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중앙위에서 비정규직 할당제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중앙위원과 대의원에 할당제를 도입하되 그 세부방안은 결정되지 않았고, 몇몇 중앙위원이 제기한 부위원장의 비정규직 출신 할당제는 부결되었다. 그 배경이야 짐작만 할 뿐이지만, 할당제가 비정규직에 대한 적극적 고려의 상징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운 결정이었다.

물론 할당제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소수자나 대표성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집단을 대변할 대표자를 지도부나 의사결정단위에 포함시켜 그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긍정성이 있지만, 비정규직처럼 조직 확대나 활동력 배가의 잠재력을 가진 집단에 적용할 경우 자생력을 좀먹게 할 우려도 있다. 특히, 기존 노동운동의 틀을 바꿀 비판세력, 대안세력의 가능성마저 소진되고 기존의 틀 내에 그 대표자들이 안주하게 할 위험성도 있다.

또한 여성할당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여성 대표자를 뽑아놓기만 하고 활동과 사업에서 실질적 성평등의 진전에 손을 놓거나 당사자들에게 미루는 경향과 마찬가지 현상도 벌어질 수 있다.

비정규할당제, 현장단위에서 뽑아올리는 방식 채택해야

필자는 부위원장 할당제에 반대한 민주노총 중앙위원들이 비정규직의 자생력,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기존체제에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 비판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비정규직 과제를 비정규 당사자에게 미뤄놓지만 않고 적극적으로 연대해 나가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 결정을 부결시켰다고 믿고 싶다. 혹시 분파적 이해관계의 득실을 따지거나, 비정규직 과제에 집중하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집회에서 대표 발언하는 자리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런 결정이 나온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하지만 대의원, 중앙위원을 할당하는 기술적 문제들도 잠복해 있어 자칫 말만 무성하고 실제 진전은 없다가 어느새 의제에서 사라져 소멸해가는 과정을 겪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당위의 과제(해야 한다)를 현실의 과제(한다)로 옮겨오는 가운데 여러가지 고려사항이 있게 마련인데, 그런 문제를 이유로 논의 자체를 실종시키지 말아야 한다.

기계적으로 몇퍼센트를 정해 비정규조직에게 내주는 방식보다, 비정규직의 자생력과 잠재력을 살릴 수 있는 방식으로 현장단위에서 뽑아 올리는 방식을 택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대표자들이 민주노총 의사결정체에서만 발언하고 산별, 지역, 현장 단위와 유리되는 결과를 빚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할당제 논의는 과소대표자를 전략적으로 배려하는 데서 나아가 민주노총 조직현장에 비정규 활동의 뿌리를 내리는 과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배정의 원칙만 정하고 있다가 몇퍼센트, 몇명식의 논란으로 매듭짓는 방식으로 비정규 연대의 과제의 중요성을 훼절하는 모습으로 진행되어선 안 된다.

민주노동당에서도 비정규직 할당제를 적극 검토하다 민주노총 몫과 얽혀 당만이 결정할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로 인해 말만 나왔다가 쑥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선거가 진행되고 있기에 새 지도부가 구성되면 새롭게 논의될 수 있겠지만 선거과정의 무수한 쟁점들 중 하나로 취급되면서 실종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비정규사업들도 새 지도부가 구성되면 새롭게 논의해야 할 일로 얼개만 제시되어 있으며, 흩어진 구슬을 꿰는 건 나중 일이고 주워 모아야 한다는 결의만 해놓은 상태이다.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이나 작년 한해는 한국사회 핵심 쟁점으로 등장한 비정규노동의 문제를 제대로 포괄하지 않아 생긴 정체성 논란에 휩싸였다. 총연맹, 산별노조와 연맹, 단위노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당도 마찬가지로 ‘급박한’ 과제를 ‘더딘’ 행보로 대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적 정당성이 붕괴했다고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에 민주노총 지도부는 ‘볼멘’ 목소리로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노동운동 위기론을 거론하는 논자들의 목소리를 잘 구분해서 듣는 지혜를 발휘한 것 같지 않다. ‘이대로 가면 민주노조운동은 망한다’와 ‘이미 망했다’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비정규직 연대 부재를 빌미로 실상은 현 정부와 타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민주노총을 거세게 비난하는 참여정부 참여파 논자들이야말로 민주노총 집행부가 비판해야 할 대상이었다.

