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부터 퇴직연금제도가 시행됐다. 당시 양대노총은 퇴직연금 수탁기관을 증권사 등으로 넓히는 것과 관련 노동자의 땀의 대가인 퇴직금을 증권 경기 부양에 돌리려 하는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표시한 바 있다.

오래동안 생명보험업계에 몸담고 자신이 직접 퇴직금 수탁영업을 했던 조규선 전 동부생명노조 위원장이 <매일노동뉴스>에 퇴직연금제도 시행에 따라 노동조합이 고민해야 할 사항들을 글로 보내왔다. 조 전 위원장은 1998년 동부생명 노조위원장에 당선된 뒤 곧바로 해고돼, 이후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사무금융연맹 조직국장 및 연대사업국장을 맡았고,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민주노동당 서울시 노원구위원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했으며, 2002년 지방선거에서는 서울시의원후보로 노원구에서 출마한 바 있다. 현재 노원자치시민연대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편집자 주>




1. 퇴직금의 성격

1) 현행 퇴직금제도

퇴직금(退職金, retirement pay)이라는 것은 고용관계의 소멸 시에 사용자 또는 퇴직금관리기구가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금액을 말한다. 퇴직 시에 노동자가 받아야 할 돈이지만 퇴직금의 발생 근원은 근로기준법상 당연히 발생하는 금원이기에 노동자 개개인에게 그 소유권이 있는 것이며, 단지 사측에서 위탁관리하다가 노동자가 퇴직 시에 지급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퇴직금의 명칭으로는 퇴직금 외에 퇴직수당, 해고수당, 퇴직위로금, 퇴직공로보상금, 퇴직연금 등이 있다. 현재 퇴직금과 관련된 제도로는 퇴직보험, 퇴직신탁, 퇴직연금 등이 있다.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한 국가에서는 노동자가 실직하면 실업보험(?業保險)에 의해 실업수당을 받게 되며 별도로 사용자에 의하여 기업연금 또는 퇴직수당을 받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공무원·군인·사립학교교직원 등은 각각의 특별법에 의해 연금제도의 적용을 받으며, 그외 대부분의 노동자는 근로기준법에 의해서 퇴직금을 받고 있다.

퇴직근로자에게 지급되는 퇴직금은 법령퇴직금과 임의퇴직금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근로기준법 제34조(퇴직급여제도)는 “사용자가 퇴직하는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퇴직급여 제도에 관하여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 정하는 바에 따른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제8조(퇴직금제도의 설정) ①항에서 “퇴직금제도를 설정하고자 하는 사용자는 계속근로기간 1년에 대하여 30일분 이상의 평균임금을 퇴직금으로 퇴직하는 근로자에게 지급할 수 있는 제도를 설정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②항에서는 “제1항의 규정에 불구하고 사용자는 근로자의 요구가 있는 경우에는 근로자가 퇴직하기 전에 당해 근로자가 계속 근로한 기간에 대한 퇴직금을 미리 정산하여 지급할 수 있다. 이 경우 미리 정산하여 지급한 후의 퇴직금산정을 위한 계속 근로기간은 정산시점부터 새로이 기산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법에서 규정한 최소한인 '1년 근속에 30일분의 평균임금'이 곧 법령퇴직금이며, 그 이상을 지급하는 경우는 상관이 없고 그 부분은 임의퇴직금이 된다.

2) 퇴직금제도의 유래

세계적으로 법에 의하여 퇴직금 지급이 규정된 나라는 많지 않으며, 한국은 법령퇴직금제도가 확립된 소수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의 퇴직금제도의 기원을 조선시대의 특덕제도(特德制度)에서 찾으려는 견해가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으며, 오히려 1936년 일본에서 제정·실시되었던 퇴직적립금 및 퇴직수당법의 영향으로 보려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 기원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1953년에 최초로 제정된 근로기준법 제28조에 "사용자가 근로자를 해고할 경우에는 30일분 이상의 평균임금을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한다. 2년 이상 계속 근무한 근로자에 대해서는 계속근로연수 1년에 대하여 30일씩을, 계속근로연수 10년 이상인 때에는 10년을 넘는 1년에 대하여 60일씩을 전항 일수에 가산해야 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사용자에게 퇴직금 지급업무를 부과했을 뿐만 아니라 10년 이상의 장기근속자에 대한 누가제(累加制)를 법정화했다.

