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제출한 것이 2003년이니 논란이 4년째를 맞고 있다. 다행히 진보진영은 동상이몽이지만 한나라당의 동조에 힘입어 국민연금 개악을 어떻든 막고 있다. 하지만 같은 기간에 국민연금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더욱 떨어져 왔다면, 이는 무척 우려되는 일이다. 의무가입제도인 국민연금의 권위는 낮아지고, 사적 생명보험은 대안제도로 위력을 떨친다.

2004년 국민들이 생명보험회사에 납부한 보험료가 47조원이다. 국민연금 보험료 17조원의 세배에 이르는 금액이다. 국민 1인당 생명보험료가 98만원이므로 4인가구는 매년 400만원을 생명보험회사에 내고 있다. 2000년 99조원이었던 생명보험회사의 운용자산은 2004년 169조원으로 늘어나 정부 예산보다 크다. 진보진영이 국민연금을 두고 정부와 줄다리기를 벌이기에 최소한 무승부라도 이룬 줄 알았는데, 시장에서 사보험이 이렇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으니 실제는 지고 있는 셈이다.

사보험에 눌려 고사하는 국민연금

모두 환자를 걱정한다지만, 입원이 장기화될수록 애가 타는 것은, 의사도, 건강보조회사도 아닌, 결국 환자가족이다. 마냥 국회만 쳐다보고 기다리기엔 국민연금이 너무 아프다. 이러다 사보험에 눌려 진짜 고사할까 두렵다. 이제 가입자가 발 벗고 뛰어들어야 한다.

국민연금을 둘러싼 쟁점은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보험료율과 연급급여를 다루는 제도개혁 방안. 둘째, 기금운용체계 개편 방안과 기금운용 방안, 셋째, 공무원, 사학, 군인연금 등 특수직역연금 개편 방안. 앞의 둘은 국민연금법 개정안 내용이고, 특수직역연금은 관련법을 추가로 다루어야 한다.

국민연금 제도개혁의 핵심은 저소득계층 보험료 지원과 사각지대 해소

첫번째 쟁점인 제도개혁 문제는 지금까지 논란의 중심을 차지해 왔다. 정부개정안은 재정 안정화에 초점을 두어 보험료율을 9%에서 15.9%로 올리고 급여율은 60%에서 50%로 내린다. 반면에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은 사각지대 해소에 초점을 두고 (그 내용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를 지닌) 기초연금제 도입을 주장한다.

정부 개정안은 급여 인하와 보험료 인상에 대한 가입자의 반발을, 기초연금안은 재정조달(2006년 기준 민주노동당 9.4조, 한나라당 2.3~4.8조)을 각각 과제로 안고 있다. 요약하면, 현행 국민연금제도 내부 가입자만을 대상으로 한 정부여당의 부분적 개혁안과 비가입자까지 포함하자는 야당의 구조적 개혁안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걱정하는 기금고갈 문제는 사실 ‘국민연금 적립방식을 부과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미래의 위협’이 아니라 ‘세대간 연대’로 접근하면 전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기초연금은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기초연금 크기만큼 국민연금 급여율을 낮출 수 있어 재정고갈 논란도 완화시킬 수 있는 대안이다. 당장 기초연금의 재원조달이 어렵다면 단계별 적용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특히 필자는 저소득계층 보험료 지원에 무게를 두고 싶다. 국민들은 국민연금 수급권보다 보험료 부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국민연금의 수혜자가 되어야 할 서민들이 오히려 국민연금을 반대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저소득계층 보험료에 대한 국가지원과 기초연금제도 도입, 양 과제에 대한 정교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서민들과 직접 만나야 한다.

국민연금기금 운용권을 향한 정부와 시장의 각축전

두번째 쟁점은 기금운용권을 누가 가질 것인가, 그리고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 문제다. 이 주제는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해 왔으나 중요성이 결코 다른 것에 뒤지지 않는다. 국민연금기금이 올해 말 192조에 이른다. 지금도 GDP의 20% 수준인데, 2025년에 50%에 육박하는 거대자산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돈을 누가 지배하느냐가 심각한 쟁점이 된다.

현재 기금운용의 권한을 가진 기구는 21인 위원으로 구성된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이다. 이 위원회에 가입자대표가 12인으로 과반수를 점하고 있다. 가입자대표의 불철저성, 정부 종속성, 비전문성 등으로 정부가 기금운용계획 입안과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나, 형식적으론 가입자의 대표성이 확보되어 있다.

이러한 기금운용체계가 정부에게 탐탁할 리 없다. 가입자들이 기금운용권의 중요성을 눈치채지 못한 지금 속전속결로 기금운용체계를 뒤바꾸어놓자는 심산이다.

