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느릿한 중저음의 말투. 안기호(42) 현대차비정규직노조 전 위원장은 2003년 5월, 현대자동차에 비정규직노조를 세운 주역이다. 4차례의 해고와 3번의 복직 및 잦은 수배, 구속 그리고 지난해 38일 동안의 단식농성이 말해주듯 그는 그 누구보다도 비타협적인 투쟁을 펼쳐 왔다.

지난해 9월15일, 7개월여의 감옥생활 끝에 출소한 뒤에도 평조합원으로서 안 전 위원장의 행보는 바쁘기만 했다. 안 전 위원장은 ‘현대차비정규노조불법파견철폐투쟁단’의 일원으로 전국순회를 다녔고, 각종 강연과 회의에 참석하며 비정규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난해 11월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의 전국순회투쟁단에 참가할 당시 안 전 위원장이 한 말이다. “300일 가량 투쟁을 지속하면서 조직력이 떨어지고, 많이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처음 노조를 만들 때보다 중간, 핵심간부가 성장, 발전한 것도 사실이고요.” 그는 ‘12척의 배가 있지 않느냐’는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 대사를 인용해 투쟁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불파투쟁은 버리고 갈 수 없는 원칙”

1월13일 오후 현대차 울산공장 맞은편 울산노동자신문 사무실에서 안기호 전 위원장을 만났다. 전날 금속연맹 주최의 ‘원하청 연대투쟁 평가토론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안 위원장은 토론회가 많이 아쉬운 듯했다.

“힘 있는 정규직노조가 비정규노조를 통제하고, 민주노조활동을 사실상 못하게 옭죄는 것이며, 노동기본권을 힘있는 노조가 오히려 제약하고,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비정규직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정규직의 품 안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려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는 원하청연대회의에 대한 토론에서 나온 문제의식을 소개하며, ‘힘의 역관계 속에서 사실상 정규직노조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재차 반론을 폈다. 원하청연대회의의 겉포장과는 달리 실제 현실은 이상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공동결정, 책임, 투쟁의 3원칙은 예외적인 조항과 유연성이 있어야 하나 그런 것이 없습니다.” 정규직노조는 마음대로 하면서, 비정규노조는 어떤 돌발상황에서도 즉각 대응을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게 안 전 위원장의 지적이었다.

그는 짧은 시간 때문에 쟁점화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으나 충실한 토의가 이뤄지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대체인력 투입’, ‘취업비리’, ‘원하청연대’, ‘독자임단협’, ‘상급단체’ 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원하청연대회의의 발전은 어렵다는 설명이었다.
1월18일은 지난해 현대자동차 5공장 탈의실 점거농성이 시작된 날이다. 해를 넘겨 1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시점. 현재 안기호 현대차비정규직노조 전 위원장은 불법파견 투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회사측은 불법파견 문제와 관련 ‘특별교섭’을 하자고 하면서 ‘비정규 너네는 빠져’라며 완전 무시하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노동기본권을 보장해주겠냐는 것이죠.” 민주노조운동이 실리를 추구하고, 노사협조주의 속에서 몰락해가고 있는데, 비정규노조가 그 전철을 다시 밟을 수야 없지 않느냐는 주장이었다.

현대차비 정규노조의 현안과 관련해 안 전 위원장은 현 2기 집행부의 독자적인 임단투 투쟁 기조에도 우려를 표시했다. “조합원들에게 실리를 주겠다는 판단이라면 협상을 정규직노조에 맡기는 게 낫습니다. 불파투쟁에 대해 미온적일 수는 있으나 패배적, 수세적인 기조 속에서 투쟁이 전개된다면 그야말로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안 전 위원장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불법파견 철폐투쟁’을 기조로 잡고 있었다. 내부의 교육사업을 거쳐 설날 뒤 실천사업을 준비하겠다는 것. 3월경 불파투쟁의 불씨를 재점화 하고, 6월경에는 이슈화 해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단위사업장 투쟁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지역의 ‘비정규연대’도 현 11개 단위에서 지속적인 확대를 이룰 방침이었다.

“불법파견 문제는 정규직화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파투쟁은 양보하거나 버리고 갈 수 없는 원칙입니다. 현 집행부에서 미온적으로 나온다면 우리라도 적극 나설 것입니다.” 안 전 위원장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그것은 당연한 임무와 역할입니다." 현 집행부가 설득력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일정한 관계 악화는 부득이하다는 판단이었다.


노조활동 경험, 역량 없어 힘들었던 시절

천안공고를 나온 그는 서울의 한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1992년 울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92년부터 노동운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효성금속 노조위원장 당시인 93년도에 54일 동안 파업을 진행하고 구속이 됐습니다.” 1997년 노동법 개악 반대투쟁 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두번째 구속된 그 해, 효성금속도 문을 닫았다.

안 전 위원장은 노동운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로 효성금속 위원장 시절을 들었다. 현대차 비정규노조 활동을 하면서 갖은 풍상을 겪었을 터인데 의외였다. “효성금속 위원장 시절 4년여가 가장 힘들었어요. 노조활동 경험과 역량이 없는데도 상황은 많은 걸 요구받았고, 감당하기가 어려웠죠.” 구조조정 사업장으로 90년 이후 임금동결 등이 서서히 시작되더니, 일부 컨테이너 사업장은 중국으로 이전하기도 했다.

숱한 연설과 잠 부족, 담배 등으로 다부진 몸이 61킬로그램에서 50킬로로 쑥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노조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에도 회사는 결국 문을 닫았다. 조합원 1,300명은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95년경에 회사가 폐업하면서 전체가 길거리로 나앉았죠. 우연히 주차관리나 막노동 등을 하고 있는 임직원들을 가끔 보게 되면 마음이 아파요.”