구(舊) 근로기준법의 퇴직금규정은 1961년 노동관계법의 대대적 개편과정에서 누가제(누진제)를 없애고 현행 규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구법에 의거해 국영기업체를 위시한 많은 기업에서 퇴직금누진제(退職金累進制)를 실시해 왔기 때문에 법정 최소한을 넘는 임의퇴직금을 지급하는 관계는 지속되고 있다. 퇴직금누진제 또는 임의퇴직금은 사용자의 인사·노무관리적 목적으로 사규(社規)에서 정해지기도 하지만, 노사간의 단체교섭에 의해 단체협약에 포함되기도 한다.

3) 퇴직금의 성격

기업의 연륜이 쌓이면서 장기근속의 퇴직자가 많아짐에 따라 기업의 퇴직금 부담이 급증하게 되자 1960년대에는 국영기업 등의 퇴직금누진제를 완화했고, 1970년대초부터는 민간기업에서도 누진제의 폐지 또는 완화가 시도되었다.

1980년대초에는 기업의 퇴직금 적립이 부실하다는 근로자단체의 비판이 있었고 사용자단체에서는 퇴직금 중간정산을 허용하고 법령퇴직금을 임의화 하는 근본적인 제도개편을 주장하여 1차례 퇴직금논쟁이 붙기도 했다.

이 논쟁은 퇴직금의 성격에 대한 견해 차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퇴직금은 평소 임금으로 분배되어야 할 부분의 지불이 유보되었다가 퇴직시 지급되는 것이라는 임금후불설(賃金後拂說)과, 기업이윤의 일부를 근로자의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퇴직 시 지급하는 은혜적 지출이라는 공로보상설(功勞報償說)이 그것이다. 따라서 법령퇴직금이 존속되어야 한다는 근로자의 주장과 임의화되어야 한다는 사용자의 주장이 맞서게 되었다.

결국 임의퇴직금의 경우에는 공로보상의 성격이 뚜렷하지만 법령퇴직금은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지 못하거나 미비된 상태에서 퇴직근로자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되었던 임금지불의 성격이 짙으므로 한국의 법령퇴직금은 이에 대체되는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될 때까지 존속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쪽으로 기울어 법령퇴직금제도는 그대로 존속되었다.

다만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법이 개정되어 기업들이 근로자의 요구가 있을 시 퇴직금을 미리 정산(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2항 : 퇴직금 중간정산제도)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각 기업들이 비용절감을 위해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퇴직금을 중간에 정산하거나 근로자를 피보험자 또는 수익자로 하는 퇴직보험(보험사예치) 및 퇴직신탁(은행권예치)에 가입하는 등 기업의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퇴직금제도가 변하고 있다.

공무원·군인 및 사립학교교직원 등 특수직을 제외한 일반근로자에 대해서도 1988년부터 국민연금제도가 실시되기 시작했는데 국민연금법에서는 1993년부터 퇴직금의 일부를 연금에 흡수하도록 되어 있다.

이후 2004년 양대노총의 퇴직연금 도입 저지에도 불구하고 노동부와 정부의 강력한 도입 추진으로 2004년 9월 입법예고 되어 12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1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어 2005년 12월1일부로 퇴직연금이 도입됐다. 2006년 1월 현재 중소기업 극히 일부의 사업장에서 이를 도입하고 있다.


