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한반도 역사 이래로 여성의 난자가 요즘처럼 사회적으로 많이 거론된 적은 없을 것이다. 거기다 ‘몇천개의 난자’라는 표현은 더욱 생경스러운 일이다. 중고등학교 생물시간에 접한 짧은 지식조차도 가물가물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난자도 정자처럼 수만개씩 배출 되나보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황우석 배아줄기 세포 연구를 위해서 자신의 난자를 기증하겠다고 몰려든 1,000여명의 여성들을 보면서 마치 머리카락 잘라주듯이 난자도 쉽게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동안 국익의 관점으로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찬사를 퍼부어 온 대부분의 대중매체들이 난자에 대해서는 연구의 도구 정도로 치부해 왔을 뿐, 난자 채취 과정이나 이로 인해 발생하는 후유증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위해 여성의 몸에서 난자를 채취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 여성의 난자는 그 여성의 생물학적인 정체성을 담고 있는 생식세포일 뿐 아니라, 여성의 몸에서 평생 동안 배란되는 난자의 수는 총 300개에서 500개 정도로 매우 유한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여성의 몸에서 난자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인위적으로 배란 호르몬을 주입하여 과배란을 시키고 수술적인 과정을 거쳐야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복통, 불임, 난소암 드물게는 사망까지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대한 검증과정에서 밝혀졌듯이, 순수 난자 기증자의 20% 정도가 후유증으로 병원을 내원한 것으로 드러났고, 언론을 통해 과배란 증후군으로 기증 후 1년이 지나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직장까지 그만둬야 했던 여성의 사례가 밝혀진 바 있다.

그러므로 ‘여성의 몸에서 난자를 채취(?)한다’는 단순한 말 뒤에는 ‘생물학적 정체성을 담고 있는 매우 유한한 생식세포를, 그것도 여성의 몸에 큰 후유증을 남길 수 있는 위험한 수술적 과정을 통해 채취해야 한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이와 같이 여성들이 많은 대가를 치루어야 가능한 연구가 배아줄기세포 연구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논쟁의 핵심 주제는 난자의 문제,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 문제가 되어야 한다. 혹자는 난치병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난치병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 또다른 생명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방법인가? 난치병의 치료는 반드시 배아줄기세포 연구만을 통해 가능하다는 신화는 어떠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 황우석 박사는 총 2,069개의 난자를 사용하고도 1개의 줄기세포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앞으로 배아줄기세포 1개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의 난자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건강권이 침해되어야 하는가. 설사 줄기세포 연구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계속적으로 많은 줄기세포를 배양하기 위해 생명을 담지하고 있는 수많은 난자가 여성에게서 채취되어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더군다나 상업화에 성공하더라도 그 가격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여성의 몸은 과학의 도구가 아니다. 여성의 난자는 국익을 위해 당연히 바쳐져야 하는 제물이 될 수 없다. 우리는 황우석 박사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뿐만 아니라, 배아줄기세포 연구 그 자체에 대해서 근본적 재검토를 해야 한다. 과연 배아줄기세포의 연구가 생명의 관점에서, 인권의 관점에서 합당한 것인가? 다른 대안은 없는가?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계속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정부의 발표는 당연히 철회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타당성에 대해 더많이 생각하고 토론할 시간이 필요하다. 적어도 이 땅에 태어난 난자들에 대한 조그마한 예의라도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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