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을 일컬어 ‘상상의 공동체’라고 했다. ‘민족’이라는 말에 부합하는 사회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만 왕조국가 쇠퇴 이후 자본주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인위적 창조물’이 민족의 실체라고.

하지만 평양에 머물렀던 3박4일 동안 ‘상상의 공동체’는 적어도 내 가슴 속에는 분명 살아 꿈틀대며 실재했다. 단순한 감정뿐이라고? 글쎄….

지난 4월30일부터 5월3일까지 5·1절 평양시 행사 남측노동자참관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다녀 왔다. 이번 참관행사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150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평양을 방문해 개최하는 행사인 데다 근래 북미관계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단순한 참관만이 아닌 상당한 정치적 의의가 내포되어 있다고 봤다.

남과 북에서 노동계급이 차지하는 사회적 위상과 역할만큼 당면한 정세를 노동계급이 앞장서 실천적으로 돌파해 나가자는 의지를 가지고 북에서 제안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에 걸맞게 행사의 의의를 최대한 살리고 싶었지만 4월18일 개성실무협의에서 일정이 최종 확정됨으로 인해 준비기한이 너무 짧은 것이 문제였다. 서둘러 모집공문 만들어 보내고, 신청서 접수받고, 통일부에 방북신고 하고. 그렇게 준비기간 열흘이 후딱 지나버렸다. 그래도 전체 일정에 대해 세세하게 챙기고 준비하려 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일주일을 꼬박 밤새워가며 준비하신 민주노총 박민 국장님 덕에 가능했다.

대규모 평양 방문, 행사 의의 살리고 싶었는데…

통일부와 팽팽한 기싸움 끝에 4월29일 특별 방북교육을 통해 방북관련 실무절차를 최종 마치고서 4월30일 김포공항을 통해 북으로 출발했다. 비행기는 북쪽의 고려항공편이었다. 약간 좁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북측 승조원들이 안전띠 매는 법과 비상시 대처 요령 등을 설명하는 동안 기내에 울려 퍼지던 북측 고유 억양의 안내방송을 들으며 ‘정말 북에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노총에서 통일관련 실무를 담당하고 있어 금강산이나 개성에 자주 갈 수 있었는데, 평양은 처음이라 그런지 더 새삼스러웠다. 비행기가 부웅 날아오르고 얼마 되지 않아 눈 아래 구름들이 뭉실뭉실 깔렸다. 잠깐 이 생각, 저 생각하고 있는데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더니 이제 곧 평양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머릿속에 나도 모르게 노랫가락이 흥얼거려졌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오만원~’

분단체제에서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비용은 아직은 오만원보다 한참이나 더 든다. 하지만 서울과 평양은 정말 가깝다. 이륙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평양에 도착한 것이다. 도대체 이 거리를 지난 반세기 동안 왜 그리 힘들게 돌아와야 했나.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해 북측 직총, 민화협 간부들과 인사하고서 관례에 따른 간단한 참관 절차를 마친 후 오후부터 본격적인 공식 참관일정을 시작했다. 참관일정은 지난 실무협의에서 대략 협의한 곳을 기본으로 잡았지만, 애초 참관행사란 것이 북측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고, 말하고 싶은 것을 유적지와 명소를 빌어 나타내고자 한 것이므로 그것들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려 했다. 이해하려는 마음 없이 하나 되자고만 하는 말만큼 부질없는 것이 없으니까.

첫번째 장소는 만경대 생가였다. 김일성 주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인 만경대 생가는 그냥 평범한 농가일 뿐이었다. 평생 농사만을 짓던 김 주석의 조부모가 사용하던 농기구며 가재도구를 보존하였는데, 그것을 첫번째 참관지로 내세워 자랑스럽게 선보이는 건 김 주석이 가난한 농군의 후손이며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싶었으리라.

다음으로는 평양학생소년궁전에 갔다. 소년궁전이란 일종의 초중등학생 과외교육기관인데 소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이 오전 학교수업 이후 각 지역의 소년궁전에서 각자의 소질을 살려 특기교육을 받는다. 북측 전역 곳곳에 소년궁전이 있다고 하는데 평양에만 5개정도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찾은 곳은 그중 큰 축에 속했는데 우리가 찾았을 때 무용, 미술, 피아노, 체조, 바둑 등 여러 영역에서의 특기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다.

