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6개월을 넘게 논란을 벌여 온 비정규 입법안은 이번 4월 국회에서도 처리되지 않았다. 반드시 통과시키겠다는 정부와 여당의 공언도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물리적 저지선과 국민대중의 심리적 저지선을 넘지 못하고 결국 식언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당하는 힘겨운 삶에 대한 거부와 기본인권에 대한 요구가 비정규법안을 통과시키라는 압력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통과시킴으로써 비정규 노동자들의 저항과 주장의 정당성을 왜곡하고 묵살과 탄압을 합리화 하는 핑계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비정규직들의 행동 선언이 있었기에 법안 통과는 계속 저지되었던 것이다.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그 의미를 확장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생각해 온 사람으로서 필자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IMF 구조조정의 광풍이 휩쓸고 간 이후 유연화 논리는 노동시장에 구조적으로 장착되어 가동되면서 비정규직에 대한 착취를 전면화 한 악성 차별적인 고용구조가 온전히 정착되었다. 2003년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사회적 이슈의 판도를 뒤바꾼 것은 그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노동자로서 정체성과 진정성을 말하는 데 비정규직이 가장 첫 손가락에 꼽히는 화두가 된 것은 또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는 자연스러운 의식의 전화과정이다. 전 노동자의 단결과 정규직, 비정규직의 연대, 좀더 넓혀서 사회적 과제로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천착과 해결 의지가 의제화 된 것은 문제 핵심에 다가가고 있다는 점에서 진보적 실천의 성과라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노동유연화의 파고가 높지만 그에 맞서는 사회운동의 고민의 심도도 아울러 높아지고 있다. 비정규법안에 맞선 사회운동의 실천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최전선이 한국 현실에서 벌어졌음을 자부심 있게 표현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최초고용법에 저항하는 프랑스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에 함께 하면서 한국 비정규법안에 대한 저항전선은 프랑스 이상으로 뜨거웠다는 사실을 더욱 가슴깊이 느꼈다.

매년 겨울 국회에서 법안 통과가 막바지에 이를 때마다 유연화를 촉진하는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서 모인 노동자들의 열기는 영국 광산노동자들의 ‘불만의 겨울(the Winter of Discontent)’을 넘고 이태리 평조합원 노동자들의 ‘뜨거운 가을(Hot Autumn)’을 넘어 프랑스의 노학연대 정치파업과 비견되는 신자유주의 저항의 최전선을 장기간 이끌어온 역사적 발자취였음을 자랑스럽게 기억하자.

물론 정부여당과의 ‘보호법안이냐, 확산법안이냐’는 논란부터 시작해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내 법안 통과의 의미에 대한 견해 차이에 이르기까지 비정규 해법을 보는 시각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기도 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논쟁은 없었고 각자 갈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적 격차로 치부되고 있는 상황이다. 견해차가 쉬 좁혀질 사안은 아니지만 여전히 혼자만의 확신에서 전혀 태도를 바꾸지 않는 노동부와 논쟁을 회피하는 여당의 태도는 국정을 책임지는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어설픈 효과 분석으로 법안이 초래할 결과에 대한 예상도 제대로 못하고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적어도 분명해졌다.

노동시민사회운동 내 균열의 지점이 포착된 것도 아쉽다. 각자 정치적인 입장 선택의 문제로 보면 언뜻 이해는 가지만 그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선 정부여당의 태도와 동일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사유제한을 마지막 카드로 제시하는 노동계 일부와 민주노동당을 극단적인 좌파쯤으로 치부하는 것은 결코 동의하긴 어려워도 그분들의 처지란 걸 충분히 이해는 할 만하다. 그들은 상대를 극단으로 몰아야만 자신들이 합리적인 중도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고 자신의 정당성이 옹호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논리를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게 합리화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양 노총을 아울러서 노동계 내부에 또 합리적인 대안세력임을 자부하는 일부 시민단체와 여성단체들 중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켜야만 한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의중은 합리적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적어도 두 차례에 걸쳐 필자와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법안 통과가 불가한 이유를 객관적으로, 논리적으로 제시해 보였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에서 명확히 근거를 제시해야 할 차례이다. 수정된 비정규법안이 어떤 면에서 진일보한 것인지, 비정규직 중 고용형태별로 어느 점에서 개선인지, 과연 개선의 정도가 비정규법안으로 제도화 함으로써 포섭되고 제약되는 비정규기본권에 비추어 성취라고 볼 수 있는지, 과연 지금 이 때에 한계가 명확히 보이는 법안에 동의하고 정당성을 부여해줌으로써 얻는 이익과 감수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는지….

비정규법안에 대한 입장 선택의 문제가 단지 각 조직과 세력의 정치전략적인 이해득실로 판단할 문제는 아닐 것이며, 분명한 확신이 뒷받침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필자는 아직 그 확신의 근거에 대해서 명확히 들은 바가 없다. 생산적인 논쟁이 있기를 바란다. 이 논쟁이야말로 비정규법안의 문제를, 비정규직의 문제를 노동시민사회운동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풀어나갈 마지막 기회는 아닐까 생각한다. 입장 차이는 있고, 논란도 있는데 논쟁은 없었다.

비정규법안의 4월 국회 통과가 무산됨으로써 앞으로 이른바 정규직의 문제라는 로드맵과 비정규법안은 얽혀지게 될 공산이 크다. 실제 어떻게 진행되느냐와 무관하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 문제는 실제 논란의 중심으로 다시 대두될 가능성이 높다. 노동운동 내 독자적으로 풀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정규직 책임론 정도야 그럭저럭 넘어선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연대의 방기현상은 노동운동을 정체성 논란에 휩싸이게 할 만하다.

당장 해답을 찾아낼 수도 없고, 일방적인 책임 추궁도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서 책임있는 노동운동의 ‘두 주체’로서 서로 존중하면서 현실적으로 동원 가능한 자원의 차이를 좁혀나가기 위해 지원, 지지해나갈 방안을 드넓은 연대의 정신으로 구축해나가야 할 시점이다.

같은 노동자로서 ‘단결’을 얘기하는 것은 정규직 노동자에게서나 나올 말일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에선 차이를 극복해나가는 ‘연대’가 출발점이다. 단결이 아니라, 차이를 존중하는 연대의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 ‘실사구시’의 태도이다. 아니 차이만이라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시작일 것이다. 서로를 지원의 대상이든 배척의 대상이든 일방적으로 대상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정규직에게나 비정규직에게나 모두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가까이 있는 상대를 적으로 여기면서 ‘적과의 동침’도 서슴지 않는 자기 항변이 판치는 현재가 노동운동의, 노동시민사회운동의 미래는 결코 아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책임에 필자 자신도 결코 자유롭지 않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 단결이라니, 연대라도 제대로 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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