2. 현행 퇴직금제도의 운영실태

1) 퇴직보험의 운영 실태

현재 시행되고 있는 퇴직금제도를 기업의 실정에 맞게 운영하는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기업의 운전자금 부족으로 인해 실질적인 퇴직금의 적립을 할 수 없어 퇴직자 발생 시 그때 그때 자금을 마련하여 퇴직금을 주는 페이퍼상의 퇴직급여충당금 설정 업체이다. 대부분의 중소기업이나 자금여력이 부족한 기업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둘째, 실질적으로 퇴직급여충당금을 쌓아두고 그 중 일부를 사외에 퇴직보험(신탁)으로 예치하여 손비인정을 받으며 퇴직자가 발생할 때 충당금의 일부와 퇴직보험(신탁)에 예치된 금액 일부를 합해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경우이다. 자금 여력이 있는 중소기업이나 대기업, 일부 공기업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 퇴직급여충당금을 설정 및 예치해 두고는 있으나 타 공기업과 비교했을 때 복지수준이 뒤쳐져있어 그 충당금의 일정 부분을 근로자 복지재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이며, 수익사업이 많지 않은 정부출연기관 등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노동자들의 퇴직금의 안전한 보장과 객관적인 퇴직금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1977년 12월13일 종업원퇴직적립보험(99년 이후 퇴직보험으로 명칭 변경)이라는 상품이 생명보험사에 의해 처음으로 판매되었다.

노동자들 측면에서는 퇴직금의 일부를 사외에 예치함으로서 회사의 도산시 객관적인 퇴직금의 보장이라는 이점과, 기업측면에서는 사외예치금에 따라 회사의 손비인정을 해 줌으로서 법인세절감이라는 효과가 있어 회사경영진의 의사에 따라 사외예치를 하는 실정이었다.

또다른 측면에서는 편법이기는 하지만 회사자금 조달의 한 방편으로서 실질적인 자금의 유출없이 손비인정을 받는 '꺾기성' 퇴직보험(예를 들어 퇴직보험을 5억 가입하고 10억, 15억을 대출받음)에 가입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그러다 이런 편법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부채비율이 워낙 높아 도산하는 기업이 많이 발생함으로서 꺾기성 퇴직보험은 대부분 사라지고 순수한 측면에서의 퇴직보험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후 손해보험사와 은행권의 끈질긴 시장개방 요구에 의해 손해보험사는 1999년부터 퇴직보험을, 은행권은 2000년부터 퇴직신탁을 판매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됨으로써 현재 보험업종(생명보험, 손해보험)의 퇴직보험과 은행권의 퇴직신탁으로 대별된다.

2) 금융기관별 퇴직보험(신탁) 자산규모

2005년 11월말 현재 퇴직보험 및 퇴직신탁에 가입한 규모(사외예치된 금액기준)는 전체 20조원 가량에 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업이 12월 결산시점에서 퇴직보험, 퇴직신탁에 일시납 형태로 가입함에 따라 2005년 12월말 기준으로 추산한다면 25조원 내외로 추정된다.

2005년 11월말 생명보험협회, 손해보험협회, 은행연합회의 통계자료에 따라 20조원 가량의 퇴직금 자산을 각 금융기관별로 구분해보면 생명보험의 퇴직보험 자산총액(확정형, 연동형 합계)은 14조5천여억원, 손해보험사의 총액은 1조4천여억원, 은행권의 총액은 3조1천억원 정도이다.

이중 무노조를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노조탄압의 대명사로, 최근에는 X파일, 세금포탈, 변칙증여 등으로 세간의 화재가 된 바 있는 S그룹의 계열사인 S생명·S화재에 6조5천여억원이 예치되어 있으며, 노조는 인정하되 건강한 노조는 아예 노조를 말살하는 국회 돈봉투 사건의 주범이었던 D그룹의 계열사인 D생명·D화재에 예치되어 있는 적립금 총액은 5천여억원에 달한다.

