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진영의 화두는 역시 '위기'였다. ‘위기’라는 진단은 계속되고 있지만 노동계의 ‘위기 논쟁’은 이미 한물 간 이야기로 취급될 만큼 오래됐다. 그러나 그 논쟁이 다시 시민운동, 민중운동에서 시작됐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노동계뿐만 아니라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 등 대표적인 60여개의 노동·민중·시민사회단체들이 23일 오후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에서 모여 ‘제5회 한국사회포럼’을 개최했다. 시장 양극화와 한미FTA를 중심으로 한 시장개방 등 진보진영의 화두를 모아놓고 본격적인 토론을 시작한 것이다. 이번 행사는 오는 25일까지 계속된다.

첫날 개막과 함께 진행된 특별토론회에서는 먼저 ‘한국의 사회운동은 위기인가’를 두고 각 진영이 다양한 주장을 내놓으며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한국사회포럼 제1주제는 ‘사회운동의 위기’

먼저 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한국 사회운동의 현 상황을 위기라고 진단한 뒤, 특히 “한국사회는 양극화 등 극단화의 구조화와 분단과 동맹의 변화 따른 사회 재편, 주체와 퇴조와 새로운 대안의 지체 등 전환기의 위기를 맞고 있다”며 “이같은 전환기에는 낡은 비전과 대안, 인식과 실천들이 ‘위기’를 수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사회운동 주체의 위기를 불러오는 요인에 대해 △좌표의 부재와 상상력의 답보 △의제형성과 정책대안의 빈곤 △활동가 재생산의 위기 △소통의 부재와 연대의 관성화 및 형해화 등을 꼽았다.

홍석만 참세상 사무처장은 “시민운동의 위기는 ‘정치적 중립성’이나 ‘시민 없는 시민운동’으로 대표되는 운동의 방법론 혹은 컨텐츠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라며 “위기는 시민운동의 노선이 현실과 괴리된 채 운영되고 있는 그 시스템 자체에서 오고 있다”고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홍 사무처장은 “시민운동이 추구해 왔던 자유주의적 의제, 개혁적 의제들은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고 수구보수세력들도 지속적으로 밀리고 있지만 노동자 민중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며 “시민운동은 점차 신자유주의의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사회갈등을 봉합하고 관리하는 주체가 되고 있다”고 칼날을 세웠다. 이에 따라 그는 “오늘날 시민운동은 지배세력으로 편입될 것인가 아니면 독립적 사회운동으로 남을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이같은 위기는 신자유주의적 사회 재편과 함께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온 운동세력의 실패에 있다고 그는 말했다. 민중진영 또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따라 홍 사무처장은 그 변화에 맞는 새로운 운동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는 “신자유주의체제가 87년도에 형성됐던 사회모순을 변화시키면서 새롭게 계급구조를 재편하고 있고 그 안에서 변혁의 새로운 맹아가 싹트고 있다”며 대표적인 예로 비정규노동자의 증가, 농업개방에 따른 농민의 감소 등을 꼽았다.

이어 그는 “민중 및 시민운동은 이같은 사회변화 및 계급구조 변화에 따라 정치적, 내적 분화를 거듭한 이후 새롭게 세력을 재편하게 될 것”이라며 “이를 위해 알맹이 없는 컨텐츠 개발에 노력하기보다는 전체적인 구조, 즉 큰 틀에서 앞으로 우리사회가 나아갈 바에 대한 연구 및 대안 개발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시민운동, 지배세력 편입이냐, 독립적 사회운동이냐 기로에

정대연 전국민중연대 정책위원장 또한, “시민운동의 위기는 의제의 고갈이 아닌 자유주의 개혁운동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며 “시민사회가 우리 사회를 파괴해 온 신자유주의와 미국, 통일의 문제 등 주요 이슈들에 대해 외면해 온 결과”라고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특히 정 정책위원장은 “시민운동이 사회운동의 동력인 사회변혁세력의 주체들을 어떻게 성장시키고 강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방안을 준비하지 못하면 지금과 같이 새로운 의제만을 찾아다는 행태를 반복하게 될 것”이라며 “지금과 같이 변혁적 주체들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면 시민운동이 새롭게 의제를 확보한다 해도 동력의 위기 등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사회의 전환이 모둔 운동진영의 위기라고 단정하긴 힘들다”며 “민중운동은 양적으로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운동 등 새로운 주체들도 형성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물론 그는 진보진영의 전략과 전망의 부재, 즉 대안 없음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다.

이에 따라 정 위원장은 '가는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함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연대를 할 수 있도록 두 단체 간 ‘상설적 연대회의체’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사회에 한 획을 그었던 모든 대중운동은 파병반대 투쟁과 탄핵반대 운동 등과 같이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함께 나섰을 때”라고 강조했다.

김어진 다함께 활동가는 ‘위기’라는 진단이 곧 운동진영의 ‘약화’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는 “위기에 대한 의식은 많지만 운동 동력자체가 없어진 것도 아니며 탈동원화된 것도 아니다”라며 “오히려 한국사회에 국제적인 반전운동을 이뤄냈듯이 운동의 저력은 아직도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학생운동의 높았던 위상에 비해 지금은 많은 어려운 듯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여전히 학점과 취업, 아르바이트라는 3중고를 겪고 있는 만큼 여전히 주요한 잠재적 변혁세력”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그는 “노동운동의 위기논쟁에서 마치 정규직 노동자들한테 많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며 “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을 하나의 에너지로 분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낡은 운동권 이념과 문화부터 버려야

시사평론가인 진중권씨와 지금종 문화연대 사무총장은 사회의 변화속도조차 따라가고 있지 못하고 있는 사회운동세력 일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의 패러다임은 변하고 있는데 운동세력은 여전히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진중권씨는 “과거에는 세계를 인식하고 법칙을 만들어 세계를 바꿔내는 것이 하나의 패러다임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없는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시대”임을 강조했다. 사회가 정보와 사이버화 되면서 이제는 가상이 실제가 되고, 실제가 가상이 되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됐다는 설명이다. 또한 “과거는 문자와 계명의 시대였고 그래서 전통적인 지식인들의 위상이 높았지만 이제는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의식을 갖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공학적인 존재들의 역사의 주역이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그는 “진보와 보수라는 말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이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며 “특히 운동세력은 아직도 민족해방계열(NL)과 민중민주주의(PD)라는 낡은 이념적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자신들이 비판하는 세상보다 더 낙후한 것이 바로 운동세력”이라고 쐐기를 박으며 “텍스트와 이미지로 대변되는 새 소통구조와 대중의 언어도 모른 체 아직도 활자문화와 운동권 언어에 갇혀 있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이어 “‘진보야말로 수구’라는 말이 맞는 말은 아니지만 일면 수긍되는 면도 있다”고 말했다.

지금종 문화연대 사무총장도 사회변화에 따른 새로운 운동문화(방식)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지 사무총장은 “‘미선이 효순이’ 사건에서도 나타나듯이 조직되지 않은 계급과 계층이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성이 강해지고 있다”며 “특히 인터넷 블로그가 생기는 등 대중들이 소통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어 “새로운 소통구조와 자발적 움직임들은 이제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소통과 대안의 위기에 대한 운동세력 내의 반성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그는 개혁세력과 혁명세력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며,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소통하고 연대하는 새로운 운동의 전통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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