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씨가 3·1절 골프 사건으로 옷을 벗었다. 처음 이해찬씨를 본 기억은 84년인가의 어느날,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하기 위한 모임을 하기 위해 성당을 찾았을 때였던 것 같다. 아마도 안기부쯤으로 짐작되는 사람들이 성당 주변을 어슬렁 거리자 이해찬씨는 대뜸 그들의 멱살을 잡고 싸우기 시작했다. 감옥살이를 막 마치고 나온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시대는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시퍼런 때였다. 그래서 그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유시민씨나 김근태씨 등도 ‘민주화의 길’이라는 민청연 기관지 창간호를 만들 때 보았다. 장영달씨는 4·19 행사를 치르기 위해 찾았던 수유리 묘역에서 경찰의 폭력에 등 뒤의 실핏줄이 터지는 상처를 입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넘볼수 없는 투쟁 의지를 기억하고 있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 권력의 중심에 있다.

한나라당 사람들도 있다. 이재오씨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형을 살았던 존경했던 대학 선배로서의 기억이, 김문수씨는 민중당의 노동자정치세력화 추진위원장으로서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민중당 모범당원 표창을 했던 이우재씨가 마사회 회장으로 왔지만 내가 일하는 공공연맹의 경마진흥회 노조의 불법파견 문제,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할 의지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한때 한 길을 가면서 존경했던 그들은 지금 나와는 너무 먼 세계에 살고 있다.

80년 초반 학생운동을 시작할 때 많은 선배들이 당시 이기택씨 같은 사람들을 욕했다. “4·19 혁명을 팔아 정치를 하는 놈” 정도의 욕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내게는 지금 잘 나가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소위 운동권 출신들이 그 길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 물의,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철도 공공성 강화를 주장하는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에 철퇴를 가하면서 내기골프쯤이야 하고 즐겼을 이해찬씨나, 양주쯤이야 하고 광주 망월동 묘지 참배 후 주점에서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셨을 정치권 386들이나, 헬기쯤이야 하고 집사람들까지 동반하고 아무런 느낌도 없이 지역순시에 나섰다 믈의를 빚어 청와대를 쫓겨난 사람들이나 매양 한통속이다. 나는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그들의 행보를 애처럽게 바라볼 뿐, 아무런 감정도 없다. 단지 좀더 처신에 주의를 했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한번의 실수야 누구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들이 비록 ‘과거의 투쟁으로 현재의 권력’을 누릴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과거, 그것도 자신만의 것이 아닌 ‘민주화 투쟁’까지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데 이르러서는 분노를 느낀다.

“그 당시 민주화운동은 명백한 사회정의에 어긋나는 헌법과 법규 아래 말할 자유도 없었다. 지금은 정당한 운동과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지고 있고, 적어도 정상적인 운동이 가능하다. 노동운동 자체를 탄압하는 사람은 없다.” 철도공사 사장으로 '돌아온 사형수' 이철씨의 말이다. 한집에 살던 사촌형이 이철씨와 같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었고, 고등학교 때인가 ‘돌아온 사형수’라는 선거포스터를 동네에서 보며 가졌던 그에 대한 보이지 않는 호감이 한번에 무너진다. “의도가 좋더라도 불법행동을 정당화 할 수 없다”고 직권중재를 옹호할 때 그는 노동자들에 대해 ‘계급적 적대감’을 가진 보수언론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요새는 조금 잠잠한 편이지만 노무현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다. 비정규직에 비유한 대공장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대통령이지만 이쑤시개까지 팔아먹는 재벌그룹들의 탐욕과 중소기업 갈취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말하지 않는다.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자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 나락의 끝에 서 있는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기나긴 민주화 투쟁의 결과로서 권력의 핵심을 틀어잡고 있는 저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계급적 적대감’을 감추지 않는다. 왜 그럴까?

아직 오지 않은 노동자 민주주의

나는 이러한 사태의 배경에 분명 무엇인가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이에 대해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이렇게 분석했다.

“배달호는 유시민의 역사의식의 경계 밖에 있다. 유시민에게서 1987년 6월의 요구는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완성해야 할 과제로 받아들이지만 1987년의 7~9월의 요구는 남의 일, 예컨대 권영길이나 민주노동당이 풀어야 할 일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시민의 국민화(국민통합)는 한계를 드러내며 설득력을 잃는다. 그의 민주주의는 상대화된다. 그의 말대로 2004년 총선에서 6월항쟁 주체가 의회권력을 장악하여 항쟁을 혁명으로 끌어올린다면 그것은 권위적 보수주의자들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로부터의 커다란 진보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6월항쟁의 이 혁명적 국민통합이 이러한 상대성 속에서, 7~9월에 대한 배제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또다른 혁명을 필요로 하게 될 불구적 혁명으로 남게 될 것이다. 배달호의 죽음이 시사하는 것은 바로 이점이다.”
(조정환, 노무현의 승리와 배달호의 죽음 속에서 생각하는 유시민의 참여민주주의)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철이나 유시민씨류의 사람들에게는 완성태에 가까운 세계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제 출발에 불과한 일반민주주의의 확장에 불과한 시대다. 더 전진해야 한다고, 그 민주주의를 노동자 민중의 것으로까지 승화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적대적인 시선을 감수해야 한다.