2005년 11월말 기준 퇴직보험(신탁) 예치금 20조원 중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있는 대표적인 그룹의 금융계열사에 평생을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의 퇴직금의 무려 35%에 이르는 7조원이 예치되고 있으며, 은행권을 제외하고 본다면 17조원 중 무려 41%에 이르는 7조원이 예치되어 있으니 이를 노동계에서는 과연 어떻게 보아야할 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좀 과도하게 이야기한다면 민주노조운동이 무노조나 노조탄압을 마치 밥 먹듯이 자행하고 있는 자본가들에게 노동자를 탄압할 수 있는 물적토대(자본)를 제공하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을 분석해 본다면 대부분의 노동조합이 지금까지 경영참가에 적극적이지 못하며 조합원들의 고용안정이나 복지, 임금부분에만 집중하였던 노동운동 관행, 노동조합에서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못하도록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법제도의 문제, 노동조합의 무관심 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한 노동계의 적극적인 대응이나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3. 퇴직연금제도의 도입 전망 및 시장 전망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양대노총의 도입 저지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도입을 추진한 퇴직연금의 경우 2005년 12월1일자로 법안이 발효되었다. 처음 도입되는 제도이다 보니 대부분의 기업들이 관망하는 자세이며, 또한 기존에 가입된 퇴직보험이나 퇴직신탁에 대해 법에서 5년간의 유예기간을 주고 있어 현재로서는 사외에 예치된 퇴직금의 경우에는 타 기업들의 움직임을 보며 신중히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법에서 2006월 1월 이후 신규로 퇴직보험이나 퇴직신탁에 가입할 수 없게 함으로써 자금 여력이 있거나 향후 몇년 내에 퇴직보험(신탁)을 가입할 의사가 있었던 기업들은 2005년 말에 서둘러 기존의 상품에 가입하여 퇴직연금으로의 가입은 일단 5년간 유예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억지로 도입한 퇴직연금의 실적이 저조할 경우 정부로서는 재계나 노동계로부터 지탄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정부에서 궁리 끝에 정부의 입김에서 완전하게는 자유로울 수 없는 정부투자기관이나, 출연기관, 출자기관, 연구원 등에 기획예산처를 앞세워 “퇴직연금의 도입 여부를 경영평가에 반영하겠다”라고 하며 으름짱을 놓고 있어 공기업과 기획예산처 간에 일전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퇴직보험(신탁)이나 퇴직연금의 경우 기업의 도산 시 노동자들의 퇴직금을 안전하게 확보하려는 제도임에도 실질적으로 퇴직금의 안전한 보장이 절실한 중소기업들의 경우에는 경기하락으로 인해 기업경영이 어려운 마당에 기업의 운영자금이 정기적, 장기적으로 사외로 유출되어 오히려 퇴직금을 보장하려다가 기업의 도산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어 퇴직보험(신탁)이나 퇴직연금에 가입하고 싶어도 가입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퇴직금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대안이 정부 차원에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향후 5년간의 유예기간이 있기는 하지만 5년 후에는 퇴직보험(신탁)의 경우 퇴직연금으로 일원화 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자금의 규모가 각 기관이나 언론에 따라 조금씩 예측치가 다르기는 하지만 10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 입법되면서 퇴직연금을 취급할 수 있는 금융기관을 대폭 늘여 2005년 12월 전까지 생명보험사, 손해보험사, 은행 등에만 개방되었던 문호를 증권사, 투자신탁운용사까지 넓힘으로써 100여조에 달하는 퇴직연금시장을 먼저 선점하려는 100여개 각 금융기관들의 각축전이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과연 노동계에서는 이 연금제도에 대해 어떻게 접근을 할 것인가?

4. 노동계의 퇴직연금에 대한 접근

IMF라는 전대미문의 외환위기로 인해 경제 내외적인 환경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무수히 많은 부분이 변화되었고 그 변화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먼저 부정적인 측면에서 노동자들에게는 직장의 퇴출, 구조조정 등으로 인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고 직장에 붙어 있다 하더라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시적인 고용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평생을 일만 열심히 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는 해고통보는 생물학적인 목숨은 살아있을지 모르나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노동자 사망선고나 다름이 없다.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 등 참으로 입에 담기조차 싫은, 하지만 그렇다고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용어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필자 또한 D생명의 노조위원장으로 그룹 회장의 무식한 횡포에 맞서다 해고된 경험이 있다.

