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9일 홍콩 경찰서 유치장에서 풀려난 농민들은 기쁨보다는 설움에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먼 홍콩 땅에서 한국 농민은 국제 미아로, 버림받은 국민으로 대접받아야 했으니.

천명이 넘게 홍콩 거리에서 ‘다운 다운 더블유티오(Down Down WTO)’를 외치다 연행이 되었고, 열한명이 구속되었습니다. 유치장에서 풀려나 숙소인 우카샤 캠프에 도착하니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 한국 영사관에서 신원보증을 해 줄 수 없다고 해서 보석이 기각이 되었다는, 그래서 구속 수감되었다는….

관공서에서 서류를 작성하던 농민이 직업에 농민은 왜 없냐고 묻자, 기타에 표시하라고 해서 한때 농민들을 서글프게 했던 ‘기타 국민’ 대접을, 홍콩에 와서야 뼈 속 깊숙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본사람은 한 사람이 구속되었는데, 일본 영사관에서 앞장서서 보석으로 풀려나게 했다고 합니다. 신원보증을 자국의 영사관에서 서지 않아 구속된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랍니다. 우리 국민을 나 몰라라 내팽개치는 영사관을 ‘우리 영사관’이라 불러야 하는지? 농민이 ‘기타 국민’도 되지 못하는 건 아닌지? 화가 치밀기보다는 부끄러움이 내 얼굴을 붉게 합니다.

폭도를 기다리는 기자들

12월13일 깃발을 앞세운 농민들이 조끼와 머리띠를 하고, 장구와 꽹과리를 치며 홍콩 시내를 처음 나간 날, 시민들은 박수는 커녕, 경계를 하며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거리에 있는 가게들은 철문을 닫았고요. 각료회의가 열리기 전, 홍콩에서는 한국 농민을 ‘폭도’라고 선전을 했답니다. 홍콩 텔레비전 뉴스에선 ‘폭도’들의 무기를 없애기 위해 거리 보도블록은 본드로 단단히 붙이고, 쇠로 된 가드레일은 용접을 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홍콩 시민들이 낀 색안경은 하루만에 깨지고 말았어요.

13일 각료회의장으로 가던 농민들을 홍콩경찰들이 막아서자 농민들이 보인 것은 각목도 쇠파이프도 돌멩이도 아니었지요. 길이 막히니 한 명, 두 명, 삼십 명, 사십 명, 백 명, 이백 명, 차례대로 차가운 바다로 뛰어들기 시작했어요. 태극기를 들고, 목숨을 건 채 바다를 헤엄쳐 각료회의장으로 가는 농민들을 홍콩 경찰도 가슴을 조아리며 지켜만 보고 있었지요. 바다에 뛰어들지 않은 농민은 상여를 메고 행진을 했습니다. 방패와 곤봉을 들고 가로막은 경찰들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외치면서. 옆에 있던 홍콩 시민들과 기자들은 보았습니다. 한국 농민의 폭력은 곤봉으로 때려도, 최루액을 쏴도 머리를 들이밀고 맨몸뚱이로 맞서는 폭력이라는 걸.

13일 농민들의 처절한 몸짓은 ‘폭도로 바뀌는 농민’들을 찍으려고, 안전모자와 방독면으로 무장한 기자들을 실망하게 했습니다(홍콩기자들의 취재용 안전모자는 모두 한번도 쓰지 않은 새 것이었습니다. 평화로운 집회 때도 한 텔레비전 여자 리포터는 안전모자를 쓰고 긴장한 모습으로 녹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나와 함께 사진을 찍던 한 외신기자는 “도대체 무얼 찍어야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지요.

"한국 농민을 지지합니다"

14일부터 홍콩 거리는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집회장 앞 경찰들도 먼저 웃으며 농민들에게 인사를 하고, 어떤 경찰은 ‘안~녕~하~세~요’ 하며 우리 인사말을 익혀 말을 하기도 합니다. 택시 기사는 경보기를 울리고, 트럭 기사는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지지를 나타냅니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박수를 칩니다. 철문을 내리고 장사를 하지 않던 상가들은 모두 문을 열고 한국 농민을 지켜봅니다.

