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기, 남북의 치열한 체제경쟁 속에 북에서 남으로 온 사람들, 우리는 이들을 ‘귀순용사’라 불렀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사정은 달라졌다. 북한의 식량난으로 이탈주민이 급증한 뒤에는 그들은 이제 ‘탈북자’로 불린다. 북한이탈주민을 일컫는 ‘탈북자’. 그 부정적이고, 거부감을 주는 용어를 정부는 지난해부터 ‘새터민’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새터민은 ‘새로운 터전에서 삶의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통일부가 지난해 연말 발표한 ‘남북사회문화교류 인도사업 분야 2005 1년, 6·15 5년간 성과’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말 현재 입국자는 1,217명으로, 2002년 이후 지속적으로 1천여명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표 참조>

새터민(북한이탈주민) 입국현황(05.11월말, 출처 : 통일부)
구분’89까지’90’91’92’93’94’95’96’97’98’99’00’01’02’03’04’05합계사망
이민등
국내
거주
인원607 998852415686711483125831,1391,2811,8941,2177,5212957,226

총 국내거주 인원은 7천2백여명. 이들 새터민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서울지역은 3천여명. 이 가운데 노원구에 800~900여명이 살고 있으며 강서, 양천지역은 1,100~1,200여명으로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이 지역에 영구임대아파트가 많기 때문이다. 새터민들은 입국한 뒤 하나원을 거쳐 영구임대아파트를 배정받아 살게 된다.

1월20일 저녁, 새터민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 강서구 가양동 한 임대아파트 단지를 찾았다. “이 단지에만 약 400여명이 살고 있습니다.” 동행한 열린사회시민연합 소속 강서양천시민회의 변광영 사무국장은 신변보장을 위해 사진을 찍지 말 것을 요청했다. 한 아파트 단지의 벨을 눌렀다. 간간이 들리는 이북사투리만이 그들이 ‘새터민’임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조국통일 한다면서 차별의식이 꽉 차 있단 말입네다”

40대 후반의 장정일(가명)씨는 1997년경 북에서 가족과 함께 탈출했다.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하니 ‘직접 도와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한국측의 냉담한 반응에 그는 첫 좌절을 맛봐야 했다. 그는 2004년 한국에 오기 전까지 중국 서부지역에서 자영업 등을 하며 7년여를 살았다. “한번은 (한국) 영사관 문을 밀어 제치고 들어갔는데 바로 쫓겨났습니다.” 중국 감옥에 갇혀 북송될 위기였다. 다행히 교회, 인권단체 등 지인의 도움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아내의 정신분열증이 재발하지 않았으면 차라리 중국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한국은 그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2년여 전 한국으로 오게 된 장씨. 그는 최근 병원의 세탁물 옮기는 일을 시작했다. 보험설계사 일이 한달 30~40만원 벌이밖에 안 되어 밤낮없이 일할 요량이었다. 그래야 고3 수험생과 초등학교 4학년 자식들 공부시키고, 병중인 아내의 치료비도 댈 수 있기에. 하지만 장씨는 며칠 안 돼 일을 그만두었다. “힘은 부치지만 일 없단 말입니다.” ‘일 없다’는 말은 ‘괜찮았다’는 이북식 표현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20만 킬로미터를 달린 거의 폐차 수준의 차량. 시속 80킬로미터 속도를 겨우내는 차량으로는 십수어 곳의 병원을 돌기에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지입권리세’를 포함해 1,700만원에 그 차량을 인수하라는 소개소(대행업체)의 횡포까지 장씨를 괴롭혔다. “그 많은 돈도 없을 뿐 더러 수리비가 엄두가 안나 못사겠다고 하고 관뒀지요.”

장씨는 대한민국에서 원래 살고 있는 이들도 힘든데, 탈북자라고 하면 사장들이 안 쓰려고 한다며 탄식을 쏟아냈다. “안정된 일자리, 그건 뭐. 찾기도 어렵고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북에서 대학을 나왔거나 의사를 했어도 인정해주지 않는 남쪽의 현실. “목숨을 내던지고 사지를 넘어 오는데 자격증을 개지고 나오나요?” 이웃에 살고 있다는 60대 대학교수 출신의 탈북자는 경비일이라도 하길 원하지만 일거리가 없다고 했다.

