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생태환경에 대한 안일한 의식에 경종을 울리는 언론보도들이 줄지어 나오고 있다. 폐기물 해양투기로 인해 바다가 오염되고 황폐화되어 어족자원들이 감소할 뿐만 아니라 오염된 해산물이나 물고기를 섭취하면서 인체가 오염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1950년대 일본에서 수은중독으로 사람들이 언어장애, 시각장애 등을 겪다가 죽어갔던 ‘미나마타 병’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화학공장의 폐수가 인근 바다를 수은으로 오염시켰고, 이로 인해 먹이사슬을 따라 수은에 중독된 물고기들을 섭취한 사람들의 체내에 수은이 축적되면서 심각한 질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혈중 중금속농도, 선진국의 5~8배

또한 환경부가 최근 전국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혈중 중금속 농도를 보면, 비록 위험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미국·독일 등 선진국들에 비해 5~8배라는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수은 농도의 경우 평균 4.34㎍/ℓ로 나타났는데, 중요한 것은 가장 높은 5%의 평균치가 11.69㎍/ℓ이었고, 전체의 1.8%는 위험성이 증가하는 수준인 15㎍/ℓ를 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은 등 중금속 오염에 취약한 사람들은 주로 공단지역 주민, 생산직 비정규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산업화, 중화학공업화, 대량생산 대량소비 등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의 과정은 한편으로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오염을 통해 인류의 건강에 치명적 위해를 낳고 있다. 공장에서 배출되는 매연, 산업폐수, 산업쓰레기들, 농약과 화학비료, 축산폐수, 소비과정에서 나오는 생활폐수와 생활쓰레기, 자동차 매연 등은 대기오염, 수질오염, 지하수오염, 해양오염, 토양오염 등을 낳고, 각종 개발사업은 숲이나 습지 등 자연환경을 파괴시켜 인간의 생존환경을 점점 더 열악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대규모의 재해들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것은 그야말로 인간 생존의 딜레마라 할 만하다. 물질적 생존을 추구한 결과로 신체적 생존, 즉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환경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자연친화적인 건강한 삶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경제성장과 개발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는 궁극적으로 특정한 계급을 넘어선 인류 전체를 위협하고 있으므로, 성장과 개발의 제한을 통해 생태환경을 살리려는 환경운동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모두가 동참해야 할 운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의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당장의 물질적 생존이 시급한 노동자들과 서민들에게는 환경친화적 삶이 사치스럽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밥 벌어먹기 바쁜데 웬 환경 타령이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장의 물질적 생존에 급급하면서 서서히 신체적으로 피폐해져 가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의 건강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환경의제를 적극적으로 끌어안는다면 양자를 조화시킬 돌파구는 존재한다.

친환경적 삶, 불평등 개선과 직결돼

노동운동이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면서도 국가와 자본이 주도하는 성장주의 전략, 개발 전략에 동조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빈곤이나 물질적 욕구일 것이다. 빈곤은 노동운동이 보다 큰 물질적 만족을 얻기 위해 ‘성장을 통한 분배’를 내세우는 국가와 자본의 성장주의, 개발주의 전략에 동조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교육문제와 주택(부동산) 문제는 노동자들이 더욱더 개인주의적 이익추구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 지속되어 왔지만 빈곤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적절한 분배가 이루어진다면 성장과 개발에 몰두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경제수준에 도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착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성장과 개발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 하에서 추진되고 있는 지역균형발전이 ‘균형’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게 대규모 토목 건설 사업에 몰두하는 소위 ‘토건국가’의 지역화가 되고 있는 것도 성장주의와 개발주의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막대한 국가예산을 투자하여 다수의 지역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사업을 벌이기보다는 거대한 건설 사업을 통해 자연환경을 파괴하면서 외형적 성장에 치중하는 지역개발 전략은 지방자치단체, 지역의 부동산 소유자들, 건설기업들 등 소위 지역유지들에게 엄청난 부를 편중시키는 소수만을 위한 예산낭비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친환경적인 삶을 위해서는 성장주의, 개발주의의 덫에서 벗어나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복지, 재분배, 일자리 나누기 등을 통한 불평등의 개선과 삶의 질 향상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노동운동이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목표들이다. 그렇지만 빈곤의 해결이나 소득 상승이 곧바로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동운동이 환경운동과 만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성장주의에 대한 비판은 분배(복지)와 환경이라는 이중적 관점에서 이루어질 때 진정한 삶의 질 향상과 건강한 생존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노동운동, 환경친화적 생산양식과 절약적 생활양식 실천해야

자본주의는 상품화와 착취를 통해 이윤을 확대재생산하기 위해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끊임없이 확대시켜나가는 경제성장체제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자원과 에너지의 대량소비에 의존하고 이를 통해 대량의 환경오염과 쓰레기배출을 낳는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이 진정으로 노동자들의 건강한 삶을 실현하려면 사회복지와 분배적 정의의 추구를 성장주의, 개발주의에 대한 반대, 환경친화적 생산과 결합시켜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빈곤이 자본의 성장주의와 환경오염에 대한 동조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은 노동자를 비롯한 서민들이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분배적 정의의 실현과 무상의료, 무상교육, 공공주택 등 복지제도의 확충을 위해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노동자들마저 사교육비 경쟁과 부동산 투기 경쟁으로 몰아가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이에 기반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주의적 생활양식과 단절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이끌어내야 한다.

기존의 산업사회, 대량소비사회, 에너지 과소비사회는 동시에 대규모 환경오염 사회, 쓰레기 대량배출 사회를 의미한다. 상품의 다양화,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통한 욕구, 소비, 이윤의 확대재생산이 바로 궁극적 원인이다. 이것은 개인주의적 욕구 경쟁을 부추겨 분배적 정의를 추구하는 연대의 형성을 제약하게 된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은 분배적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서라도 성장주의, 개발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통해 환경친화적 생산양식과 절약적 생활양식을 실천해 나갈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연대의 필요성은 무엇보다도 노동자들 역시 이러한 환경오염의 피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피해가 노동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자원과 에너지의 낭비를 줄이고 환경오염을 줄이려는 환경운동의 생태주의적 목표는 자원 분배의 평등화라는 노동운동의 사회주의적, 평등주의적 목표와 맞닿아 있다. 분배의 평등화야 말로 성장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동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궁극적으로 자원과 에너지의 낭비를 줄일 수 있는 생태친화적 사회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연대가 절실하고 또 가능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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