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 지방선거는 한나라당의 압승과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참담한 패배로 끝이 났다. 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한나라당의 노무현 정부 심판론에 호응하며 거기로 우루루 몰려 들었다. 인물이나 정책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한나라당 후보로 누가 나왔는지, 어떤 정책을 제시하는지도 모른 채 몰표를 던졌다.
 

민심이 한나라당으로 기울었다는 것은 선거 이전에 이미 여러 조사를 통해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선거 결과 국민들의 집권여당으로부터 이반(離反)과 한나라당으로의 쏠림의 강도는 예상을 훨씬 능가했다. 총득표수의 격차가 유례없이 클 뿐만 아니다. 한나라당은 지역 아성인 영남지역을 넘어서 수도권에서 압승했고, 수도권 광역의원은 100% 당선되었다. 서울의 강북 지지층조차 한나라당에 가담했다. 연령층으로 보아도 전반적인 우세였다.

민주노동당은 열린 우리당 심판을 외치면서 민심이 민노당으로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열린우리당 정도는 결코 아니지만 동반 하락세를 보였다고 하겠다. 민노당의 정당 지지율 12.1%는 2002년의 8.1%보다는 높은 것이었지만 2004년 총선에서 얻은 13.0%보다는 낮았다.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은 한 곳도 건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민노당의 아성이었던, 울산 북구와 동구의 기초단체장 자리도 내어 주어야 했다. 무소속 시민 후보들이 대부분 낙선했다는 것도 주목된다.

왜 이같이 집권여당이 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하고, 민노당과 시민 후보들도 고배(苦杯 )를 마시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는가. 과거 회귀로 나타나고 있는 이 지방선거의 결과는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하나. 여러 요인들이 중첩되었다.

첫째, 국정 운영능력 전반에 대한 강한 불신이다. 말은 무성했다. 사사건건 논란도 많이 벌였다. 국민들은 노 정권의 국정운영 방식에 대해 불안해 했다.그러나 실제 내세울 만한 구체적인 실적은 퍽 빈곤하다.

둘째, 양극화와 민생 파탄이다. 개발독재 시대 위로부터 국민통합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고성장-고용안정의 틀이 깨어졌다. 투자가 부진하고 고용도 불안하고 복지도 취약하다.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부동산 정책도 집값, 땅값을 잡지도 못하고 세금만 올린 꼴이 되었다.

셋째, 민주당 분당으로 반독재 저항적 지역주의의 본산이었던 호남 지역 기반이 분열되고 붕괴되었다.

넷째, 이런 가운데 한나라당의 “친북 좌파”, “북한 퍼주기”라는 선동이 먹혀들어 갔다.

다섯째,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피습이라는 뜻밖의 사건이 한나라당 몰표를 가져오는 요인으로 가세했다.

위의 여러 요인들이 중첩되어 “노무현 개혁연합”의 해체를 가져 왔다. 집권여당과 현 정부는 계층, 지역, 세대 등 어떤 면에서도 보아도, 출범 시 “노무현 연합“을 구성하고 있던 이질적이고, 유동적인 요소들을 안정적을, 공고히 묶어내고 그 외연을 확장시키는 능동적인, 정치적, 지적, 도덕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반대다. 노 정권은 가면 갈수록 개혁적 정체성을 벗어 던지고 한나라당을 닮아갔다. 그런 끝에 드디어 대연정 제안을 하고 이제 한미FTA를 후반기 국정 최대 과제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내세울 만한 실적도 없고, 민생을 고달프게 하고, 그기에 자기 정체성마저 잃고 한나라당과 닮아버린 정권이라면, 지지 기반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노무현 연합을 묶어주던 공통의 끈은 끊어졌다.

그렇지만 국민들이 보기에, 민주노동당은 아직 불확실한 존재다. 대중정당으로서 존재 자체가 미약하다. 어떤 대안 국정 능력을 가졌는지 신뢰하지 못한다. 또 민노당은 노동계의 비리, 노동운동의 이익=집단적 행태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국민들이 한나라당이 “성장-고용”의 능력은 가졌다고 보고 - 복지는 아니다 - 몰표를 던져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는 종래의 개발 독재 이미지에 대한 호응이다. 다시 말해 5·31 한나라당의 압승은 “제2차 박정희 신드롬”의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아직은 신자유주의 또는 한국판 진정

대처리즘에 대한 동의라기보다도. 물론 이는 논쟁적인 지점이 되겠다.

이번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스스로 잘 해서, 적극적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얻어서가 아니라, 열린우리당과 현 정부의 무능과 실정 때문에 반사이익을 얻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방선거의 충격이 낳은 “민주화이후 민주주의”의 흔들림과 보수적 선회, 그 “전환적 위기”는 아직 유동적 국면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지방선거에서 내년 대선까지는 다시 여러 새 변수들이 끼어 들게 될 것이다. 대선과 총선은 성격도 크게 다르다. 또 우리 국민들의 성향은 - 좋은 싫든 - 변덕스럽고 유동성이 아주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남는다.

보수세력은 그 중심을 단단히 추스리면서 동의의 능동적 확장을 시도하고 있는데 반해, 개혁세력은 한번 깨어진 민주진보연합을 재구축 하기가 매우 힘겹게 보인다. 또 국민들은 민주개혁세력의 국정운영 실력의 빈곤을 이미 체험한 바 있다.

내게 가장 어려운 문제로 보여지는 것은 97년 IMF 위기 이래 - 더 소급해서 87년이래 -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 및 양극화의 두 갈래로 갈라졌던, 지금까지 중도 자유주의 세력의 균열된, 모순에 찬 개혁노선의 통합성과 총체성을 어떤 식으로 전향적으로, “사회적인 것”을 재충전해 넣음으로써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민주진보세력은 종래의 “성장-고용”의 헤게모니 프로젝트를 대체하는 어떤 새로운, 능동적인 “성장-복지-생태”의 새 역사적 헤게모니 프로젝트와 구체적 발전모델을 가지고 사회통합과 국민통합을 달성해낼 수 있을까. 민주진보세력은 다시 한번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민주화이후 민주주의의 “전환적 위기”의 현 단계에서 어떻게 역사적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재구축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대면하고 있다.

지금까지 노무현 정부와 근거리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와 공정 경쟁 시장을 시대정신으로 삼아 활동해 왔고, 이번 지방선거의 충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제도권 시민운동단체도 이 도전을 비켜 갈 수 없다.

한미FTA 가 문제다. 한때 일시적이나마 네덜란드 또는 스웨덴 모델까지 거론하기도 했던 현 정부는 지금 “한국의 멕시코화” 프로젝트를 힘있게 밀어 부치고 있다. 극에서 극으로 달리는 형국이다.

만약 노무현 정부가 집권 후반기의 최대 국정과제라면서 추진해서 닦아놓은 한미FTA 가도(街道)을 이후 한나라당이 이어달리기 식으로 넘겨받아 완성시킨다면, 그리고 이를 지렛대로 삼아 한국사회에 대대적인, 보수적 새판 짜기 작업을 수행한다면 역사는 이를 비극이라 할까 희극이라 할까. 이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까 겁이 난다.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고 열린우리당이 참패했다는 것은 엄청 큰 충격이다. 그러나 현 단계 한국 경제-사회의 향방을 둘러싼 최대의 쟁점이라 할 한미FTA에 관한 한, 공고한 자유-보수 컨센서스가 존재한다. 여기서 나는 민주진보세력 연합의 새로운 재구축 가능성에 대해 좀 비관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시간은 남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불확실성의 세계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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