과 노사간의 ‘역사적 타협’ 없이 산별 건설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산별 전망이 로드맵 탓에 흐트러질 수 있다는 건 한낱 책상머리의 기우일 뿐인가?

출구조차 없는 회의는 깊어만 간다. 로드맵이란 유령을 퇴치할 전략은 정말 없는 것일까? 민주노총이 ‘정책’이라고 내놓는 것조차 공동묘지에 가서 죽은 시체를 다시 꺼내놓는 느낌일 뿐이다. 정책 부재의 노동운동에 투쟁 부재까지 겹친 마당에 ‘가라앉는 전함’을 바라보는 답답함은 나만의 것일까? 제 혼자 답답한 심정으로 종이만 버리고 있을 뿐인가? 가라앉는 전함에서 돛대를 차지한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일까? 그 전함마저 가라앉고 나면 우리 사회에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