또한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미명 하에 진행된 비정규직의 양산은 현재 전체 노동자의 60%에 이르도록 뚜렷한 보호책 하나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진행되었다.

다음으로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기업의 문어발식 경영이나 외형중심의 성장경영에서 탈피하여 기업의 재무건전성을 중시하는 기업경영 풍토로 바뀌는 뼈아픈 교훈 등이 그것이다.

하여, 이제는 금융기관의 경우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 금융기관들이 자체적으로 각종의 지표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시장에서 요구하는 금융기관들의 특별한 충분조건을 채우지 못하면 스스로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다. 즉 은행의 경우 BIS비율이라든가 보험사의 경우 지급여력비율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노동계에서는 이 연금제도에 대해 어떻게 접근을 할 것인가?

기업의 재무건전성이 좋거나 흑자를 많이 내는 기업, 도산의 위험이 거의 없는 공기업 등을 중심으로 현재 가입되어 있는 퇴직보험이나 퇴직신탁의 경우 노사가 합의하에 퇴직금을 맡길 수탁기관을 선정하거나, 아니면 퇴직금의 실질적인 소유권을 갖고 있는 개별 노동자에게 의견을 물어 수탁기관을 선정하는 등의 흔적은 어느 기업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노동조합의 활동이 좀 건강하다고 하는 기업의 경우에도 사측에서 수탁기관과 예치금액을 미리 정해놓고 노동조합 위원장에게 형식적으로 동의를 구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렇다면 사측에서는 과연 어떠한 기준으로 수탁기관을 정할까? 이에 대한 노동조합의 답변은 아마 없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필자가 D생명보험에서 7년여 동안 종업원퇴직적립보험 영업활동을 할 때에는 그 영업활동의 주 임무가 최고경영진의 프로필 파악이었다.

예를 들면 A기업의 경우 회사의 전반적인 경영 상태는 전년도의 감사보고서나 경영평가 자료를 통해 미리 알아본 다음 퇴직보험을 가입할 여력이 있음에도 가입하지 않았거나, 타 보험사에 가입되어 있을 때 실무자들을 상시적으로 만나는 가운데 최고경영자의 출생지, 생년월일, 출신고교, 출신대학 및 전공, 취미, 자택 등을 알아본 이후 회사로 돌아와 보고서를 작성할 때 그 회사의 최고의사결정자의 고교동기, 대학동기를 그룹의 부서장급 이상의 명단과 대조하여 어느 계열사 전무와 고교 동기동창이라든가, 아니면 어느 계열사의 사장과 대학 동기동창이라는 등의 보고서를 작성하면 법인영업 담당임원은 그 계열사의 임원과 만나 A기업의 최고경영자를 얼마만큼 잘 아는지 파악하여 지원요청을 하고 몇번의 접대를 한 후 연말에 퇴직보험을 인수하는, 그런 영업이 대부분이었다.

자금 대출을 전제조건으로 한 퇴직보험이 아니고서는 지금은 시장 상황이 많이 변해 아예 대출을 받기 위한 퇴직보험 가입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거 난립하던 보험사도 많이 구조조정된 가운데 나름대로 지급여력비율이나 BIS비율 등 경영여건이 비슷비슷하다고 할 때 수탁기관의 선정에 있어 어떤 항목이 가장 우선 고려사항일까?

