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8일 새벽 2시, 한국산업인력공단 본부 3층 이사장실이 있는 복도에서 결과가 나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서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기다리고 있는지 그 목적마저 흔들리고 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사람들을 둘러보니 한쪽에서는 벽에 기대어 잠을 자고 한쪽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보고 싶은 우리 가족을 위해서라도 내일이면 내려가야 한다.

교섭위원들이 나온다. 표정이 밝지 못하다. 마음이 쓰려오기 시작한다. 교섭이 마무리되지 못한 채 긴 정회를 한다고 한다. 오후 1시에 다시 교섭을 시작한다고 한다.


스물여섯 살에 시집도 안 간 내가 왜 65일 동안 차가운 바닥에서 잠을 자고 허리가 끊어질 듯한 병을 얻어가며 이곳에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때가 온 것 같다. 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인력공단 비정규직 교사인 나는 2004년도에 처음 국립기관에 입사하여 자랑스럽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직업전문학교 원장이나 이하 윗분들이 왜 틈만 나면 계약을 해지한다는 둥, 아가씨가 타 준 커피가 맛있다는 둥 하는 그런 참기 힘든 얘기를 들먹거리며 나를 느끼한 눈으로 쳐다봤는지, 왜 특별한 날엔 정규직들에게는 선물이, 나에게는 설움이 주어졌는지도 몰랐다. 그 때만 해도 그냥 조용히 지내면 근무를 계속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선배 비정규직 선생님들의 속 이야기는 달랐다. 10개월 계약을 하고 2개월 쉬었다가 다시 10개월 계약 근무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기관장 마음에 안 들면 계약을 안 해 버리면 그걸로 끝이라는 것이다. 똑같은 일을 하고 함께 밥을 먹고 학생들을 위해 노력하는데도 월급도 반밖에 안주고 심지어, 밥값도 지원이 안 되었다. “앗! 원래 다 지원 안 되는 거 아닌가요?” 화들짝 놀라면서 멍청한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냥 사람 사는 대로 살면 될 줄 알았다. 너무 세상에 대해 몰랐던 탓이다.

2004년에 노조가 결성되었다. 이젠 잃어버릴 것도 없다. 그러니 두려울 것도 없다. 2005년은 노조 덕분인지 그냥 자연스럽게 재계약이 되었다. 그러던 2005년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를 맞았다. 공단이 개편을 한다고 한다. 그냥 개편이 아니다. 공단의 가장 큰 사업인 자격검정부문과 직업훈련부문 가운데 직업훈련부문을 기능대로 통폐합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구조조정이 일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계약직까지 계약해지가 된다고 한다. 이거였군. 어쩐지 2005년도 계약이 너무 잘된다 싶었다. 개편을 핑계로 하여 몽땅 잘라내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냥 두고 보지만은 못할 것 같다. 열을 받을 대로 받고 악이 받칠 대로 받쳤다. 멍청하게 늦게서야 계약직의 설움을 깨달은 나조차도.

파업이 시작되고 16일이 지났다. 노동부 주최로‘직업능력개발의 달’이 열렸다. 우수기능인들에게 명장수여식을 하는 행사였다. 노동부 장관이 치사를 하고 있었다.

“김대환 장관님, 질문 있습니다.” 잔잔한 물에 돌을 던지는 듯 임세병위원장의 큰 목소리가 행사장을 울렸다. “노동부에서 비정규직이 가장 비율이 높은데, 노동부에서조차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는 지금, 우수기능인들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고 있는데…….” 위원장의 목소리가 노동부 장관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위원장과 비정규직 철폐 현수막을 펼치고 비정규직도 인간임을 외치고 있는 이들은 밖으로 내동댕이쳐지고 장관은 끝까지 치사를 멈추지 않고 있다. “우리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지식과 기술, 창의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마무리하는 장관에게 돌을 던지고 싶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노동부 장관에게 상을 받았던 사람들이 지금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고 있고, 당장 내일 길거리로 쫓겨날 판에 노동부 장관이라는 사람은 우리나라 경쟁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기술, 실력을 갖추라 한다. 앞뒤가 안 맞다. 서럽다. 공공기관에서조차 비정규직을 마구 쓰고 버리고 하는데 다른 곳에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나도 비정규직이지만 직업훈련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학기가 끝나면 취업을 시켜야하는 하는 교사다. 비정규직으로 취업을 시켜야하는 현 실에 나는 늘 갈팡질팡한다. 선생도 비정규직, 학생도 비정규직. 이 나라가 싫어지려고 한다. 어쨌거나 나는 이러한 노동부와 공단의 만행을 규탄하고 살 길을 찾기 위해서 파업을 준비하는 산비노조 집행부를 따라 대구에서 올라와 여기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65일 동안 지내왔다. 여덟 개 노선이 있는 지하철을 타는 것도 두려웠던 시절을 거쳐 이젠 서울 사람처럼 익숙하게 지하철을 타고, 국회 앞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다 경찰에게 맞고 잡혀가고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내 제자들을 위해 빨리 비정규직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싶고 또한 나도 비정규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12월28일 오후 1시. 교섭을 중단하고 가진 긴 정회를 끝내고 다시 교섭에 들어갔다. 잠깐 뒤에 이사장 직무대행인 운영이사가 문을 박차고 나왔다. 뒤이어 교섭위원들이 나왔다. 역시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하다. 오늘도 집에 못 갈 거라고 단념하고 있었다. 교섭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다들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다. 교섭위원들이 들어왔다.

“공단은 공단 내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고, 비정규직 해소를 위하여 더 이상 상시적인 업무에 종사하는 비정규직을 확대하지 않는다고 합의하였습니다.”

웃음이 온 얼굴에 퍼졌다. 힘이 풀려있던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능대학으로 전원 고용승계’,‘단계적 정규직화 추진, 2007년도에는 비정규직의 50%수준까지 정규직화’,‘임금 인상에 대해 정규직 대비 현실적인 수준까지 인상되도록 추진’ 마지막 교섭 내용은 이것이었다. 한 번에 전원 정규직은 아니지만 차차 정규직화를 추진하겠다고 하였고, 더 기쁜 소식은 공단에서 비정규직을 늘리지 않는다고 한다. 투표를 했고 81%라는 결과로 가결이 되었다. 이제 집으로 갈 수 있다. 더군다나 성과를 가지고 집으로 갈 수 있어서 눈물이 난다. 함께 투쟁해 온 선생님들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66일동안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고, 이들과 헤어짐이 슬프지만 여전히 그들의 투쟁 의지는 불타오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직장으로 돌아가서 싸워야 할 일만 남았다. 이번이 끝이 아니란 걸 다들 알고 있으리라. 물론 앞으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명확하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동안 내가 세상을 바라보던 눈과 지금은 다르다는 것 뿐. 이제 달라진, 아니 달라져버린, 다르게 보일 그 세상에서 힘차게 살아보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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