여자들은 식당에서 일을 할 수가 있어 조금 낫다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그만둬야 하는 상황도 종종 생긴다는 것. “말로는 탈북자가 통일의 주인이라고 말하면서, 조국통일 한다면서도 차별의식이 꽉 차 있단 말입니다.” 그는 심지어 그런 차별의식을 쉽게 깨지 못하겠구나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정부 새터민정책 ‘보호’에서 ‘자립·자활’로

통일부는 지난해 1월부터 새터민 정책을 ‘보호’중심에서 ‘자립·자활’ 중심의 정착지원으로 바꾸었다. 자립의지를 갖춘 새터민에게 장기직업훈련, 자격증 취득, 장기취업 등 각종 자립장려금을 지급한다는 것. 1인당 최고 1,540만원까지 지급한다는 내용이었지만 이전 3,600만원에서 대폭 줄어든 액수였다. 지난해 통일부는 전년도에 견줘 고용지원금 수혜비율이 67%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탈북한 이들은 입국직후에는 사회적응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다양한 취업정보와 현장체험 등 사회적응 프로그램을 2~3개월 동안 받게 된다. 정부는 또 의사, 교사 등 전문직 경력이 있는 새터민이 소정의 보수교육 또는 재교육을 통해, ‘자격인정제도’를 마련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령 개정을 추진 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새터민 청소년의 교육여건을 고려한 특성화학교인 ‘한겨레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새터민 전용 기초직업훈련과정을 마련할 계획이다. 그러나 아이들 교육문제도 중국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 아이들은 교육에서 방치된다. 남쪽의 교과목을 따라가는 것이 힘에 부치는 게 당연할 일이다.

“평상시에 밤샘 공부를 해도 따라가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변 사무국장은 100명 가운데 10명이 대학에 들어가고, 10명 중 1명 정도가 대학을 졸업할 정도라는 설명이다. 그런데도 언론에서는 새터민이 대학에 들어간 얘기만 있을 뿐 중도에 포기하고 나왔다는 얘기는 온데간데 없다.

새터민들은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집만 한 채 달랑 받았을 뿐 먹고 살기 위한 경제활동이 쉽지 않아 보였다. 장씨의 보험설계사 일도 그랬다. 친인척은커녕 생면부지의 사람들 속에서 알음알음 보험 일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북에서 재정금융, 은행과를 다녔는데 남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적응하면서 어려운 것을 묻자 대뜸 “사회주의 경제학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말문을 열었다.

“자본주의는 개인소유라 보니, 층하(부익부빈익빈)와 개인비리가 많이 생기는 겁니다.” 두 체제를 경험해본 장씨는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듯 했다. “탈북자 7천여명 수용도 어려운데 통일되면 어케 함께할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차마 말을 못해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로 돕는 틀이 없이 ‘너는 너, 나는 나’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상황. “인간의 본능은 주체성과 창조성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는 그것이 없으면 사람들의 견해가 바뀌어 간다고 말했다.

군부독재와 싸우며 적을 닮아갔고, 국민교육헌장의 뿌리깊은 ‘국민’ 이데올로기를 체화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북의 정권을 혐오하면서도 ‘주체사상’의 틀은 온전히 벗어나고 있지 못한 듯 보였다.

장씨는 인터뷰 내내 휴대폰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쉴 새 없이 받았다. 절친하게 지내는 이웃이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피해자인 새터민이 가해자가 되어버린 어이없는 일이라는 설명이다. 그 집을 같이 방문했다.

“왜 이리 강짜로 엄포를 놓습니까?”

인근의 한 임대아파트. 두 딸과 아내는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가장이 가해자로 몰릴 처지여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넋을 놓고 있었다.