아마 아직까지도 회사의 경영진의 학연이나 지연 등 연고에 의한 가입이 가장 많을 것임은 분명하다. 아직도 사측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한 보험사에서는 단 한푼이라도 더 예치하려고 경쟁을 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과거보다 더욱 은밀해진 대가가 오가는 가운데 사측에서 예치기관을 선정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가져간다”고 상시적인 고용불안 속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묵묵히 일한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상 당연히 발생하는 퇴직금을 사측에서는 퇴직보험에 가입함으로서 손비인정을 받아 세금까지 절약하고 보험사로부터 각종의 혜택을 보고 있었는데, 과연 노동조합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맨날 머리띠만 묶고 있었는가?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에서는 분명히 퇴직보험(신탁)과 퇴직연금에 대한 중장기적 대원칙을 밝혀야 한다.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노동계 내부의 돈과 관련된 비리는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히 응징하고, 각 산별연맹에서 집중 토론하여 가능하면 노동자와 함께 하려는 기업에, 그러한 기업이 없을 경우엔 어차피 가입할 퇴직보험(신탁), 퇴직연금이라면 조금이라도 노동조합을, 노동자를 덜 탄압하는 금융기관에, 비정규직을 덜 사용하는 금융기관에 예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최근 양대노총의 비리와 관련하여 진보진영의 수많은 곳에 유탄이 날아와 동반 추락하는 일까지 있지 않았는가? 당연히 관여하여야 할 것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손을 대지 않아야 할 것엔 덥석 손을 내밀어 얼마나 많은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었는가? 아니 국민들은 그러려니 했을지도 모른다.

이러고서 민주노조라고, 세상을 바꾸자고 감히 누구에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이러고서 국민들에게, 노동자에게 과연 희망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가 아니면 노동계 내부뿐 아니라 세상까지도 바꿀 주역은 아무도 없다. 20대80의 사회라고 과거 노동운동을 할 당시에 이야기했으나, 이제는 10대90의 사회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점점 좁혀만 가는 노동자들의 입지를 과연 누가 있어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이며 과연 누가 있어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 줄 것인가?

이제는 사소하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당장 퇴직금이 떼이지도 않는데 등등의 생각은 집어치우고 작더라도 조금만 노력하면 거대한 자본과 맞설 힘이 조금씩 쌓이는 이러한 명분있는 싸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 발효되면서 법 12조 및 13조에서 “… 사용자는 근로자대표의 동의를 얻어 … 노동부장관에게 신고하여야 한다”라고 명시함으로서, 또한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퇴직금의 발생근원 및 궁극적인 소유권이 개별 노동자에게 있음으로 인해 누구에게나 물어보더라도 노동조합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므로 당연히 그 역할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입장을 분명히 듣고 싶다. 더 깊게 들어간다면 노동자들의 퇴직금을 기초 재원으로 하는 여러가지 사업 - 재정사업(협동조합, 은행 등의 설립이나 금융기관의 인수 등) - 등을 다방면에서 검토해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5. 마무리

이상에서 퇴직금의 성격, 현행 퇴직금제도의 운영실태, 퇴직연금제도의 도입 전망 및 시장 전망, 노동계의 퇴직연금에 대한 접근 등에 대해 기술하였다.

2004년말 노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강력한 추진으로 도입된 퇴직연금제도(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가 1년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2005년 12월1일부로 도입된 이후 금융기관이나 사측에서는 관심이 많으나 아직은 각 노동조합들의 적극적인 모색은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공기업에 대한 정부(기획예산처)의 경영평가 압박으로 우선적으로 공기업에서 먼저 반응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어느 공기업이든 퇴직연금으로 전환하여 운영하다 보면 실질적인 장단점, 유불리가 어느 정도 보이면 그 다음 순서로 사기업체들도 어떤 형식으로든 대응을 할 것이며, 더구나 유예기간이 만료되는 2010년 전에까지는 나름대로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확정급여형(DB, Defined Benefit), 확정기여형(DC, Defined Contribution)이니 하는 상품을 떠나 어떤 식으로든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노동자들의 퇴직금을 안전하고 내실있게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자임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노동운동의 큰 흐름 속에서 제도적으로 노동조합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100조원대의 퇴직연금 밥상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굳이 엎을 필요는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이제라도 개별 노동조합이, 양대노총이 앞장서서 금융시장의 구도를 바꿀 엄청난 규모의 퇴직금, 퇴직연금제도에 대해 전반적인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노동운동을 하는 노동조합에서는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대원칙을 정하여 반노동자적인 재벌에게는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이제는 한번만이라도, 그것도 제대로 한번은 보여줄 필요가 있다. 노동자는 “한번 한다면 한다”라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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