15일에 2킬로미터를 세 시간에 걸쳐 삼보일배를 하며 행진을 하자, 폭력(?)을 바라던 홍콩 언론들도 왜 한국 농민이 홍콩에 까지 와서 싸우는지에 관심을 갖고 인터뷰를 하기 시작합니다. 유인물을 들고 거리에 나가면, 시민들이 빵과 물을 상자 채 갖다 줘 유인물을 나눠 줄 손이 없어 선전전을 못하겠다는 즐거운 비명소리가 났습니다.

의령 농민들은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돈을 받지 않더랍니다. “왜, 받지 않느냐?”고 물으니, 어떤 시민이 명함을 주고 자신이 계산할 테니 절대 돈을 받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도 숙소 앞에서 맥주를 먹고 계산을 하려고 하니, 사장이 ‘우리는 친구’라고 서툰 영어를 하며 한사코 돈을 받지 않아 공짜 술을 얻어 마셨지요.

누구는 ‘한류열풍’이라며 바람에 비유했는데, 한국 농민이 홍콩에서 일으킨 것은 ‘바람’이 아니라 형제의 우정이라고 봐야 합니다. 17일 홍콩 시민들이 만들어 나눠준 주홍 글씨의 편지에는, ‘홍콩’이라는 ‘쇼핑천국’이 여러분들의 고통 위에 세워진 것을 깨우쳐줘 고맙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을 지지하고 함께 하겠다’고 했어요.

홍콩도 빈부의 차가 갈수록 심해지고, 실업률은 높아만 간다고 합니다. 한국 농민들의 홍콩 투쟁은 각료회의를 막아내는 일과 함께, 홍콩 민중도 세계 민중들과 함께, 한 형제임을 깨우치게 하였지요. 홍콩 시민들의 지지는 17일 한국 농민들이 경찰에 포위되자 지지를 넘어 참여로 이어졌어요. 한국 농민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연행되겠다고 홍콩 의원이 나서자 시민들도 함께 거리를 지켰지요. 이 의원은 “더이상 우리의 친구인 한국 농민을 때리지 말라. 인권탄압을 멈춰라”고 홍콩 정부와 경찰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맨몸으로 저지선을 뚫어라

참, 빠진 게 있네요. ‘분위기 좋았는데, 막판에 왜 ‘폭도’로 변했냐?’, ‘결국 천명이나 연행되어 국제적 망신을 당하지 않았냐?’하는 질문.

내가 17일 맨 앞에서 경찰 저지선을 뚫기로 한 부산·경남 지역 농민들과 함께 있어서 본 대로 말을 하지요. 아침에 지도부가 “우리는 할 수 있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항의를 했습니다. 하지만 각료회의는 우리 의견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내일 각료회의 폐막을 합니다. 오늘은 맨몸뚱이로 무조건 각료회의장을 향해 나갑시다. 경찰 저지선을 뚫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각료회의가 끝날 때까지 노숙 투쟁을 합시다.”

지도부의 지시대로 부산·경남과 전북 농민들이 맨 앞에 서서 곤봉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최루액에 눈이 탱탱 부어도 맨몸으로 저지선을 뚫기 위해 나갔지요. 첫번째 경찰 저지선은 쉽게 뚫고 나갔지만, 경찰차로 막아 둔(한국에서 저지선 만든 것을 배운 것 같음) 이차 저지선은 쉽게 뚫리지 않았어요. 날은 어두워지고, 뒤로 빠져나간 농민들이 에돌아 각료회의장 앞 경찰 마지막 저지선까지 갔답니다.

곤봉에 맞고, 최루액을 뒤집어 쓴 농민들도, 어두워지도록 막아서는 경찰들도 흥분이 되며 몸싸움이 격렬해졌지요. 이때 경찰의 마지막 저지선 왼쪽 귀퉁이가 뚫린 거예요. 스무명 남짓 농민이 어디서 구했는지 각목을 들고 나타나 우르르 몰려가니 그토록 잘 막던 경찰 저지선이 금방 허물어졌어요. 큰 충돌도 없이.