같이 운동을 해 온 또래들 중에 현 정부에 깊숙하게 진출해 있는 사람도 있다. 한번은 웃으며 말한 적이 있다.

“대통령에게 말 좀 하지. 좀 잘 좀 하시라고….”
“왜? 잘 하고 있잖아?”

이게 대답이었다. 그 중에는 공기업의 임원으로 간 사람도 있다. 그들로 하여금 세상이 조금씩 전진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거꾸로 실망으로, 대중적으로 ‘타락’의 모습만 반복적으로 비추어진다면 그것은 한국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시대 진보의 진정한 척도는 ‘노동’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90년대 초반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의사로서 노동자에게 아주 호의적이어서 구사대와 싸우다 다치면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고, 고소를 위해 진단을 끊을라치면 상처보다 더 높게 해주던 사람이 부천에 있었다. 그런데 그 병원에 노조가 생기자 태도가 달라졌다. “이렇게까지 노동자와 너희들을 위해 마음을 열어 대화를 하는데 노동조합을 만들다니….” 그 노조는 한동안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친구들 중에 나름대로 진보적이라는 교수는 대학노조에 적대감을 감추지 않는다.

한때의 동지들이 그 자리에서 머물고, 혹은 머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려 한다고 욕을 할지라도 우리의 걸음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노동운동의 선배” 운운하며 비정규 악법을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법이라며 강변하는 이목희씨 같은 이가 목청을 높이는 코미디는 한 시기가 지나면 저질 희극으로 판명될 것이다. 별로 맞는 말이나 행동을 해 본 적이 없지만 노동자를 입에 달고 사는 배일도씨 같은 무리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팔아 현재의 영광(?)’을 누리는 자들이 있지만 아직도 ‘미래의 가치’를 위해 싸우는 더 많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문제는 노동운동이 이해찬씨류의 행동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이다.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노동운동은 권력을 위해 투쟁한다. 권력을 잡겠다는 ‘야심’도 없이 노동운동을 하는 순진함은 이제 버려야 한다. 동시에 개인의 이익을 위해 정치를 하고, 노동운동을 하는 ‘흑심’도 마찬가지로 버려야 한다. 한국사회를 개조하기 위해, 더이상 노동자들의 분신이나 비정규직의 설움을 없애기 위해 87년 7~9월 노동자 투쟁의 세력들이 ‘권력’을 잡는 데까지 나가야 한다. 역사의 진전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이 권력의 핵심을 틀어잡는 데까지 진전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가 못 나아가는가는 전적으로 현시기 노동운동가들의 몫이다. 정권을 잡은 자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권력을 잡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가 더 문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동운동이 제대로 서야 한다. 노동운동이 비틀거리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조차 망가지는 모습을 민주노총이 보여주기도 한다. 타락의 극치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이야말로 한국사회의 진보를 가져 올 물리적 ‘힘’이다. 부족한 부분은 채워나가되 끊임없는 돌아봄과 각성이 필요하다.

“부르조아 계급의 지배를 전복시키기 위해 노동계급은 그들의 상대방보다 조직적·지적·도덕적 우위를 점해야 한다”라는 100여년전 옛 스웨덴 사민당 당수의 말은 오늘도 유효하다. 혜화동에 있었던 민주노총 추진위 시절, 전교조에서 파견나왔던 친구에게 물었었다.

“우리는 왜 노동운동을 하는 걸까?”

그 친구의 답은 간단했다. “노동운동이야말로 한국사회를 개조할 인적, 물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이 말은 맞다. 그러나 이제 “노동운동은 도덕적 능력과 자정을 할 수 있는 조직적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한 가지가 더 추가되어야 한다. 노동운동을 제대로 하기 위한, 대중의 마음을 잡기 위한 혁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모든 혁신은 반성에서 시작된다.

이해찬씨의 총리직 사임을 보면서 권력을 가졌을 때 무엇을 조심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어쩌면 이미 권력이 되어 있는 민주노총, 노동운동이 높은 도덕적 우위를 가지지 않는다면 설사 권력을 가진다 해도 문제가 될 것이다. 이해찬씨의 총리직 사임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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