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1일은 사유화에 반대하고 공공성 강화를 향해 철도가 파업을 선언한 날이다. 파업이 성사된다면 지난 2001년 민주철도노조 건설 이후 2002년 2·25 철도민영화 반대파업, 2003년 4·20 민영화 철회 합의, 4·20 합의 파기에 따른 2003년 6·28 파업, 공사전환을 앞둔 2004년 12·3 합의 이후, 4년간 다섯번째 파업이 되는 셈이다. 정부와 사측의 집요한 구조조정 공세와 철도노동자들의 거센 저항의 시기였다.

이번 파업은 ‘공공철도 건설, 주5일제를 위한 인력충원, 해고자복직, 연금불이익 보전,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요구로 내걸었는데 조합원들을 투쟁으로 내몬 사안은 ‘구조조정에 대한 불안감’과 ‘고용안정’이다. 그러나 이번 단협투쟁이 가지는 제1의 사회적인 의미는 비정규직과의 공동파업이다. 잘 몰라서 하는 말인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런 사례는 드물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최초가 아닌가 싶다.

생리휴가를 위한 제비뽑기

1995년 ‘국유철도 운영에 관한 특례법’ 제정부터 공사전환 이전까지 7,000여명의 인원을 자연감축하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메꾸거나 일부 업무를 외주용역하게 되면서 철도의 비정규직 문제가 시작됐다. 2006년 1월 현재, 철도엔 3,020명의 직접고용 비정규직이 있다.

그러나 철도산업 내의 외주·용역 노동자들과 같은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규모와 처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2만명 정도라는 추산이 있다. 사용자 맘대로 언제든지 해고당할 수 있는 비정규직의 처지는 다른 사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KTX 여승무원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리휴가를 쓰기 위해 제비뽑기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새마을 여승무원 정규직화투쟁 - 철도 비정규직철폐 투쟁의 시작

철도에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시작은 철도매점 노동자들이지만, 철도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철폐투쟁에 대해 생각해보고 각자의 태도를 주문한 계기는 새마을 여승무원 정규직화투쟁이 처음이다.

2004년 3월3일 당시 철도청은 서울열차승무사무소 새마을여승무원 20명에 대해, 그해 12월31일자로 계약해지(해고) 한다고 통보했다. 무려 10개월 전에 해고통보 한 셈이고, 입사한 지 채 한 달도 안 됐는데 해고통보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철도청은 해고통보일로부터 10여일 후인 3월12일, 신규 여승무원을 채용했지만, 11월이 될 때까지 해고를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고 누구하나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다.

당시 정규직지부(서울열차승무지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차례 노력을 기울였지만, 주체(여승무원)의 투쟁의지가 대단히 낮은 점, 간부들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낮은 인식과 투쟁의지의 부족, 정규직 조합원들의 반발 정서, ‘역무원으로 전환배치할 거라는 사측의 회유 때문에 10여개월을 잠복해 있다가 그해 11월16일, 사측의 해고의지가 분명히 확인되고 서울열차승무지부가 여승무원 해고반대투쟁을 결의하면서 투쟁은 시작됐다.

서울열차승무지부가 나름대로 몇차례 투쟁을 조직하려 했지만 여승무원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생계의 벼랑에 내몰릴 때가 돼서야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싸움은 해를 넘겨서 2005년 8월1일, 여승무원 22명을 역무원으로 특채하면서 끝날 때까지 10개월간, 28차에 걸친 서울역 집회, 중간에 사측의 특채 회유에 의한 주체의 분열과 2개월의 침체기를 거치고, 이어 두달여의 서울역 철야농성 투쟁 등 소수의 여승무원과 철도노조 간부와 해고자, 노동학생단체의 지난하고 헌신적인 선도투쟁에 의해 수행됐다.