가족이 한국으로 온 지 몇해. 40대 후반의 경인준(가명)씨는 먹고 살기 위해 식당, 이삿짐, 막노동 등 닥치는 데로 일을 하고 있었다. 지난해 10월 어느날 저녁, 경씨는 새터민 친구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가고 있던 중이었다. 강서사거리에서 버스에 부닥친 경씨는 갈비뼈와 쇄골이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었고, 친구는 즉사했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한달 뒤 경찰은 입원한 경씨의 병원에 찾아와 사건경위 등 조서를 꾸몄다. 경씨는 정신이 없는 상태였고, 경찰은 그 내용을 환자나 가족에게 자세히 알리지도 않은 채 지장을 강제로 찍게 했다.

“왜 이리 강짜로 엄포를 놓습니까?” 아내 김씨는 항의도 했다. 그러나 경찰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서류에 지장을 찍게 했다. “감옥에 가든지 아니면 북한에 다시 가든지.” 경찰이 내지른 말은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남편은 파란불 신호를 보고 출발했다는데, 다친 것도 억울한데 가해자가 되어버린 상황.

아내 김씨는 사고 당시 목격자 등 증인을 찾아야 되는데 남한사회를 모르는 그 자신이 원망스러운 듯했다. 사거리의 교통 감시카메라 녹화분이나 버스안의 감시카메라 등 ‘증거물보전신청’ 등 법적인 처리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대한변협에 변호사 요청도 해봤지만 선임료 500만원을 마련할 형편도 아니었다. “억울할 수 있는데 국선을 하세요.” 변협의 말대로 국선 변호인을 선임해도 믿지를 못하겠고…. 다니던 교회 목사도 바뀌어 실질적인 도움 받기도 어려운 처지. 김씨와 두 딸은 발을 동동 구르며,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공무원들이 탈북자들 우습게 여긴다는 게지.” 인근에 살고 있는 한 탈북자는 분통을 터트렸다. “친절, 봉사를 내세우는 경찰이 말도 거만하고, 병원 밖에서 어찌 환자 가족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모욕을 하고 그래요?”

재산이라고는 정부에서 지원받은 1천만원짜리 임대아파트가 전부. 교통사고 가해자가 된다면 보상은 물론 2천만원 정도의 치료비도 물어야 되고, 거리로 나앉을 판이었다. ‘행복하게 살자!’ 집안 가운데 탁자에 소중히 놓여 있는 가훈이 가슴을 내리친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남행을 결심한 새터민 가족에게 시련은 또 한번 그렇게 찾아왔다.


새터민의 현실과 ‘부정적 선입관’들

지난해 6월 열린사회강서양천시민회가 <시사저널>과 공동으로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강서지역 새터민들은 북에서 고등학교를 졸업(73.7%)하고, 노동자 생활(54.2%)을 하다가 탈북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 나이는 30대가 42.4%로 가장 많았고, 40대가 27.1%, 20대가 17.8%로 그 다음 순이었다.

새터민들 10명 가운데 7명(70.3%)은 무직이었으며, 월평균 수입은 75만원이었다. 이는 희망 수입인 155만원에 견줘 절반 수준이었다. 그마저 이 수입에는 정부가 새터민에게 지원하는 최저생계비 32만원이 포함된 금액이었다. 2004년까지는 남한의 영세민보다 1단계 우대해 20만원 가량을 더 주었지만 지난해부터 정부정책의 변화로 대폭 삭감되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74만원(3인 가족 기준), 직업훈련을 받으면 월 33만원이 지급된다. 1년 기한이다. 새터민들과 지원단체들은 물설고, 낯선 곳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더 오랜 정착기간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새터민들은 남한 사람들을 대할 때 어려운 점으로 ‘새터민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58.5%)이 가장 높았다. 그 뒤로는 남북한의 가치관 차이(46.6%), 남한 사람들의 이기적 행동(20.3%), 남한 사람들의 부정직한 태도(16.1%) 순이었다. 그들은 ‘거지 나라에서 온 사람’ 이주노동자보다 새터민을 더 엎신여기는 듯한 따가운 시선을 곳곳에서 느끼고 있었다.