각료회의장 앞까지 달려가 ‘전농’ 깃발이 휘날리고, 박수 소리가 나고, 5분도 채 되지 않은 순간 ‘탕 탕 탕 탕’ 최루탄이 터지고, 각료회의장은 최루탄 연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눈물은 나고, 기침을 콜록이고, 농민들은 산산이 흩어졌습니다. 길 너머에서 여성 농민들이 치는 풍물 소리에 한 사람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끝낼 것인가, 아니면 경찰을 뚫고 나갈 것인가, 각료회의가 끝날 때까지 이 자리에 앉아 항의할 것인가. 모두 연행이 되더라도 각료회의가 끝날 때까지 이 자리에서 노숙 투쟁을 하자고 결의를 모았지요. 홍콩 정부는 먹을 것을 들여오지 못하게 하고,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누구도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게 돌돌 에워 쌓습니다.

아이 러브 홍콩

그리고 하루 밤 하루 낮에 걸친 전원 연행 작업이 시작되었지요. 배고픔과 추위에 떨며 아스팔트에 어깨동무를 하고 드러누운 농민들이 한명씩 끌려갔습니다. 하루 종일 거리를 뛰었던 농민들에게 배고픔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마 화장실을 가지 못한 고통일 겁니다. 저항 없는 농민을 한 시간에 서른 명도 연행하지 못하는 홍콩 경찰들의 경험(?) 부족은 ‘차라리 싸우자. 잡혀가는 게 이리 힘들어서…’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농민들은 연행되면서 나를 울렸습니다. 거리를 청소한 뒤 연행되는 농민들 때문입니다. 대충 쓰레기를 줍는 정도가 아니라 나뭇가지로 만든 비로 싹싹 쓸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누워 있다 연행되는 농민들을 보며, 난 욕을 했습니다.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하고, 먹지도 못하게 한 이 자리를 깨끗이 청소하는 농민들이 지지리도 못나 보였습니다. 그러니 1970년대엔 공업화에 설움 받았고, 2000년대엔 세계화에 버림받지 않느냐고 달려가 마구 가슴을 때려주고 싶었습니다. 흙을 닮아 미련하도록 선한 농민의 가슴을.

‘정식 국민’이 되는 날

여성 농민들부터 연행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연행된 사람은 미란다 원칙을 지키지도 않고, 수갑을 채우고(빅토리아 공원에서 연행된 사람은 다섯 시간 이상을 등 뒤로 수갑을 찬 채 꿇어 앉아 있기도 했음), 수치심을 주는 몸수색을 하며 인권을 무시당하기도 했습니다.

홍콩에서 돌아와 지금껏 내가 분이 삭이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연행되는 날 외신기자들 틈에 끼어 내가 사진을 찍을 때 만난 한국사람 때문입니다.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바바리코트를 입은 4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한 사람 왔습니다. 연행되는 모습을 기자들 틈에 끼어 보면서, 젊은 남자에게 보고를 받습니다. 연행되면서 ‘아이 러브 홍콩’을 외치며 바둥거리며 끌려 나가는 여성 농민을 “저것들 전부 쇼하는 거예요”하며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을 찡그리고 혀를 차며, “가자, 부끄러워서”하며 경찰 틈을 비집고 나갔지요. ‘그이’가 누구라는 건 짐작이지만, 아직도 그 얼굴이 꿈에 또렷이 나타납니다. 구속된 열한명의 12월23일 보석신청 때도 한국 영사관은 ‘관계 법령’인가 뭔가를 되뇌며 신원보증을 하지 않았지요. 홍콩 천주교 대주교와 교포의 보증으로 겨우 석방이 되어 아직 재판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 글이 작은책에 실릴 때쯤에는 ‘한국 영사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열한명 모두가 ‘기타 국민’이 아닌 ‘정식 국민’으로 한국에 돌아오리라 믿습니다. 내 꿈에서 ‘그이’의 얼굴도 나타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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