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철도노조(위원장 김영훈)는 다음달 1일 전면파업 돌입을 예고하고 있다. △철도상업화 중단 및 공공성 강화 △구조조정 분쇄 및 고용안정 쟁취 △온전한 주5일제 쟁취 △해고자 복직 및 복직자 원상회복 △비정규직 차별철폐 및 노조활동 보장 등을 요구하고 있는 철도노조의 목소리를 매주 화요일, 3회에 걸쳐 싣고자 한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편집자 주>



연재순서
① 철도해고자의 목소리를 들어라
② 2013년, 철도공사는 파산한다?
③ 꿈의 열차 KTX, 현실은 악몽
철도노조의 주요한 투쟁마다 늘 앞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철도해고자들로 구성된 철도해고자원직복직투쟁위원회(철해투)가 그들이다. 다음달 1일 전면파업을 예고하고 있는 철도노조의 본격적인 투쟁에 앞서, 철해투는 지난 2일 대전청사 앞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눈비가 내리던 지난 10일, 철해투의 농성장을 찾았다. 한밭벌의 황량한 벌판에 '철도해고자 농성장'이라고 씌여진 파란 천막 하나가 눈에 띄었다. 천막 안에는 철해투 회원들과 모포 몇장, 휴대용 렌지와 주전자, 커피 몇개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에 앉아있으려니 절로 한기가 올라왔다.

2003년 6월28일 철도노조 파업으로 해고된 최상규 전 대전차량지부 지부장(38·사진)과 이야기를 나눴다. 최 전 지부장은 6·28 파업 당시 철도노조 대전지방본부 대전차량지부장이었다.


일방적인 철도구조개혁에 맞선 6·28 파업

6·28 파업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철도구조개혁 입법을 추진하려고 한 데서 촉발됐다. 노정은 이에 앞선 4월20일 '철도개혁 및 공공철도 건설 관련 합의문'에서 "향후 철도개혁은 철도노조 등 이해 당사자와의 충분한 논의와 공청회 등 사회적 합의를 거쳐 추진하고, 이러한 절차를 거쳐 관련 법안이 성안될 경우 조속한 시기에 국회 통과를 위해 철도 노사가 공동으로 노력한다"고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정부 입법안을 만들기까지에는 철도노조와 어떠한 협의도 없었다는 게 노조의 주장이었다.

약속을 이행하라는 2003년 6월28일 철도노조 파업을 정부는 불법으로 규정했고, 노조는 이에 맞서 산개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7월1일 노조가 업무에 복귀한 뒤, 파면 및 해임된 노동자는 89명에 이르렀다. 그 뒤, 소청 심사 등을 거쳐 복직된 사람도 있으나 여전히 50명의 해고자가 남아 있다. 또 1994년 전국기관차협의회 파업으로 인한 해고자 1명과, 2000년 노조 민주화 투쟁 과정 해고자 2명, 2002년 2월25일 민영화 저지 파업 해고자가 14명 등 철도해고자는 총 67명에 이른다.

최 전 지부장의 생생한 기억을 들어봤다.

"6월27일 파업 전야제 때 비가 많이 왔어요. 5시쯤 모인 조합원 85명과 파업장소인 고려대학교 조치원 캠퍼스로 이동해서 대전지방본부와 대전정비창 조합원들이 모여 전야제를 했어요. 그리고 새벽4시에 파업돌입 선언을 했는데, 5시30분쯤 되니까 공권력이 투입되더라고요. 다들 우왕좌왕했지만 새벽 6시30분을 기해 각 소속 지부 및 조별로 산개투쟁을 벌였죠. 그때 조합원들이 서로 소속이 섞여서 연행되기도 하고 혼란스러웠죠."

연행자들은 조치원, 천안, 공주경찰서 등에 분산 연행됐고, 현장에 복귀한다는 각서를 쓰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조합원 대부분이 각서 쓰고 경찰서에서 나와서 다시 파업 대오와 조별 산개투쟁에 합류했어요. 그만큼 단결이 됐다는 뜻이죠."

산개투쟁…"간부는 몰라도 조합원은 불이익 없다"

최 전 지부장도 산개투쟁 과정에서 경찰에 연행됐다. "학교 뒤에 산이 있었는데, 산으로 넘어가면 경찰이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말을 믿고 산으로 갔더니 이미 경찰들이 다 매복해 있더라고요. 그래서 잡혔죠. 29일 새벽 7, 8시쯤에 공주경찰서로 연행됐다가 오후4시쯤 되서 풀려났어요. 막 가려고 하는데, 당시 형사반장이 제가 지부장이라는 사실을 알아내 다시 잡혔어요. 그리고 5시30분쯤 풀려났죠."

최 전 지부장은 경찰서에서 풀려나자 곧바로 투쟁상황실을 꾸리고, 산개한 조합원들의 투쟁을 일일이 보고받고, 기록했다. 막상 파업에 들어가자 조합원들은 많이 망설였고, 최 전 지부장에게도 많은 전화가 걸려왔다.

