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4년생. 1987년 민주화 대투쟁 결과로 옥장군, 아니 전대가리가 그 유명한 ‘6·29 기만선언’을 한 게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사실 웃기기도 하고 쪽팔리기도 한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그때 사상서적 해금조치와 함께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던 책 가운데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불의 기록, 피의 기록, 죽음의 기록>이라는 책이 있었다. 정확히 말해 그 책은 사상서적은 아니고, 전태일 열사 이후 YH여공 사건까지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항거했던 투쟁에 대한 기록이었다.

88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홍역을 치르던 해, 내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갔을 무렵, 저 책이 내 손에 들어왔다. 생일이었는지 어쨌는지 선물로 책을 사주겠으니 같이 가서 고르자는 엄마의 말에, 백화점에서 책을 뒤적이다 이 것을 집어 들었다. 너무 놀라워 할 거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난 저 책을 사가지고 집에 가지고 올 때만 해도 공포소설이나 추리소설 같은 건 줄 알고 있었으니까. 그 책을 수업 시간에 교과서 밑에 넣고 몰래 펼치는데, 첫 단락 제목이 ‘한국의 예수 전태일’이라서 도대체 뭔 말인가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책을 잊을 수 없다. 처음으로 내게 관점 비슷한 것을 심어준 책이었기 때문이다. 일요일도 없이 하루 열 몇 시간씩 좁은 공간에서 미싱기를 돌리고, 피를 토하면서도 일해야 했다는 문장들은 나를 무섭게 사로잡아 버렸다. 도대체 이럴 수가,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였구나.

그 1988년도에 나를 잡아 끈 것은 올림픽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몇 개 땄느냐 하는 게 아니라 광주학살 관련 청문회 방송이었다. 조그만 휴대용 라디오에 이어폰을 꼽아 소매 안에 집어넣고는 수업 시간에 열심히 들었던 게 바로 그 방송이었다. 참, 그때는 노무현이나 이해찬이가 정의의 사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나는, 초·중·고 12년을 다니면서 존경할만한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거의 모든 선생님들은 그저 지친 샐러리맨 정도의 인상이었고, 그 가운데 두세 명은 지금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인사하기 싫을 정도로 촌지에 매달리거나 학생들에게 폭언, 폭행을 일삼던 사람들이었다. 그때, ‘좋은 선생님’이란 욕하지 않고 때리지 않고 재미있게 수업하면 그걸로도 감지덕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딱 한 분, 중학교 때 국사 선생님만은 달랐다. 언제나 우리들을 존중해주고, 교과서 내용을 앵무새처럼 단순 반복 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해 줬다. 수업 시간에 우리들이 말을 잘 들으면, 느닷없이 광주학살 이야기를 하시기도 했다. 그분은 담임을 맡은 반이 없었는데도 스승의 날에 가장 많은 학생들에게 선물을 받기도 하셨는데 아이들은 부모님이 담임 가져다주라고 안겨준 선물보따리 말고도, 용돈을 모아서 그 선생님 몫으로 양말이니 손수건 따위를 챙겼을 것이다. 나는 불량 학생 비슷한 거여서 친구들끼리 모이면 맨 먼저 담배부터 꺼내곤 했지만, 그날 우리 패거리는 각자 일주일 전부터 담배 값을 아껴서 모은 돈으로 싸구려 넥타이를 하나 준비했다. 패거리 가운데 아무도 그에 대해 뭐라고 하는 놈이 없었다.

아마 철든 뒤에 내가 가장 먼저 가졌던 장래 희망은 선생님이었을 것인데, 그것이 그분의 영향을 받았던 것임은 위에 주절주절 한 걸 보면 대충 짐작들 하시리라. 오랫동안 국사교육과는 내 목표였다. 공부를 못해서 좌절되긴 했지만.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중2 때던가 중3 때던가 했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그렇게 ‘이념교육’을 시킨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날뛰는 ‘전교조’란 조직이 결성되던 때가 말이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만들고 가입하려는 선생님들과 기를 쓰고 탄압하려던 정권 때문에 전국에 있는 모든 학교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술렁거리고 있던 때였다. 자고나면 어느 학교 선생님들 연행, 누가 또 해고, 이런 뉴스가 나왔으니까.

당시 우리 집 꼰대는 통장을 맡고 있었는데, 하루는 저녁 밥상머리에서 “너네 학교에 이상한 선생이 누구냐?” 묻는 것이었다. 동장이 각 통·반장들에게 시켜서 아이들을 ‘탐문수사’했던 것. 아무튼 그 질문에, 지금 생각하면 그냥 ‘몰라요’하고 넘어가면 되었을 텐데 아침마다 나오던 선생님 연행 뉴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때까지도 가끔씩 흘끔거리곤 했던 ‘죽음의 기록’의 영향이었을까, 하여간 순간 ‘욱’ 해버린 내 입에선 엄청난 말이 터져나왔다.

“나보고 선생님을 팔아먹으란 말이가?”

원래 폭력적이었던 그 꼰대, 가만있을 리가 있나. 당장 밥상 뒤집어지고, 눈탱이가 밤탱이를 넘어 실핏줄이 터질 만큼 두들겨 맞았지. 하지만 그때까지 모아뒀던 내 ‘불온서적’들이 빼앗겨 불타버린 것에 견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아니, 그러고도 결국 어디선가의 정보를 주어 그 선생님이 사표를 쓰셔야 했던 것에 견줄 순 더더욱 없겠지. 어쨌든 그 사건 때문에 난 많은 것을 깨달았고, 뒤에 그 꼰대가 미쳐서 발작을 일으켰을 때 미련 없이 끊어버릴 수 있었으니 무작정 나쁜 기억만은 또 아니다.

내가 ‘죽음의 기록’을 한참 들여다보고 정말 전태일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죽어갔느냐고 물어봤을 때, 우리 부모들은 ‘그건 다 1970년대 이야기니까 신경 끄고 넌 공부나 하라’고 했다. 지금도 정권이나 언론들은 노동자들의 지나친 투쟁 때문에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으며, 경제가 어려웠던 1980년대에나 인정받을 운동이라며 파업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전교조에게 학교를 빼앗긴다며 설치는 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일이며, 나로 하여금 가끔 사람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하거나 자판 두들기기에 열중했던 어떤 카페의 ‘논객’ 정도로 만족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은, 1970년대의 전태일 열사와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들이 아니라 지금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무엇보다 그들과 같은 처지의 나 자신 때문이다.

전교조가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부정한다고? 글쎄, 반드시 그래 보이지는 않지만 설사 그러면 또 어떤가? 시장경제가 사람들을 살리지 못하고 죽이고 있다면, 그래서 나도 그 속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다면, 그래서 다른 대안이, 다른 세상이 필요하다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당연히 부정되고 없어져야 한다. 그와 같은 조치가 박근혜와 같은 지배계급밖에 다른 누구에게 타격을 주겠는가? 사람을 죽이는 길이 아닌 살리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도 그것을 문제 삼는다면, 도대체 ‘이념’을 까닭으로 사람들의 ‘현실’을 무시하는 쪽은 과연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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