처음엔 정규직화는 너무 멀게 느껴지고 당장 12월31일까지 해고 철회라도 시킬 수 있겠느냐, 라는 게 대다수의 고민이었지만, 당시 최고등급의 교통수단인 새마을호 열차승무원이라는 점과 미모의 여성 문제란 점 때문에 동정적인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해고무효’ 목표는 의외로 손쉽게 이룰 수 있었다. 시작할 땐 투쟁하다 해고된 동지에 대한 생계의 문제, 해고자구호기금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는데 이 문제가 생각 외로 쉽게 풀리자, 우린 정규직 쟁취로 맘편하게 목표를 바꿔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싸움은 이때부터였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점은 당사자들인 여승무원들 중에서도 서너명만이, 어떤 때는 1명만이 이 투쟁에 함께 했다는 점이다. 정규직 조합원들이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강한 반발정서 속에서 소수의 간부들이 고립되어 투쟁하다 보니까 선도투쟁 방식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당연히 사측도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았다. 조합원들의 반발 정서는 간부의 투쟁의지를 떨어뜨리고 노동조합 간부 내에서도 심각한 이견과 갈등으로 적지 않은 맘고생을 겪어야 했다.

어쨌거나 이 투쟁은 철도조합원들에게 특히 간부들에게 비정규직 철폐투쟁이 남의 일도 아니고 더이상 미뤄둘 순 없는 문제라는 생각을 강하게 남겼다. 그 결과로 지금은 철도노조 내에 비정규직 전담부서가 각 지방본부에까지 생기고 예산이 배정돼 있다.

우리는 이 투쟁을 거치면서 ‘정규직이 비정규직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선 곤란하다는 점을 배웠다. 싸움이 어려웠던 시기엔 집회에 여승무원이 1명도 안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소수의 헌신적인 간부들은 힘 빠지고, 조합원들은 ‘당사자도 안 싸우는데 왜 우리가 나서야 되는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다수의 정규직 속에 소수의 비정규직 투쟁이란 게 정규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투쟁하는 사람을’ 남길 목표를 분명히 하고 싸웠다면, 투쟁의 방향과 방법에 비판적 검토가 따른다는 것이다. 단결은 투쟁하는 자만이 요구할 수 있고 또 그럴 때 정규직에 대한 설득도 쉬워진다.

다른 한편 정규직의 입장에서도 이 문제는 마찬가진데, 스스로 싸우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연대투쟁이 문제해결의 기본조건이라면, 정규직을 대상으로 한 폭넓은 교육과 조직사업이 절실하다. 일선 간부들조차도 비정규직 철폐투쟁에 대한 인식 수준이 아직은 초보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정규직화, 비정규직 사용의 제한, 단협 확대적용 - 2006년 단협요구

이번 단협엔 철도에서 처음으로 비정규직에 관한 요구안이 담겨 있다. 주요내용은 ‘비정규직 사용의 제한, 상시업무의 정규직화, KTX여승무원 및 새마을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동일노동·동일임금, 단협의 효력확장과 균등처우’ 등이다. 철도노동자들이 처음으로 비정규직의 문제(만은 아니지만)로 파업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요구수준엔 못 미친다 하더라도 내부적으론 상당한 진전이다. 비정규직철폐투쟁이 소수의 간부 수준에서 철도 내 전 직종으로, 전 지역으로 확대되고 투쟁으로 조직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비정규직-정규직 함께하는 파업, KTX 여승무원 파업출정식

지난해 12월2일, 한국노총 소속의 철도산업노조를 탈퇴하고 철도노조에 가입한 KTX승무지부는, 2월9일부터 11일까지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벌여서 86%가 투표에 참여하고 88%의 찬성으로 쟁의행위를 가결시켰다. 2월22일엔 서울역에서 KTX승무지부 파업출정식을 갖고 철도파업에 함께 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철도공사 정규직 직접채용 △체불임금 지급 △노조탄압 중지 △인력충원 등을 요구하며 서울역 집회와 농성, 선전전과 간부들의 집단연가투쟁을 시작했다. ‘독자파업’이라도 하겠다는 기세다.

이외에도 철도노조 대전정비창의 비정규직 전체와 새마을 여승무원 일부가 이번 파업에 함께 하게 될 것이다. 의식있는 소수의 새마을 투쟁에서 공식적인 의결기구를 거쳐 대규모로, 그것도 최고수준의 대중투쟁을 벌이는 게 된 것이다.

앞서 지난 2월7일, 철도노조는 ‘비정규직 조합원 희생자구호규정’을 제정하고 구호기금의 조성과 사용에 대한 제도적 정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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