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관계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현장정보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되곤 한다. 수박겉핥기식이거나 때로는 심각하게 한쪽으로 치우친 언론의 정보에만 기대어 자기생각을 가지런하게 모아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걸음 비껴서 있는 사람에게 현장의 사례를 분석하거나 노사관계 당사자들과의 공식, 비공식적인 접촉은 그래서 중요한 ‘작업’에 속한다.

최근 국회 환노위를 통과한 비정규 입법안을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이다.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는 것조차 수고로운 노력을 요하는 일이지만, 외부인이 그 구체적인 경과를 알아내기란 소 뒷걸음치다 쥐잡는 만큼이나 지난한 일에 속한다. 그러던 차 얼마 전 한국노총 토론회에서 이번 비정규직 입법과정의 일단을 엿보는 기회를 가졌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 둘 다 놓치면 책임이 없다?

인용이 조금 길기는 하지만 다음은 한국노총측이 발제한 자료의 일부분이다.

“열린우리당은 (비정규 법안의) 2월 임시국회 처리를 위해 민주노동당에 대해 한국노총 최종 타협안에서 한 걸음 나아간 안(불법파견 적발 시 즉시 고용의무 안에서 즉시 고용의제 안으로)을 제시했으나 민주노동당은 사유제한 도입을 재차 요구하며 이를 거부했고, 그러자 열린우리당은 한국노총 최종 타협안에서 후퇴된 안(불법파견 적발 시 ‘2년후 고용의무’와 합법파견도 고용의무)을 제시했던 한나라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질서유지권을 발동해 민주노동당의 물리적 저지를 막는 파행적인 형태로 국회 환노위에서 비정규법안을 통과시켰다.”

많은 내용을 하나의 문장으로 담는 재주는 판결문을 쓰는 법관의 그것을 보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하지만 요는 기간제의 사유제한에 매달리다 ‘불법파견에 대한 즉각적인 고용의제’의 법제화를 놓쳤다는 내용이다. 민주노동당이 이 내용을 민주노총과 협의한 바 민주노총이 거부하였다는 말도 들린다. 사실인가?

여기에서 비정규직 보호의 중요성을 되풀이하자는 건 아니다. 비정규법안을 정략적으로 이용한 열린우리당의 행태가 올바르다고 이야기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환노위를 통과한 안을 보면 적어도 민주노동당의 ‘최대강령주의’도 민주노총의 그것에 못지않게 심각하다는 느낌을 아무래도 지울 수 없다. 최대강령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혁명에 걸맞는 위력적인 대중동원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그것은 ‘모 아니면 도’라는 허허로운 명분만 남는다.

선명한 주장은 멋있고 폼나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논리를 뒤엎을 힘도 없으면서 “주장은 했노라”고 자위하거나 “그 봐라, 그때 내가 경고하지 않았느냐”고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라면, 이는 다시 생각할 일이다. 게다가 기간제의 사유제한이 실업의 증가가 아니라 비정규직의 감소로 이어진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주지하다시피 불법파견은 노동부가 현대자동차에 대해 판정한 9,234명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비정규직 보호와 관련하여 핵심적인 이슈에 속한다. 행정부가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하여도 늘구장창 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고 법원의 판결이 나더라도 고용의무만 질 뿐 그것이 반드시 직접고용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조차 없는 실정이다. 과태료 3천만원이 비정규직 개인에게는 큰 돈이겠지만 비정규직을 사용하는 사용자에게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게다가 2년미만 불법파견자는 생짜로 고용계약이 종료되어야 한다면 이는 차라리 그러한 조항이 없는 것만 못할지도 모른다. 민주노동당이 정치파업까지 선언하며 보호하려던 비정규직이 과연 누구인지 묻고 싶은 심정이다.

반세계화가 아니라 ‘규제된 세계화’가 화두

그날 한국노총의 토론회에서 필자가 토론한 지점은 ‘세계화와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주제였다. 기간제에 대한 사유제한을 관철하려다 파견제에 대한 고용의제조차 잃어버리는 그 이면에는 세계화 반대라는 장엄한 논리가 뒷받침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세계화는 규제완화를 의미하고 이는 고용의 유연화를 심화시키니 만큼 당연히 이는 막고 봐야 한다는 논리인가? 그나저나 세계화 반대라는 게 가능이나 한 것인가? 국민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차치하더라도 해외자본이 조류 인플루엔자만큼이나 나쁜 것이라면 우리나라 자본이 해외에 나가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결론은 간단하다. 세계화는 일방적인 반대나 찬성의 대상이 아니라 ‘어떤 세계화인가’의 문제이며 그것은 ‘규제된 세계화’(regulated globalization)를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에 닿는다. 그것이 운동권이 주장하는 ‘또다른 세계’이자 ‘대안적인 세계화’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사실 각국이 세계화에 대해 동일하게 대응하는 것도, 세계화가 빚은 경제사회현상이 판박이로 똑같은 것도 아니다. 한 나라가 갖춘 역사나 제도·문화의 틀 안에서 주체가 어떻게 대응하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세계화’라는 걸 장황하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날 이른바 ‘87년 체제’라 불리는 노동운동이 산업화·민주화의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면, 1997년 이래 노동운동은 세계화·양극화의 분위기 속에서 진행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산별체제는 물론 노조의 사회연대적 지향이 우선시되고 아울러 노동조합의 내부민주주의가 새로운 가치로 등장할 것이다.

이에 덧붙여 사회적 대화는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계승자이자 대안’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띠고 나타난다. 신자유주의는 세계화와 일란성 쌍생아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사회적 대화는 ’어떤 세계화인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각 노사정위원회가 식물조직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사회적 대화의 의미조차 물건너 가는 것은 아니다.

올해의 노사관계를 규정하는 키워드는 ‘노정갈등’으로 보인다. 여전히 국회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비정규직 법안은 물론이거니와 노사관계 로드맵, 특수고용형태 노동자에 대한 노동기본권의 보장, 그리고 공무원 노사관계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철도노조의 파업에서 보듯 비공무원 공공부문 역시 노사갈등의 핵이라는 위치를 좀처럼 양보할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화와 타협’은 노사관계, 노정관계에서 또다시 핵심적인 해법으로 등장한다. 정부에 대해서만 대화와 타협을 주문할 것이 아니라 노사단체 나아가 시민단체나 정당에 이르기까지 이는 중요한 덕목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단체교섭도 그것이 파업으로 치닫더라도 결국은 타협의 과정이고 정치 역시 타협의 미학이다. 비정규직을 저들이 정략적으로 이용한다고 해서 덩달아 정략화시키거나 자신의 ‘계급성’을 내세우기 위한 선전도구로 이용함으로써 게도 구럭도 잃는 일은 피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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