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이었던가, 영등포 민주노총 사무실에 갔다가 인상적인 풍경을 보았다. 그 앞 근린공원에서 한 노조 간부가 인라인스케이트를 신은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걸어보려 하지만 잘 안되는지, 나뭇가지를 잡은 채 두 발은 연신 공회전을 하고 있는 모양새가 재밌어 한참을 구경하다 자리를 떴다.

그때 난 갖고 있던 디지털카메라로 그 풍경을 담기까지 했다. 일상의 작은 행복을 놓치지 않는 노동운동가의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해주고 싶었고, 소중한 순간을 간직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사진은 보내주지 못했다. 계절이 바뀌고 그 사진의 모델은 민주노총 비대위 위원장으로 이름표를 바꾸어 달았다. 삭발한 머리와 푸석한 얼굴을 언론보도에서 접할 때, 난 ‘그대 다시는 인라인스케이트를 타지 못하리’ 같은 조잡스러운 표제를 창작해가며, 그가 잃어버렸을 평화를 안타까워했다.

내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 가운데는 나의 직업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아이들 얘기, 남편 얘기, 아파트 값이며, 쇼핑, 취미로 하는 볼링 얘기까지…. 나누어 주는 이들에게 내 직장은 너무도 이상한 나라이다. 예전에는 단체 이름, 하는 일, 중요성 등을 또박또박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많은 친구들이 입을 닫아버렸다.

그런 경험을 몇 차례 한 이후로는 생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나누며 교류하는 이들과는 일 얘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고나 할까.

조합원으로, 간부로, 활동가로 이름지우고 살아가지만,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고,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상처받고, 위로받는 개인으로서의 존재감 역시 깊고도 무겁다.

그래서일까? 여기 <매일노동뉴스>에 오르내리는, ‘사생결단, 구속결단, 죽기를 각오하고’ 같은 말들이 무섭다. 십수년을 써왔고, 봐왔지만 낯이 설다.

우리가 쓰는 ‘말’들이 좀 가벼워졌으면 좋겠다.

오늘자 일간지들은 ‘월소득 300만원 이하면 15만원 보조’라는 제목 아래 정부의 보육료 지원이 늘어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아이가 있거나, 아이를 가질 계획이 있는 이들, 노동자들이라면 누구나 꼼꼼하게 챙겨봤을 기사다. 노동언론도, 선전물들도 이런 소식에 민감했으면 좋겠다.

‘비정규직 차별 철폐’ 하자고 글씨 크게 뽑고, 색깔 입혀 나누어주지만 이런 제목은 ‘죽은 말’이다. ‘죽은 말’로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다. 갈빗집에서 서빙하는 아주머니가, 구두공장에서 일하는 청년이, 지나가다가도 되돌아와서 받아갈 수 있는 선전물을 만들 수 있어야 노동운동에 새싹이 돋지 않겠나.

선전문구 하나를 제대로 뽑기 위해서라도 경제사회적 문제에 민감해져야 한다. 문화, 문화 현상에도 안테나를 세워야 한다. 구속, 수배 몇회를 자랑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경제사회적 문제를 노동대중의 언어로 재구성할 수 없는 무능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붉은 머리띠에 힘을 받아 투쟁결의를 목 놓아 외치는 것은 외려 쉬울 수 있다. 노조 없는 작은 공장에 찾아가 온정 없는 박대 속에서도 희망을 갈구하는 진심을 알아차리는 것보다는.

양극화시대, 노동자계급의 대다수는 생활인으로서, 가장으로서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집단 속에 숨어 연대투쟁을 되뇌이는 운동가보다, 노동자 개인의 삶의 버거움을 ‘살아있는 말’로 불러내기 위해 민감한 촉수를 키우는 노동운동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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