남쪽에서 살아가는데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아이들 교육비 문제인데, 적어도 그런 부분에서 북측 사람들은 무상교육을 아주 오래전부터 해나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해하려는 마음 없이 '하나됨'은 부질없어

둘째날은 5·1절 행사 참관으로 시작하였다. 5·1절은 북측에서는 휴일로 지정되어 명절처럼 지낸다고 한다. 오전에 전국 곳곳에서 기념행사를 가지고 오후엔 가족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나들이를 즐긴다는데, 평양에서만 5군데에서 동시에 기념행사가 치러진다고 했다. 5·1절이 단지 노동자만이 아닌 국가 전체의 경축일로 지켜진다는 점은 사회주의국가로서의 북측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성산 남문(최근 ‘국경의 남쪽’이라는 영화에서 유원지가 있는 장소로 나온다)에서 직총 평양시직맹 주최로 개최되는 기념행사에 참석했는데, 행사장 근처를 버스로 지날 때 이미 유원지에는 수많은 평양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간단한 기념식을 치르는 동안 남측 참관단 대표들도 초청에 대한 감사와 민족의 자주통일 실현에 대한 연설을 진행했다. 이어서 북측 인민배우, 공훈배우들의 공연을 관람하고 체육유희경기를 위해 남문 건너편 운동장으로 갔다.

그쪽엔 수많은 평양시민들이 우리 남측 참관단이 건너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가 보이자마자 큰 박수와 함께 ‘조국통일’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반갑고 '찡' 하던지. 구호와 함성은 10여분간 계속 되었고 우리가 준비된 자리에 앉고서야 그쳤다. 그리고서 남북 혼성으로 대성산, 대동강 팀을 구성해 ‘륜(링) 통과해 우리나라 지도붙이기’(독도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종합유희경기’(코스별 장애물경기), ‘줄다리기’를 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너무나 똑같아보였다.

따지고 보면 지난 60년 동안을 헤어져 살아오며 생각이 다르기도 하고, 문화가 다르기도 하고, 가치가 다르기도 할 텐데, 그냥 이렇게 만나니 한 몸 같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게 바로 통일이지 싶었다. 그 어떤 제도나 체제, 이념이나 사상을 떠나 원래 하나인 민족이 자신의 동질성을 획득하는 것, 누구는 그것을 ‘핏줄의 당김’이라며 감탄하기도 하고, 누구는 ‘혈연주의의 발로’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어찌됐든 그 과정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행사를 마무리하고 버스에 올라타기까지 또 평양시민들의 작별의 손짓이 계속 되었다. 우리도 버스 안에서 한참이나 답례의 손짓을 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엔 주체사상탑과 개선문, 푸에블로호를 참관했다. 주체사상탑은 과거엔 남측당국에 의해 참관 자체가 불가능했다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얘기다. 평양의 거리마다 수령과 장군을 찬양하고 자신들의 체제와 제도에 대한 자부심을 긍지높이 표현한 구호들이 가득한데, 그것들이 염려된다면 아예 방북 자체를 불허해야지 몇군데만 선별적으로 불허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우리가 하려는 통일은 북에 혹시 있을지 모를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들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북측의 제도와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또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있는 그대로의 북쪽 사람들과 하는 것이다. 다른 곳은 다 가면서도 대성산언덕이나 혁명열사릉과 같은 몇곳은 ‘정서상’이라는 이유로 참관을 거부하는 남측사람들을 보며 북측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저녁식사는 북측에서 준비한 만찬으로 이루어졌다.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들과 또 술 한잔씩들을 하고 북측의 노동자들과 이러저러한 얘기들을 나누며 모두가 얼큰하게, 그리고 흥겹게 취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에서도 우리들은 우리 방식에 맞게 노래도 한 자락씩 해가며 그 즐거움을 같이 나눴다.

셋째날은 조금 일찍 일어나 묘향산으로 출발했다. 전날 늦게까지 마신 술로 피곤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에 도착하자 또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묘향산 친선전람관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전세계 170여개 나라로부터 받은 선물 20여만 점을 전시해 놓은 곳인데, 북측의 제도와 체제에 대한 우월성을 잘 나타내는 곳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곳에 보관되어 있는 물품들은 정말 대단하게 보이는 것들이 많았는데 전 세계로부터 존경의 표시로 이렇게 많은 선물을 받고 또 이런 걸 개인이 따로 사용하지 않으면서 전시용으로 내놓는 지도자의 모습에 대해 안내원 선생은 자긍심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 같았다.

