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의 행위 투표를 열흘 넘게…투표함들고 쫓고 쫓기는 회사와 노조

울산 동구 전하동 풍경

3만여 노동자와 그 가족 10만이 넘게 모여 있는 울산 동구. 빽빽히 들어선 아파트 숲, 휘황 찬란한 밤 조명, 현대자본이 세운 현대백화점, 한마음 예술관, 미포복지회관들이 들어서서 노동자가족들의 정신까지 지배하는 곳, 2년전 불어닥쳤던 IMF 찬바람 속에서도 끄떡없었던 동네.

동구에 요새 희한한 모습들이 어둑한 밤거리에 연출된다. 투표함과 기표소를 들고 아파트촌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과 그들을 찾고 쫓아 다니는 검은 회사점퍼 차림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다닌다.

한 아파트 단지 앞이다. 투표함을 든 사람은 열 명 안팎, 그들을 쫓는 사람들은 200명 안팎. 오후 5시 30분부터 7시 30분경 투표를 마칠 때까지 이 희한한 광경은 동구 지역 곳곳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현중노조가 회사안으로 되어 있던 투표장소를 울산전지역으로 변경 공고했고 노사간 불꽃 튀는 대립은 회사 안에서 회사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쟁의 노무관리의 결과물 98.6% 서명

지난 5년 동안 현중노조는 쟁의를 하지 못했다. 쟁의는커녕 쟁의발생결의를 위한 대의원 대회조차 성원미달로 열리지 못했고 단체행동권을 확보하기 위한 쟁의행위찬반투표도 회사쪽의 집요한 방해로 무산됐다.

작년말 들어선 12대 집행부(김종철 위원장)는 1차투표에서 51%가 넘는 지지로 당선됐다. 무쟁의 속에서 현장통제력을 무한대로 키워온 회사쪽에 비추어 볼 때, '전진하는 노동자회'라는 강성조직을 기반으로 당선된 김종철 집행부의 험난한 앞길은 이미 예고된 상태였다.

노동조합의 의결기구(대의원대회)를 회사쪽에 장악당한 노조는 4.13 총선전에 시작하려던 단체협상(단체협약과 임금인상)을 단체협상 만료일인 5월 31일을 훨씬 넘긴 뒤인 7월 3일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시기를 늦추는데 성공한 회사쪽은 빈 껍데기뿐인 제시안을 내놓고 추석전 타결여론을 내세우며 분위기를 몰아갔고 노조가 이에 반발하자, 일방으로 회사소식지 '인사저널'에 임금과 단협 제시안을 내놓는 짓을 저질렀다.

그리고는 '회사안에 동의하며 가불을 건의합니다' 하는 내용으로 서명용지를 만들어 강제로 서명을 받았다. 퇴근 뒤 집으로 찾아가는 것은 물론, 상가에까지 쫓아가 서명을 받아냈다. 이틀동안 받은 서명은 무려 98.6%(조충휘 사장 발언)나 되었다.

목을 걸고 투표를 막아라

회사쪽의 단체협상 파행공작으로 결렬을 선언한 노조는 추석 뒤 곧바로 '노조사수'라는 기치를 내걸고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50여 노조간부가 노조앞에 천막을 세우려 하자 500명이나 되는 관리자와 경비들을 동원하여 에워쌌다. 신너를 끼얹으며 완강히 버틴 끝에 결국 천막을 세울 수 있었다. 회사 정문 옆 공터에는 해고조합원 18명이 집행부와 함께 천막농성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관리자들과 경비대들을 문구용 면도칼로 천막을 찢고(이 과정에서 조합원 두사람이 손을 베임) 폭력을 휘둘렀다. 노동조합은 11월 8일부터 열흘동안 조합원 총회를 열어 2000단체협상 관련 조합원 쟁의행위 찬반투표에 들어갔다.

회사쪽은 생각보다 완강했다. 조합원들의 불만이 엄청나다는 것을 모를리 없는 회사쪽은 어떡해서든 투표를 하지 못하도록 투표방해에 목을 걸고 덤볐다. 총회결과에 자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쪽은 투표가 벌어지는 식당과 퇴근시간 정문에 몰려들어 투표를 막았다. 노조간부들과 실천단 250여명이 나누어 움직이는 자리마다 3000에서 4000명의 관리자와 경비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고 감시하는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열흘동안 회사쪽의 극심한 방해공작에도 생각보다 많은 조합원들이 투표에 참여했다. 그러나 관리자들의 눈이 무서워 투표하지 못한 조합원들을 위해 노조는 27일까지 투표기간을 연장했고 투표장소도 회사안에서 울산 전 지역으로 넓혀서 진행하고 있다.

'폭풍전야'-조금만 더 짓눌러라

조합원들의 반응은 담담하다. 노조지침에 따르지 못하고 현장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늘 미안해 한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노조가 지켜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옳은 줄 알지만 몸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벌써 두 달을 훌쩍 넘긴 천막농성. 그리고 보름을 넘긴 쟁의행위 찬반투표. 여전히 교섭을 위한 실무협의 자리에서 회사쪽은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일방지시에 내몰려 노조의 투표행사를 방해하러 날마다 동원되는 관리자들 대부분도 회사쪽에 큰 불만을 키워가고 있다. '

밀어붙이기'의 대명사 현대. 그리고 극악한 노무관리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현대중공업 경영자들. 그 속에서 노동조합을 지키겠다고 발버둥치는 노조간부와 활동가들. 그들을 말없이 지켜보는 2만 조합원들. 그래서일까.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안개에 드리워진 현대중공업은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기 전 그 고요함처럼 오늘도 눈빛 번득인 채 숨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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