인근의 새터민들끼리 교류도 거의 없었다. “탈북자들 서로 잘 안 가요. 형제, 친척들이 꼭대기(북)에 있어 서로 노출을 하지 않으려는 입장입니다.” 장씨는 오히려 한국의 지역주민들과 어울리는 것이 부담이 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탈북자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지만 점점 제 먹고 살기도 힘든데 관심 두갔어요?” 그는 오히려 탈북자들이 노래방이나 여자들 술 마시는 등 북에서는 보지 못한 풍경에 호기심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남한사회에 적응하며 제2의 인생을 살려고 하는 새터민들. 이들에 대한 냉대와 멸시가 얼마나 심하게 느껴졌는지 그들은 “이주노동자보다 못한 차별에 시달린다”며 하소연하고 있다.

“이북5도청이니 그런 행사에 이제 다시는 안 갈라고요.” 이용만 당할 뿐 남한사회 정착에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 한번 주지 않는 매정한 손길에 새터민들은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보수진영은 그들의 입맛에 맞게 활용하거나 악용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진보진영은 더이상 외면하지 말고 우리 사회가 떠안아야 할 ‘사회적 약자’로서 봐 줬으면 좋겠습니다.” 열린사회강서양천시민회의 변광영 사무국장은 새터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당부했다.

새터민 정착의 어려움과 의문점?
부산YMCA 새터민지원센터가 지난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부산에 정착한 새터민 10명 가운데 6명이 일상생활에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장 큰 원인은 외래어와 이질적인 표현 등 의사소통의 어려움이었다. 심지어 새터민 14%는 남한사람들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고 호소했다.


또 낯선 환경에서 오는 ‘고독감과 우울감’(15.1%), ‘정보부족’(11.9%) 등도 정착의 어려움으로 나타났다. ‘남한사회의 편견과 차별’(11.1%), ‘비싼 물가’(7.9%), ‘무료함’(5.6%)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반면, 새터민들이 남한 사회적응에 가장 필요한 것은 ‘취업과 관련한 정보’(32.3%)였다. 자신의 적성을 파악해 실질적으로 적응하는 것(23.8%)과 보다 많은 지원금(14.6%), 남한 사회에 대한 기본정보(10.8%) 등 새터민들이 정착을 위해 간절히 원하는 것은 경제적 문제의 해결이었다.


최소 1만명에서 최대 10만명에 이른다는 중국 내 탈북자들. 그들의 유형은 한국에 오려는 사람들보다 중국에 남거나, 돈을 벌어 북으로 돌아가려는 이들이 더 높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강서양천시민회의 지난해 실태조사에서 새터민의 중국체류기간은 2003년 이전 평균 2.89년인데 반해 2004년 이후 입국자는 3.32년으로 길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기획 탈북브로커들이 판을 치면서 중국 내 탈북자들이 더욱 곤경에 빠지는 등 한국행이 여의치 않았던 이유도 있다. 하지만 새터민들이 처음부터 한국에 오려고 북한을 탈출한 게 아닐 것이란 짐작이 가능한 지점이다.


“내 인생을 망가뜨린 놈을 받아주는 한국에는 안 가겠다.”
“중국에서 잘사는 것이 한국에서 못사는 것보다 낫다.”
“돈벌어 조선에 돌아가겠다.”


10여년 중국 내 탈북자들을 심층 추적하고 있는 조천현 월간 <말> 전문기자는 새터민들을 마냥 좋게만 바라 볼 수 없음을 지적했다. “5~6년 전만 하더라도 순수한 접근이었지만 변해버렸어요. 남한사회 새터민들 정착의 어려움을 써주기를 원하는 곳은 오히려 기획탈북단체나 반북단체들일 겁니다.”


이유는 또 있었다. 새터민, 그들의 탈북 동기도 기아 등 북의 체제 문제를 거론하지만 일부에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가 숨겨져 있는 이들도 없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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