남측에서 보낸 물품들도 있었는데, 예전 동아일보 사장이 1930년대 김일성 주석이 이끌던 항일부대에 의한 보천보 전투의 기사가 담긴 신문의 동판을 금으로 제작해 선물로 보냈다고 해 찾아보려 했지만 시간이 촉박했는지 안내원 선생이 우리를 급하게 이끌고 다니느라 확인할 수는 없었다.

향산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보현사를 둘러본 후 묘향산에 잠깐 올랐다. 수려한 산세와 맑디맑은 물빛에 좀더 올라가자는 요구가 빗발쳤지만 이후 일정으로 인해 아쉬움을 또 한 차례 남긴 채 평양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밤에도 역시 술자리는 오래도록 계속 되었고, 내일이면 돌아간다는 아쉬움만큼이나 통일에 대한 마음도 더 무르익는 것 같았다.


왕래하고, 이해 폭 넓혀 통일로

5월3일, 평양의 3·26 전선공장을 마지막으로 참관했다. 평양에서 현대적 설비를 갖춘 대표적 공장 중 하나라고 하며 현 시기 요구되는 생산에서 많은 모범을 창출하고 있다고 한다. 난 이러 저러한 기계를 봐도 다 그런 것이니 하고 지나가는데, 인천의 금속 노동자들은 “이거 내가 다뤘던 거하고 비슷한데 조금 다르네” 하며 한마디씩 한다. 정말 통일이 이뤄지면 얼마나 많은 얘기들이 오갈까. 특히 우리 노동자들은 각자가 남과 북에서 이뤄왔던 생산과 건설과정의 경험과 교훈들을 공유하며 서로 자랑도 하고, 칭찬도 하며 금세 스스럼없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장을 나와 물건사기(쇼핑)를 하고 숙소에서 짐을 꾸려 공항으로 갔다. 가족들과 조합 식구들에게 줄 선물들을 한아름씩 안고서 비행기에 탑승한 남측 참가자들은 아마 사람들마다 다른 감회를 가지고 남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안 좋은 것만 보고 안 좋은 것만 생각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좋은 것만 보고 좋게만 생각한 사람들도 있을 게다. 하지만 이렇게 자주 왕래하고, 서로를 알고, 이해의 폭을 넓혀갈 때 통일의 길은 앞당겨질 수 있는 것임을 확신한다. 적어도 여기 온 사람들은 북에 와서 남쪽 사회를 돌아볼 줄 알게 되고, 통일에 대해 한번이라도 더 생각했을 테니까.

김포공항에 오자마자 민주노총 동지들은 평택투쟁에 참여하러 간다고 서두른다. 평양에서의 3박4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쪽 땅은 여전히 온갖 해결 과제들로 산적해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내 머리는 온갖 검열이 진행 중이다. 어딜 갔다가 좋았으면 그냥 좋았다고만 하면 되는데, 북에 대해서만큼은 아직까지 조심스러워진다. 어찌됐든 현행법상 난 충분히 북에 대한 고무찬양자가 될 수 있으므로.

아무튼 이번 참관행사의 대외적, 조직적 성과도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도 평양에서의 추억이 생겨 좋았다. 어렸을 적 ‘평양25시’에 나오는 음침하고 사악한 기운의 땅이 아니라 조금은 낡았더라도 잘 가꾸어져 있고, 노동자들의 명절인 5·1절을 모든 공민(국민)이 여유롭게 즐기기도 하며, 중국이나 일본, 유럽에서 온 외국인들도 상당히 눈에 띄게 많이 보이는 ‘변화중인 북’의 모습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물론 평양의 모습이 북의 전체 모습이 아니라는 것, 또 북의 모습에서 우리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이 이야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충분히 열린 마음으로 따뜻한 눈길로 다시 본다면 이해 못할 건 없다고 본다. 북은 남쪽에서 자라고 성장해 온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다. 북에 대한 비판은 그에 앞선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필요로 한다. “뭘 많이 뮉이야지~”라는 '웰컴투동막골'의 날선 비판에 앞서 ‘뭘 많이 먹은 우리들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통일은 나뉘어진 민족이 서로를 채워가는 아름다운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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