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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중채무자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 류정순 한국빈곤문제연구소 소장
  • 승인 2006.01.26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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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22일 노량진의 백ㅇㅇ(27세)씨가 장애인 형과 어머니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일어났다. 사업실패로 과중채무자(옛신용불량자)가 된 아버지가 자살한 뒤 어머니가 운영해오던 제과점마저 문을 닫고 빚더미 위에 앉게 되자, 어머니가 둘째아들에게 형과 자신을 죽인 후, 너도 죽으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이 땅의 과중채무자 가족의 삶이다.

▲ 류정순 한국빈곤문제 연구소 소장.
2004년 3월 392만명이던 과중채무자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워크아웃, 배드뱅크, 개인회생, 개인파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부채상환유예 등의 지원제도를 통하여 구제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292만명이 빚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2000년대 초 신용대란 시기에 생긴 생계형 장기과중채무자들이다. 이들은 고정소득이 없거나 적기 때문에 원금 탕감이 없는 사적 신용회복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없고, 150~200만원 정도의 법률서비스 비용이 필요한 개인회생이나 개인파산도 돈이 없어서 신청하지 못하는 딱하디 딱한 사람들이다.

한국은행은 실제 파산했지만 파산신청을 하지 않은 비공식 파산자가 최대 112만명에 이르고 파산신청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낫지만 재기의 의지를 상실한 채 그냥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는 잠재 파산자만도 최대 12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과중채무자들은 재기를 위해 몸부림쳐도 빚의 굴레를 벗을 수 없는 금융시장 배제자일 뿐만 아니라 과중채무로 인하여 노동시장에서마저 배제되어 재기할 희망을 잃은, 총체적 삶의 배제자들이자 대표적인 신빈곤층이다. 이와 같이 양극화의 끝자락에 빈곤의 나락에 떨어져 있는 과중채무자 가족들은 평균 한 가구의 가구원수가 3.14명임을 감안할 때 아직도 917만명이나 된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자살율은 IMF 이전보다 4배나 증가되었고, OECD 가입국 중 자살율 1등 국가가 되었다.

이들은 도덕적 해이가 문제되는 변제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극한상황에 내몰린 절망의 빈곤층으로서 가출하거나 이혼한 사람이 많다. 가족해체는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고 자라지 못하는 아이들을 양산시켜 빈곤을 대물림시키고 있다. 그리고 결손가정에서 자란 아이→비행청소년→성인범죄자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과중채무자의 장기적 방치는 장기적인 후유증을 남기고 일반 시민들의 삶을 위협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2000년대 초 신용대란 시기에 대량으로 발생하여 장기과중채무자로 침전된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고학력자들로서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제공하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산업역군으로 활용 가능한 인적자원이다. 이들을 사회적으로 배제시키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자 장기적 성장기반 침식의 요인임에 틀림이 없다.

고도의 자본주의가 발달한 선진국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수준이 높기 때문에 금융시장 퇴출 상태에 있는 과중채무자에게 파산-면책을 통한 패자부활전의 통로를 크게 열어 놓고 있다. 연간 파산-면책을 통하여 패자부활전에 나서는 과중채무자의 수는 미국 170만명, 일본 20만명에 달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특징은 진입과 퇴출이 자유로운 것이 아닌가? 왜 우리는 이들이 패자부활전에 참여하여 다시 서기를 할 기회를 박탈한 채 자살, 타살, 범죄 및 지하경제활동으로 내몰아서 사회적 위험계층을 양산하고 있는가?

선진국의 경우에는 채무자 조정, 법률서비스 제공 등을 중립성과 독립성이 확실한 시민단체들이 주로 맡고 있는데 대표적인 기관이 미국의 CCCS(소비자신용상담기구)와 영국의 CAB(소비자지원기구)이다. 이에 비하여 한국은 신용회복위원, 한마음금융와 같은 금융기관들이 연합하여 만든 채권자연합 공동채무조정기관을 통하여 하고 있다. 이는 검사만 있고 변호사는 없는 것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채무조정이 소비자에게 불리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한편, 법원에서 시행하는 파산개인회생 신청자의 70%가 변호사, 법무사, 브로커, 온라인 정보회사 등의 법률시장 장사치들에게 대행료를 지불했다고 하는데, 이를 총액으로 환산하면 ‘천억원대의 법률시장’이 형성된 셈이다. ‘거지되었다’고 신고하는데 법률서비스 장사치들의 배를 불려 주어야 하는 현행 제도는 대단히 소득역분배적이자 과중채무자들 중에서도 더욱더 절박한 생존의 벼랑 끝에선 불쌍한 채무자들의 재기를 가로막는 나쁜 제도로서 잘못되어도 많이 잘못되었다.

국제적 표준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시민단체들이 무료로 금융소외계층을 위한 소비자교육, 제도안내, 신용상담, 법률상담, 채무조정, 서류작성 검토 및 대행 등의 도움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상황은 주로 당사자들로 구성된 시민단체들마저도 재정이 열악하여 과중채무자들에게 지원을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소액이나마 돈을 받고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을 지원하여 무료 법률서비스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과중채무자의 패자부활을 가능케 하는 길이다.

류정순 한국빈곤문제연구소 소장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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