"잘못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들을 많이 했죠. 그래서 조합원 동지들에겐 불이익이나 징계는 없을 것이고, 중앙간부나 지방간부, 위원장, 지부장 정도는 징계의 소지가 있지만 조합원들에게 불이익은 없을 것이다. 지금 산개투쟁을 하고 있으니 해당 소속에 합류하라고 얘기했어요. 일단 조합원들을 안심시키는 게 먼저였죠."

최 전 지부장은 조합원들을 이렇게 설득했고, 실제로 그와 통화를 한 많은 조합원들이 파업 대오에 합류하기도 했다.

"조합원들은 당시 여관이나 친적집, 찜질방, 대천해수욕장, 오대산 등등으로 산개했었어요. 그리고 파업 당시 합류하지 않았던 조합원들도 29일, 30일이 되니까 많이 합류를 했죠. 그래서 최종 복귀할 때는 인원이 210명이 넘었어요. 7월1일 현장 복귀가 결정됐는데, 당시 대전차량지부는 민주노총 대전본부 사무실에 있었거든요. 그곳에서 간단히 파업 평가와 토론회를 한 뒤, 12시20분쯤 전체인원이 4열 종대로 사무소로 복귀했어요. 정확히 복귀한 시간은 12시38분입니다. 파업이 종료가 된 거죠."

당시 파업에 대한 소회를 물어봤다. "파업은 분명히 쉽지 않았어요. 당시는 우리가 공무원 신분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파업이 어렵더라도 다수 지부장들이 중앙 지침에 따라 조직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어요. 물론 도망간 지부장들도 있었지만 그건 완성되지 못한 조직력의 한계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현장 분위기는 좋았어요. 모두 1주일 정도는 파업을 지속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했거든요."

그러나 업무 복귀 후, 본격적인 징계가 잇따랏다. 복귀한 바로 다음날 대전차량지부 상근간부 8명은 전원 직위해제 됐다. 또 경찰서에 연행됐던 조합원들도 대전차량에만 48명이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재조사와 경고 조치가 이어졌다.

끝까지 못 간 파업…넓어진 징계 범위

"노조가 끝까지 가지 못하고 업무 복귀를 하니까 징계 범위를 더 넓힌 거죠. 그때 지부 간부들이 참 많이 힘들어 했어요. 그래서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자 지부 간부 전원에게 사퇴서를 받아 사퇴처리 했어요."

7월26일 최 전 지부장은 파면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파면은 이미 각오했던 부분이라 충격은 크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파면 이후로 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상처가 남았다. 최 전 지부장은 계속해서 이야기 하기를 망설였고, 조금 뜸을 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파면 통보를 받고, 8월3일에 집에 올라가서 아내에게 해고됐다고 이야기했어요. 생전 술도 안 마시던 사람이 그 말을 듣고는 술상을 봐오더라고요. 소주 2병을 나눠 마셨는데 제가 1병반 정도를 먹었어요. 아내가 많이 힘들어 보였죠. 그날 밤에 잠을 자는데 신음소리가 나더라고요. 119를 불러 아내를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아이가 유산된 거였어요. 아내가 말을 안 해서 그때까지도 임신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죠. 파업을 앞둔 남편에게, 해고된 남편에게 차마 이야기를 꺼내기 힘들었었나봐요…."

큰 상처를 겪기도 했지만 당시 형편도 너무 어려웠다. 당시 노조로부터 받은 희생자 구제기금은 50만원. 당뇨와 고혈압 등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장모님을 모시고 사는 최 전 지부장으로서는 갑자기 들이닥친 생활고에 노조활동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9월 중순, 대전차량지부장을 공식 사퇴하고, 주로 가정생활에 힘을 쏟았다. 장모님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막노동까지 했다. 그러던 중, 철도해고자들이 가만 있을 게 아니라 복직투쟁을 해야 한다며, 2004년 1월 철도해고자원직복직투쟁위원회를 설립했다. 그해 12월30일 철도해고자들은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서울역 농성을 시작했고, 최 전 지부장도 1월4일 농성대오에 합류해 지금까지 철해투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최 전 지부장은 "6·28 파업을 정부나 사쪽은 불법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 파업으로 정부의 일방적인 민영화를 막아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철도공사로 출범한 지금도 공공할인이 축소되고, 외주화가 확대되는데, 민영화가 됐다면 과연 공공철도라는 말이 존재했을까요? 우리 투쟁의 정당성은 이후에도 역사 속에서 평가받을 수 있는 명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현장조합원들도 일방적인 민영화 막아내고 민주노조를 만들어내면서 노동자가 단결하고, 투쟁해야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느꼈고요. 67명 전원이 원직복직될 때까지 끝까지 싸울랍니다."

"해고자 문제가 곧 철도 공공성 문제"

이번 철도노조 정기단협 요구사항에 해고자 복직 항목도 들어 있지만 철도상업화 중단 및 공공성 강화 요구 역시 해고자들과 관련이 깊다. 철도에서 해고자들이 발생한 것도 철도의 민영화 저지와 노정 합의를 이행하라는 철도의 공공성 강화 투쟁 과정에서 빚어졌기 때문이다.

2003년 6·28 파업은 법원에서 정부책임을 60%로 인정했다. 철해투는 60% 책임을 가진 정부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철도노조만 그 책임을 다 떠안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진정한 책임 분배가 이루어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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