정답은 있는데, '나'를 정답에 맞추려 하지 않으니…

하지만 오히려 반성을 촉구하며 응원하는 염원을 품은 사람들을 거세게 공격하는 한 정파의 집행부로 행세했다. 집행부가 된 사람은 민주노조운동의 대표자로서 격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국민파 집행부에 대한 참주선동쯤으로 해석하는 듯한 격앙된 대응이 좌중을 압도하는 바람에 정말 경청하고 자신을 겸허하게 되돌이켜 볼 성찰의 시간을 낭비하는 우를 범했다. 현장파 단위노조 지도부나 중앙파 지도부가 있는 연맹 단위까지 모두 비판 대상이다. 모두의 불찰을 총연맹 지도부의 탓으로 돌린다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집행부의 반응을 보며 민주노조운동에 대해 절망할 동지들을 조금이라도 고려하고 행동했어야 한다.

이참에 50억 기금을 모아 비정규 조직화 학교를 설립하겠다는 방침에 대해서도 제대로 논의해서 사업방향을 새롭게 짜야 한다. 비정규 입법을 제출하면서 비정규직 규모의 변화나 차별해소의 정도에 대해 아무런 전망도 제출하지 않는 노동부를 비판했는데, 비정규사업에 집중하자고 기금을 모으고 조직화 방안을 제출하면서 한번도 제대로 된 논의를 하지 않은 민주노총도 마찬가지였다.

사전 논의가 없었기에 기금이 모이지 않는 것이 정규직의 연대의식의 부족 탓인지, 사업방향에 대한 현장의 비판적 태도 탓인지 아니면 단지 뭐 하자는 건지 잘 몰라서인지도 확인이 되지 않는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공식 문제제기는 하지 못했고 비공식 모임이나 학술단체 토론에선 여러 차례 문제를 제기한 바 있지만 ‘정했으니까 해봐야 한다’는 반응뿐이었다.

최근 민주노총에서 주관한 비정규 조직화방안 연구결과에서도 확인되다시피, ‘조직화 학교 모델’은 실패한 프로젝트이다. 그리고 퇴락하고 있는 영미권 노동운동의 고육지책일 뿐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잠재력까지 스스로 저평가하는 사업방향을 설정하는 걸 용납하기 힘들다. 사업이 본격화되기 전에 서둘러 전면 수정해서 산하 조직들이 연대기금 납부라도 제대로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비정규 연대의 과제에 대한 반성의 기운은 높지만, 반성하고 나갈 방향에 대한 가닥은 여전히 잡히지 않고 있다. 그래서 각자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그것이 세력경쟁이다. 이렇게 가다간 올해도 비정규직이란 화두는 세력화를 위한 선명성 경쟁의 재료밖에 안 될 것이다. 운동권력의 심장부로 다가갈수록 해야 할 말은 많지만 막상 할 일은 못 찾는 게 현주소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답을 몰라서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답이 분명한데, 내가 정답에 맞추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고쳐야 할 것은 문제 설정이 아니다. 비껴간다고 해결되는 일도 없다. 정답을 받아 안을 수 있도록 나의 태도, 나의 처지를 바꾸어가는 길이다.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들이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길, 비정규노동자도 다른 비정규직과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는 길이다. 내년엔 연대투쟁이라는 우리가 만든 현실이 연말의 화두로 선정되도록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진보운동의 시선을 위의 자리에서 아래의 현장으로 낮출 필요가 있다. 반면 우리의 논쟁 지형은 저 밑바닥에서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 올해는 이념 논쟁을 해 나가면서 연대적 실천으로 살아가는 한해로 만들어 나가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