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민주노총 4기 임원 보궐선거에 사무총장 후보로 출마해서 장기투쟁 사업장을 방문했을 때 느낀 점 두 가지 이야기로부터 글을 시작할까 한다.

민주노총 임원선거 후보로서 장기투쟁 사업장을 방문했을 때의 그 싸늘함이란 필자로서는 견디기 쉽지 않았다. 마치 보수정당의 정치인들이 선거철에 달동네 서민들을 찾을 때의 눈초리 같은 것이었다. 짤막한 유세가 끝나고 자리를 떠날 때 어김없이 들려오는 한 마디. “당선 되고 나면 잊지 말고 꼭 다시 오세요.”

이 분위기 속에서 필자는 투쟁하는 노동자에게 민주노총은 어떻게 보이는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어떻게 이야기하든, 어떤 내용을 주장하든 이미 민주노총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는 권력으로 느껴지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에 거는 기대란 잊지 말고 찾아달라는 것 아니겠는가!

다른 또 하나의 느낌은 믿고 의지할 데가 별로 없어도 싸우는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가히 '민란' 수준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15만볼트 송전탑 위에 올라간 노동자, 굴뚝에 올라간 노동자, 계속되는 덤프, 화물연대의 투쟁, 한밤중에 용역깡패의 침탈에 맞서 투석전 끝에 공장을 되찾은 노동자, 너무 많이 맞아서 이제 맞는 것은 겁도 안 난다는 여성노동자….

필자와 같이 주로 대기업에서 교섭이라는 틀 속에서 힘겨루기 중심으로 투쟁을 해 온 노동자로서는 이들이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를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전망을 갖고 싸우는가! 정상적으로 위원장이 선출된 노동조합을 상대로 ‘위원장이 해고자여서 교섭을 못하겠다’며 막무가내로 버티는 사용자에 맞서 지루한 천막농성으로 시작, 15만볼트 송전탑 농성, 위원장 자해 등 온갖 투쟁을 다해야 고작 대기업 인사팀장 한 명 구속되는 이 시대에 도대체 이들은 왜 투쟁하는가!

기륭전자 노동자들에게 물을 기회가 생겨 염치 불구하고 물었다. ‘어떤 기대를 갖고 투쟁하는냐’고. 전혀 예기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냥 노조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시작했어요. 정말 이렇게까지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사람으로서 이러한 현실을 알게 된 이상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뜨끔했다. 필자의 질문에는 ‘어떤 이익을 목적으로 싸우는가’라는 단기·실리적 지향성이 강력하게 내포되어 있는 반면, 이들의 답에는 ‘단기적 투쟁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 이전에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할 수 없다는 근원적 성찰이 들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말 그대로 우문현답이었다.

인간의 존엄을 지갑의 두께로 전락시킨 자들

최근 노동운동 내 투쟁의 양상은 매우 격렬하다. 고공농성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해를 넘겨 투쟁하지 않으면 장기투쟁 사업장에 속하지도 못한다는 자조적인 이야기도 들린다. 이들의 요구는 매우 소박한 것이지만 그러한 소박한 요구조차 수용할 수 없는 이 산자유주의체제 속에서 탄압은 야만적이다. 용역깡패의 전성시대라 할 만한 지경이다.

굳이 단기적 이익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이 싸워서 얻는 것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싸움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파괴에 대한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저항이 올라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변혁성의 출발이 아닐까!

대중들은 언제나 모순적 내면의 갈등 속에 있다. 주판알 튕기면서 혁명을 바라는 게 대중이다. 그런데 지난 시기 거대담론의 시대는 끝났다며 대중에게 주판알을 튕기는 것이 아니면 운동이 아닌 것처럼 만든 게 나 자신을 포함한 이른바 대기업 출신의 노조 활동가들이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 속에서 실리주의의 한계가 전면적으로 드러나자 전망 혹은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선진대안사회, 사회적 합의주의, 정치세력화 따위의 보다 확장된 주판알 튕기기로 일관하면서 노동운동을 경제주의 속에 가두어 놓은 게 작금의 노동운동 위기의 본질이다.

그러나 주판알 튕기기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힌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저항은 계속 터져 나오고 있다. 운동을 통해 얻게 될 이익에 대한 계산에 앞서 현실이 강요하는 반인간적인 차별과 소외에 대한 저항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노동운동을 오래했다는 필자를 비롯한 대기업 중심의 노동운동에 익숙한 활동가들일수록 ‘불만이 있어도 운동을 통해 얻게 될 실익이 불투명하면 투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고에 찌들어 있다. 이러한 사고의 결과가 단기 실리주의로, 어정쩡한 타협으로 나타나면서 노동운동은 말 그대로 대안이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비인간적인 현실을 강요한 것은 자본과 신자유의주의임에 틀림없지만 ‘대안이 없다’며 대중에게 현실의 부조리를 감수하도록, 혹은 현실의 불만을 지갑의 문제로 협소하게 만든 것은 변혁성이 거세된 노동운동이었다.

민주노총은 해결사가 아니다

노동운동은 늘 혁명과 전복을 꿈꿔야 한다. 이 노동운동 위기의 시대, 우리 민주노조운동이 잃어버린 것의 핵심은 바로 변혁성이다. 지난 시기 위기의 대안이 변혁성을 회복하는 방향이 아닌 전문적 정책 생산으로 변질되면서 대안은 대중의 몫이 아닌 노동관료들의 몫이 되었다.

운동의 전망이 대중의 변혁 의지로부터 찾아지는 게 아니라 노동관료들의 현실적 정책 개입능력에서 찾아지면서 전망은 현장으로부터 멀어져갔다. 이러한 경향의 결정판이 21세기 용역깡패에 시달리는 한국 노동자들을 앞에 놓고 벌이는 ‘선진 대안 타령’ 아니겠는가!

실천에 앞선 이론은 있을 수 없다. 현장에서는 이미 새로운 노동자 대중운동의 패러다임이 만들어지고 있다. 실익이 분명하지 않아도, 대안적 전망이 다소 불투명할지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현실에 맞선 아래로부터의 투쟁은 올라오고 있다. 극심한 구조조정에 시달리는 구미지역의 경우 지역공동투쟁본부를 꾸려 업종과 연맹을 뛰어넘어 공동투쟁을 전개하는 조직적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이제 민주노총이 전면적으로 호응해야 한다. 투쟁하는 당사자, 교섭하는 연맹, 최종 해결사 민주노총의 구도를 넘어 민주노총이 당면한 장기투쟁 사업장 투쟁에 최우선적으로 결합하고 더 나아가 이 투쟁들의 직접 당사자로 나서야 한다.

‘장기투쟁 사업장 문제 해결 없이 노정 대화 없다’는 식의 해결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이들의 투쟁동력이야말로 한국노동운동의 미래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집중 지원·연대해야 한다.

노동운동 위기의 대안은 변혁성의 회복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미 이러한 흐름은 아래로부터 출현하고 있다. 이제 노동운동은 자신의 혁명적 전복에 대한 꿈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2006, 2007, 2008년 연이은 정치적 격변기에 노동운동이 자신의 꿈을 앙상한 선거공간에서의 표 찍기를 통해 혹은 노사간 교섭 석상 중심의 힘겨루기를 통해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 직접적인 정치적 대중행동을 모색해야 한다. 표찍기, 사회적 교섭 등을 이미 넘어서서 아래로부터 출현하고 있는 이러한 저항에 민주노총이 화답할 때,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올인하는 투쟁지도부로 민주노총이 혁신될 때 노동운동 위기의 대안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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