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빈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때 우리는 흔히 ‘빈곤의 여성화’ 명제나 ‘빈곤은 여성의 얼굴을 가졌다’는 비유를 인용한다. 빈곤의 여성화는 전체 빈곤인구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높아져간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개념이고, 빈곤이 여성의 얼굴을 가졌다는 말은 전 세계 빈곤인구의 70%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비유한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에는 반드시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인지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함께 따라온다.

빈곤 해결에도 성인지적 관점이 필요한가? 필요하다.

이 말은 빈곤인구 중에 여성부터 지원하라는 말이 아니다. 가난해서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하는데, 그 중에 여자가 더 많으니 여자부터 구하라고 하기에는 논리가 좀 궁색하다. 빈곤 해결에 성인지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가난한 사람 중에 여자가 더 많은 데는 그렇게 된 특별한 원인이 있으니 이 부분을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생계, 나아가서 인간다운 생활의 보장을 가능하게 하는 기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노동(소득활동), 시민권에 기초한 사회보장, 그리고 가족.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가족’이다.

빈곤은 언제나 가족을 단위로 논의된다. 절대빈곤의 선을 긋는 최저생계비도 두 식구일 때 얼마, 세 식구일 때 얼마로 설정되며, 중위소득의 50%로 상대빈곤의 기준을 설정할 때에도 가구소득을 가지고 계산한다. 이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것이다. 누군가가 가난하면 그것은 그의 가족이 모두 가난한 것이지, 식구 중에서 누구는 가난하고 누구는 가난하지 않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등장하는 통계는 여성가구주 가구의 빈곤율과 남성가구주 가구의 빈곤율을 비교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본 한 통계에 따르면 여성가구주 가구의 빈곤율은 21%로 남성가구주 가구 빈곤율 7%에 비하여 3배라고 한다. 여성가구주 가구 5가구 중 하나는 소득이 최저생계비에도 미달하는 절대빈곤 가구라는 뜻이다. 그런데 같은 논문에서 개인을 단위로 본 통계수치는 좀 달랐다. 빈곤인구를 100으로 보면 여성이 55명이고 남성이 45명으로 여성이 ‘다소’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건 결국 무슨 뜻인가? 여성이 남성가구주 가구 안에 있을 때에는 별 문제가 없는데 여성이 가구주가 되는 경우에는 빈곤 위험이 매우 커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옛날 할머니들이 ‘남편은 울타리’라는 얘기를 하시는 걸 들으면서 낡은 생각 버리기는 참 어렵구나 생각하면서 할머니 세대와 나의 세대 간에 금을 그었었다. 그러나 할머니 세대의 사고를 규정하던 현실, 밖으로 나가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먹고 살 수 없는 현실이 지금도 엄연하게 지속되고 있다.

여성이 가족에 기대지 않고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으려면 노동을 통한 소득이 가능하던가, 아니면 시민권에 기초한 사회보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둘 다 신통치 않다. 여성은 일을 해도 먹고 살 만큼 돈을 벌기가 쉽지 않다. 여성의 상대임금은 남성의 65% 수준이다. 여성노동자의 45%는 중위임금의 2/3 이하인 저임금노동자이다. 사회보장은 어떠한가? 일이 없을 때 먹고 살려면 실업급여나 연금이 있어야 하는데 정규직 노동자로 일해 보지 못한 대다수 여성들에게는 남의 나라 얘기다. 혹시 유족연금이라도 받으려면 또다시 피부양자 지위가 필요하니 역시 정규직 남편의 ‘울타리’가 등장한다. 시민으로서의 한 여성은 여기서 아무런 권리가 없다.

여성이 가족 안에서 경제적으로 독립된 지위를 가질 수 없다면 우리 사회가 빈곤율을 어느 정도 낮추어간다고 하더라도 빈곤인구 중에서 여성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문제는 오히려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빈곤의 ‘여성화’ 명제의 진짜 의미이다.

정부도 양극화를 해소하는 데 돈을 쓰겠다고 한다. 이 때 주의하자. 여성이 노동을 통해서 먹고 살 만한 수준의 소득을 올릴 수 있게 하려는 노력, 그리고 시민권에 기초한 사회보장의 확대를 위한 노력이 경주되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가족,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서는 남편이라는 소위 ‘울타리’ 안에 있을 때만 빈곤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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