그 뒤, 2002년 대선 전 그는 민주노동당 활동을 잠깐 하기도 했으나 대선을 앞두고 탈당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참된 희망을 위해 민주노동당을 넘어서고자 한다.” 당시 그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간 현장은 하청업체 ‘명성’을 통한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비정규직의 길이었다.

“정규직노조 운동가들이 나의 비판에 대해 껄끄러워 하기도 하지만 비정규운동에 대한 엄호, 지원은 현장의 실질적 힘을 살리고 정규직노조운동을 역으로 살려나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안기호 위원장이 지난해 감옥에서 원하청 동지들과 농성장 동지들에게 쓴 편지는 그의 확고한 의지를 재차 엿볼 수 있다.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은 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선택의 문제가 분명 아닙니다. 2005년 투쟁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투쟁이자 끝까지 투쟁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밖에 없는 1,2,3차 모두의 투쟁이자 전국적인 투쟁입니다.”(2005년 2월19일, 울산구치소에서)
“단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꿈에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동지 여러분의 꿈을 위해! 우리 모두의 승리를 위해 승리자가 됩시다. 자신에게 동지에게 가족에게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노동자로 불같이 일어섭시다.”(2005년 8월20일, 울산구치소에서)

비정규투쟁 ‘구속, 해고자’ 방치해서야

그러나 현재 현대차 비정규직노조의 조직상황은 잘 나갈 때의 절반 수준이다. 현장조직력을 복원하기 위한 활동이 중요한 것이다. “핵심을 복원시켜 나가야죠. 그러자면 현장활동에 대한 전망과 계획을 갖고 움직여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속, 해고된 노동자들에 대해 거의 방치하고 있는 운동진영 내부의 문제에 대한 쓴소리도 있었다. “민주노총이건, 연맹이건, 사내하청만 해도 300여명의 해고자가 있습니다. 이들을 버리고 가면서 현장의 힘을 어떻게 키우겠습니까. 그것은 요원한 것이죠.”

70~80억원의 여력이 있는 대기업 단위노조가 있는 반면, 쫄쫄 굶는 비정규직노조. 운동 내부의 양극화도 심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역에서 현대차 5공장 등에서 89명의 해고자가 있습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과 울산건설플랜트 등을 포함하면 90여명입니다. 이들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이 제출되지 않고, 대책 없이 가고 있어요.”

안 전 위원장은 답답해 했다. “물론 스스로의 대안 마련은 당연합니다. 당사자들이 포장마차나 각종 재정사업, 생계활동 등을 하고 있지만 역부족입니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벌금 8천여만원을 갚고자 현재 홍삼, 볼펜 등 재정사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 자체적인 사업은 한계가 크다. 원청에서 공장에 물품을 들여오지도 못하게 한다. 현대차노조 대의원의 정식체계를 통해야 대량판매가 가능하지만 정규직노조는 다음주 대의원선거를 앞두고 있다. 선거가 끝나면 곧바로 설날이다.

대중이 주체로 섰을 때가 큰 보람

“적립금이 조만간 바닥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에 3~4월경에는 다시 재정사업을 해야 합니다.” 각종 단체의 ‘러브콜’에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사내하청노조의 상황과 함께 개인적으로 쪼달리는 경제상황도 한몫 거든다. 개인후원도 거의 없이 해고자의 신세로 활동을 유지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 그러나 안 전 위원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허허 웃는다. “예나 지금이나 돈과 조직에 대한 고민을 하지만 별 뾰족한 방안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내와는 1997년경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출소한 뒤 곧바로 결혼했다. 아내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안 전 위원장은 난감한 듯 짧게 말을 던진다.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추진위(노진추) 활동을 하면서 만났어요. 사귄 이야기는 재밌는 게 없어서….”

아내 윤현경씨는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에서 반상근을 하고 있다. 활동비로 44만원을 받는다. 안 전 위원장은 불파철폐투쟁단에서 매달 20~30만원 정도를 지급받지만 가정살림에 크게 도움되지는 않는다. 올해 초등학교 들어가는 큰아이와 6살 동생은 가족들과 지인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키우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두 아이의 아빠인 그는 역할을 다하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안 전 위원장은 아이들과 틈틈이 바닷가, 공원, 놀이터 등을 나간다고 한다. “촌놈이라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해요.” 잦은 농성과 구속, 단식투쟁 등으로 아이들 얼굴 볼 시간도 많지 않았다.

특히, 둘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아토피로 심한 고생을 했다. 지금은 천만다행으로 거의 다 나았지만 얼마나 아토피가 심했던지, 소 엉덩이의 딱지처럼 손발에 피딱지가 엉겨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아이를 돌볼 수가 없었다. 수배, 구속시기가 길어지면서 아이와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불에는 피가 얼룩지고, 아이고 어른이고 잠을 못자고, 심하면 팔, 다리를 잘라내고 싶다는 정도라는데….”

아이에 대한 미안함은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약이란 약은 다 써본 것 같고,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보냈겠어요.” 안 전 위원장은 아내에게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툴다. “성격을 바꾸려고 하는데 잘 안돼요. 처도 활동가인데 가사와 육아를 전적으로 담당하면서 절반은 포기한 거죠. 아내에게 잘해야 한다는 것은 말뿐인 것 같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기쁠 때가 언제였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의 답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대중이 주체로 섰을 때 작은 행복과 보람을 매순간 느낀다고 할까요.” 지금껏 버티고(?)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안 전 위원장. 그의 힘의 원천은 노동자, 민중의 대지에 굳게 발 딛는 것에 있는 듯 보였다.

전임 위원장으로서 박현제 현 현대차비정규노조 위원장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대단히 어려운 상황입니다만 전사회, 전노동자적 소임을 다해줬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고, 자주 만나 의견을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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