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과 같이 정부의 통제와 채찍이 심각한 상황에서 특정 공기업 노조위원장으로서 정부 정책에 대한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조심스런 일이다. 나 자신보다 내가 속한 조직이 염려되기 때문이다.

금년 들어 모든 공기업들은 정부 경영평가에 ‘올인’ 하고 있다. 경영평가 결과(공기업 순위표)에 따라 인센티브 상여금이 차등지급 되고 그 순위는 각 공기업의 특수성, 전문성 또는 공익수행 성과와는 무관하게 언론에 조명되어 기업 이미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계량 및 비계량 평가요소들의 전년도 대비 실적으로 판가름 나는 경영평가는 공기업들이 실제 수행한 대국민 서비스의 질이나 공익수행과는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 그런데도 공기업들은 휴일도 가리지 않고 몇달째 경영평가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고생하고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감사와 각종 평가, 조사에 시달리는 공기업 현실

과거 공기업은 방만하고 대국민 서비스의 질(質)이 문제가 되어 사회여론이 매우 부정적이었고 또한 개혁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전 공공기관은 30%의 인적 구조조정, 각종 후생복지제도 후퇴, 공기업 자체의 민영화 등 아픔과 고통 속에 세상이 혹독하다는 것을 배웠다. 한때 30여개에 육박하던 공기업 숫자도 이제는 14개로 줄어들고 5만명에 이르는 전체 공기업 종사자에 대한 정부의 간섭과 통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 이 때부터이다.

설상가상으로 최근엔 공기업에 대한 감사활동도 점입가경이다. 국정감사의 경우 과거에는 연례행사로 한달 준비하면 되는 일이었으나, 현재는 임시 및 정기국회로 연중 감사를 받느라 수많은 자료제출과 수감활동으로 업무비중이 커지고 있다. 비대해진 정부기관들도 모두 공공기관에 대한 감시에 크게 비중을 두어 과거 감사원 감사와 개별 공기업 담당 중앙부처 중심의 감사활동에 국한됐으나 이제는 총리실, 국가청렴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등의 감사와 감독도 추가되었다.

공공기관 관리를 주관하는 기획예산처도 정부경영평가제도 외에 공기업 서비스 만족도 조사, 청렴도 조사, 경영대상, 혁신대상 등 갖가지 평가와 조사를 중복하여 실시하고 있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소재를 분명히 가리고 있다. 언론도 이런 내용을 집중보도 하고 있다.

이러한 형편이다 보니 오늘날 공기업은 정부 정책실행기관으로서의 대국민 서비스 활동보다는 평가 및 조사, 감사에 대비하고 준비하는 데 경영활동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본연의 업무를 수행하는데 인적, 물적, 시간적 자원을 집중하기보다는 평가와 조사, 감사, 이미지 제고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공기업 경영권은 ‘제로상태’…간섭과 통제는 몇배 강화

공기업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 이런 각종 통제 때문에 전직원 임금피크제, 연봉제, 내부평가 강화로 조직문화가 파괴되고 있으며, 1급 간부들은 내부 인사적체 해소를 위해 4.5년씩 정년단축으로 조직에 희생을 당하고 있다. 공기업 사장 또는 경영진의 경영자율권은 전무하다. 신입직원 채용도 기획예산처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고, 전체 예산의 기획, 편성, 운용, 변경도 기획예산처 심사를 통해야만 가능하기에 모든 공기업은 경영권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다.

공기업 CEO조차 인사이동 및 승진권한 외에는 아무 재량권이 없으며 심지어 이사진 구성조차 외부 입김에 좌우된다.

특히 최근에는 퇴직연금제도를 공기업 경영평가제도와 연계하여 반영하기로 하는 등 정책을 강요를 당하고 있다. 전체 100점 만점에 퇴직연금 가입과 관련하여 가점 10점을 부여해 23년 유지돼 온 경영평가제도를 스스로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가점 10점이면 꼴등과 일등이 뒤바뀔 만한 점수인데, 이를 경영평가에 반영하겠다니 강요가 아니가 협박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응하여 우리 공기업 노동조합 대표들도 기획예산처의 정부경영평가 가점 정책을 철회할 때까지 퇴직연금 가입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하는 등 공동 대응키로 합의한 바 있다.

공기업에 대한 최소한의 경영권을 내려주고 지금과 같은 통제와 평가가 있다면 그나마 할 말이 없겠으나 ‘자율 없는 책임’, ‘평가 채찍 중심의 공기업 정책’에 큰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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