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복지공단이 근로여성임대아파트 입주민들이 제기한 성희롱 사건에 대한 사실관계 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나, 피해자들의 신원이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조사 방식을 택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는 오히려 성희롱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시도라는 의혹까지 부르는 등 파장이 예상된다.

성희롱 사실, 실명 기재 요구

공단은 지난 12일 민주노동당과 입주민들이 제기한 ‘성희롱 주장’에 대한 사실관계를 확인한다며 최근 부산지역을 시작으로 입주민 대상 설문조사에 들어갔다.<본지 3월13일자 27면 참조>


민주노동당과 입주민들은 당시 공단이 주택임대차보호법까지 어겨가며 아파트 매각을 추진해 입주민들을 주거 불안에 떨게 하고 있는 데다, 관리소 직원들이 입주민인 여성들을 상대로 성희롱을 했다고 주장하며, 다섯 가지 사례들을 공개했다.

이에 따라 공단은 당시 입주민들이 제기한 성희롱 주장의 사실관계를 조사한다며 최근 입주민들을 상대로 조사표를 만들어 배포했다. 공단은 20일 부산지역부터 배포를 시작한 ‘아파트 내 성희롱에 관한 조사표’라는 설문지에서 △관리소 직원이 성인방송을 같이 보자고 한 적이 있는지 △관리소 직원이 숙소에 무단출입을 한 적이 있는지 △관리소 직원이 결혼을 요구한 적이 있는지 △관리소 직원이 난방시설 수리를 빙자해 야간에 방문한 적이 있는지 △기타 성희롱 사항과 관리소 직원이 관리비 납부를 재촉하며 폭언과 협박을 하는 등 부당한 행위를 한 적이 있는지 등 입주민들이 제기했던 5개항을 물었다.

설문조사 내용만으로 보면 입주민들이 제기한 성희롱 사실을 확인하고 사실로 확인될 경우 해당자를 문책하기 위한 목적으로 풀이된다. 지난 12일 입주민들이 성희롱 사실을 폭로하자 공단쪽은 “먼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사실로 확인되면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입주민들은 정작 공단이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돌린 이 설문지에 제대로 응답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 공단이 이 설문지에 응답자가 사는 아파트 이름과 동, 호수, 성명까지 적도록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입주민들은 ‘성희롱’ 가해자일 수도 있는 관리소 경비원이 설문지를 수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설문 내용이 유출될 경우 보복을 당할 수도 있는데 성희롱 사실을 어떻게 적는냐는 것이다.

실제 <매일노동뉴스>가 21일 입수한 설문지를 살펴보면 공단은 “( )아파트 ( )동 ( )호 성명( )”라는 실명 기재 칸을 만들어 놓았다. 확인 결과 부산 아파트 일부 입주민들은 응답지를 작성해, 밀봉도 하지 않은 상태로 관리소에 건네주기도 했다.

공단 설문 조사대로 하면 성희롱을 당한 여성이 그 사실을 실명으로 또박또박 적은 응답지를, 자신을 성희롱한 경비원의 손에 쥐어 주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김은하 근로여성임대아파트 입주자 대표는 21일 “공정한 제3의 기관이 조사하는 것이 아니고, 비밀성과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등 실질적 개선을 위한 조사와는 거리가 먼 졸속 조사”라며 “실명으로 성희롱 사실을 적으라는데 제대로 적을 여성이 얼마나 되겠냐”고 발끈했다.

공단 “실명 기재 불가피”

하지만 공단은 성희롱 사실관계와 해당자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실명 기재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21일 공단 복지계획팀에 따르면 공단 직원 2명이 직접 현장에 나가 설문지를 배포했고, 설문지도 응답자가 직접 봉인하게 했으므로, 개인 신상이 유출될 가능성이 없다고 해명했다. 또 경비원이 수거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우체통 같은 수거함을 만들어 응답자들이 직접 넣게 하고 있다”며 “경비원들이 직접 거둔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응답 내용도 ‘공공기관의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법률’에 의해, 성희롱에 대한 사실관계를 밝히는 데만 활용될 뿐 개인비밀이 보호된다고 강조했다. 또 공단은 익명 응답지는 사실관계 확인이 어려우므로, 아파트 운영의 참고자료로 활용한다고 덧붙였다.

성희롱 은폐 의도?

공단이 이같은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것이 성희롱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시도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공단이 실명으로 성희롱 사실을 적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악용해, “민주노동당과 입주자들의 제기한 성희롱은 없다”며 반격하기 위한 자료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김은하 대표는 “당연히 이번 조사는 그런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본다”며 “공단이 제대로 조사할 의지가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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