정부 개편안은 기금운용위원회의 심의권을 사실상 박탈하고 위원 구성에서도 가입자 대표를 과반수 미만(정부 4/9, 열린우리당 7/15)으로 축소한다. 대신 정부부처 장관들이 주도하는 국민연금정책협의회를 신설하여 국민연금기금 운용을 주도하려 한다.

한나라당 안은 더욱 가관이다. 한나라당은 정부로부터 기금운용권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아예 가입자를 소수로 몰고(3/9), 위원회를 민간회사 성격을 지니는 투자전문회사 내에 설치할 것을 주장한다. 시장에 기금운용권을 넘겨주자는 의도이다.

기금의 주인인 ‘가입자’는 주변으로 내몰리고, 정부와 시장이 기금운용권을 두고 각축을 벌이는 상황이다. 최근 들어 진보진영도 은행공공성, 기간산업 사회화, 공공임대주택 건설 등을 다루면서 공공재원으로 국민연금기금을 언급한다. 이러한 청사진이 조금이라도 현실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진보진영이 기금운용체계 개편 논란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가입자단체들끼리 연대하여 공동활동을 기획하고, 국민연금기금의 공공적 운용 방안도 구체적으로 내놓아야 한다.

특수직역연금, 연금개편 논란의 새로운 태풍

세번째 쟁점은 다시 불거진 특수직역연금 문제다. 특수직역연금의 급여조건이 국민연금에 비해 후하므로 급여수준을 하향조정 해야 한다는 요구와 퇴직자의 연금 승계를 위해 특수직역연금과 국민연금을 연계하는 방안 등 두가지가 쟁점이다.

사실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을 단순비교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입자가 낸 보험료 총액과 노후에 받는 연금액 총액을 비교한 수익비를 보면, 퇴직금을 고려해도 공무원연금이 다소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공무원연금은 과거 공무원의 낮은 임금을 보상해주는 성격을 지녀 왔고, 유족연금 및 장애연금 조항이 국민연금에 비해 불리하며, 파면 혹은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연금액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등 ‘특수한’ 리스크를 지니고 있다. 게다가 국민연금에서 저소득계층 수익비가 평균수익률에 비해 높은 것을 감안하면, 내부 재분배 기능이 없는 공무원연금에서 중하위 공무원이 지닌 상대적 우위는 더욱 줄게 된다. 양 연금 간의 비교평가 및 조정은 단순함수론 풀리기 어려운 과제다.

양 연금 간 연계 방안도 오래된 숙제이다. 공무원연금 20년 미만 가입자, 국민연금 10년 미만 가입자는 직역을 옮길 경우 반환일시금을 받으면서 가입경력이 사라지기 때문에 노후에 연금수급권을 가지지 못하는 불이익을 입게 된다. 이에 정부도 애초 국민연금 개정안을 준비하면서 연계 방안을 확정할 방침이었으나 지금은 국민연금 개혁 이후로 미루어 놓았다.

국민연금 개혁조차 벅차고, 연계 방안이 마려되어 수급자가 늘어나면 연금재정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계산이 작용했을 것이다. 연계 방안은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있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진보진영은 정부의 소극적 후퇴를 탓하며 연계 방안 도입을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

국민연금 살리기, 세상을 바꾸는 투쟁으로 노동자들이 나서야

국민연금 개혁을 둘러싼 논란이 상당히 복잡하다. 하지만 그 지형의 성격은 정책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다. 진보진영이 마냥 정책적 영역에만 머무를 수 없는 이유이다. 보수정당들이 ‘정략적 접근’, 진보진영이 ‘정책적 해석’에 머무는 사이 국민연금이 조금씩 말라가고 있다.

획기적인 개입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관건은 어떻게 국민연금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느냐에 있다. 노동계의 역할이 중요하다. 보험료 형평성의 피해자로 알려져 있는 직장가입자들이 연금 살리기에 나서지 않는 한 신뢰는 생겨날 수 없을 것 같다. '안티국민연금' 네티즌과 직접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주체도 당사자인 노동자가 적격이다.

노동자가 국민연금과 사보험의 차이를 선전하고, 저소득계층의 보험료 지원을 국가에 요구하고, 국민연금의 안착을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소득파악운동 깃발을 올려야 한다. 나아가 공무원노동자와 일반노동자 모두 자신의 연금틀을 넘어서 함께 공적연금을 논의하고, 2백조에 육박한 국민연금기금의 운용전략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세상을 크게 인식하고, 비로소 세상을 바꾸는 투쟁을 준비하는 것 아닌가?

최근 국민연금관리공단노조가 민주노총으로 옮기면서 사회연대연금노조로 이름을 바꾸었다. 참신한 시도이다. 이 이름바꾸기가 단위노조의 일회적인 개명으로 그치지 않도록, 노동운동 전체의 연금살리기 활동이 본격화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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