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선배님께

“저 사람이 문 위원장이다.” 1989년 마창노련 집회에서 선배님을 처음 봤습니다. 솔직히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습니다. 호리한 몸집에 그저 착하게만 보였습니다. 사실 선배님은 우리 통일노조 조합원들의 영웅이었습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에 민주노조의 신화를 만들어 냈던 문성현은 후배 조합원들 마음 속에서 우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선배님이 이끌었던 1985년 임금협상 투쟁은 통일노조의 자랑이었습니다. 그 시절 함께 투쟁했던 조합원들이 “그때가 봄날”이었다며, 당시의 무용담을 얘기를 하는 걸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분위기가 을매나 좋았던지 ‘단결’이라고 적힌 빨간 머리띠를 다려서 맸다니까.”

“장대비가 쫙쫙 쏟아지는데 한명도 움직이지 않고 13.1%인상하라고 구호를 외쳐댔는데 정말 장관이라.”

1990년이던가요? 통일노조 소위원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통일자본의 노조탄압으로 조합간부들 20여명이 전부 구속 해고가 되고, 직무대행체제로 근근이 노동조합 명맥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해 임금협상에서 자본의 힘에 떠밀려 5%의 임금인상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야 했습니다.

풀이 죽어 자취방으로 가는 시내버스 안에서 당시 해고자 신분이었던 선배님을 우연히 만나게 됐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창밖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저를 보시더니 눈물을 닦아주며, “힘내라! 명성아~” 하시던 그 한마디, 그것은 저의 조합활동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온갖 회유와 탄압이 있기에 그 누구도 하기 싫어하며, 가정보다는 조합원의 권리를 생각해야 하는 희생과 봉사의 자리, 때론 지치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저 또한 지금껏 노동조합의 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선배님!

오늘 아침 저는 선배님의 눈물을 닦아 드리지 못했습니다. 자본의 여론에 떠밀려 사직을 하는 기자회견장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시는 선배님을 바라만 보고만 있었습니다. 형 만한 아우는 없나 봅니다.

오늘 기자회견 내내 답답했습니다. 1991년 대법원 승소 판결이 난 이후에도 원직복직을 시켜주지 않고 15년 동안 묵묵부답이던 회사가 하필이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민주노동당 경남도지사 후보로 활동을 하려는 지금 이 순간 원직복직을 통보하다니요. 게다가 출근일자를 민주노동당 5·31 지방선거대책위원회가 공식 출범하는 날로 지정해 버리다니요.

서울대를 나와 출세의 길로 향하지 않고 통일에 입사하여 도루방 기계를 돌리며 억압받는 노동자의 길을 자처하신 선배님. 어용노조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조합원들을 일깨워 민주노조를 건설하자 노조를 깨기 위해 온갖 탄압으로 일관 하였던 통일자본. 과거 통일에서 그러했듯이 선배님께서 선거 출마와 관련하여 온갖 비난의 화살을 맞은 것도 자본이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를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금속노조 통일지회는 선배님이 하루라도 출근을 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었습니다. 39명의 해고자가 있기 때문에 이후에 회사와 벌이게 될 해고자 복직 싸움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배님 역시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만 민주노동당 당대표로서 불가피하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배님은 통일노조의 신화 문성현이기도 하지만 노동자 정치세력화, 이번 5·31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이끌어내야 할 민주노동당의 대표이기에 저희들은 보내드렸습니다.

오늘 선배님의 눈물은 단지 통일을 떠나는 아쉬움의 눈물이 아닐 것입니다. 지난 30년을 억압받는 노동자와 민중을 위해 나름대로 헌신하였지만 변화되지 않고 오히려 가진 자가 지갑을 더 불려가는 이 기막힌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차별과 냉대를 받으며 살아가는 계약직 노동자와 가난한 민중의 아픔을 생각하는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선배님! 이제 눈물을 흘리지 마십시오. 한국사회의 변화는 이제 선배님의 몫이 되었습니다. 항상 꿋꿋함을 잃지 않는 선배님의 웃음을 기대하면서 저와 통일지회 조합원 또한 그 웃음을 위해 항상 노력 하겠습니다.
파이팅!!

2006년 4월 18일
통일지회에서 김명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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