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폴란드의 세계적인 좌파 경제사학자 L.콜라코프스키가 옥스퍼드대학에 와서 특별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의 강연의 요지는 마르크스가 세 가지 점에서 모두 틀렸다는 것이다. 첫째, 자본축적과 자본주의 발전을 통해 이윤율저하법칙은 실현되지 않았다. 둘째, 계급간의 양극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셋째, 역사발전의 5단계론, 특히 공산주의가 역사발전의 종착역이라는 생각은 역사를 목적론적으로 보는 기독교, 나아가 유대교의 전통에서 유래한 아주 서구적인 종교적 개념으로서 과학일 수 없다. 이런 비판이야 식상할 정도로 듣던 것이고,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뭔가 큰 기대를 하고 왔다가 상투적인 이야기를 듣고 실망하는 오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본주의는 욕망과 선망에 기초한다?

그런데 그는 강연을 끝내면서 마지막으로 수십 년에 걸친 자신의 연구의 결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자본주의는 욕망(greed)과 선망(envy)에 기초해서 움직이는 사회인데 이것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어떤 체제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했다. 사실 요즈음 거창한 역사법칙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고 따라서 누가 그것을 열심히 비판한다 해도 큰 사회적 의미도 없지만 콜라코프스키의 마지막 말은 긴 여운을 남겼다.

생각해 보면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과 누군가의 성공, 그것에 대한 선망과 질투, 이것이 낳는 또 다른 욕망, 그리고 이 욕망들의 상승작용, 뭐 이런 식으로 사회가 굴러가는 일은 자본주의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모든 역사가 그렇지만 유럽의 역사가 이를 잘 말해준다. 영국은 산업혁명 전까지는 유럽의 변방이어서 좀 그렇지만 대륙의 여러 나라에 가면 그야말로 입을 다물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고 찬란한 문명유적을 보게 된다. 찬란한 로마의 유적, 오스트리아 제국의 유적, 나아가 오스만터키 제국의 찬란한 이슬람 문화 등등…. 그야말로 우리가 움막집 짓고 살 때 여기서는 수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을 지었고 화려한 예술품으로 건물을 장식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필자는 이 모든 유적에 경탄을 하기보다 거대한 욕망과 그 욕망의 충돌을 보게 된다.

하나의 문명이 발흥하여 팽창을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욕망의 질주가 시작되고 내부의 한정된 자원으로는 이것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에는 주변 약자들에 대한 정복전쟁이 일어나고 마침내 제국이 건설된다. 지금이야 유럽에 빌붙어 먹고사는 형편이지만 과거 오스만터키제국이 한창 잘 나갈 때 제국의 전사들은 말하자면 엉덩이가 항상 짓무르는 것도 모르고 미친 듯이 말을 달렸을 것이다. 개인을 떠나 사회 전체가 미쳐 돌아갔던 것이다. ‘미친놈’들이 수십만 명씩 떼를 지어 설쳐대는 데 당할 재간이 있겠는가? 욕망과 선망은 때를 만나면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미치게 한다. 물론 여기에는 단서가 있었다. 과거에는 ‘상것’들이 욕망을 억제하지 않고 ‘분수’를 모르고 설치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고 오로지 상전의 욕망을 위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집단적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수 지배층에 국한된 얘기이다.

자본주의에 특이한 점이 있다면 욕망과 선망이라는 인간 특유의 에너지가 과거처럼 소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허용되고 나아가 구조적으로 조장된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욕망이 해방된 시대이다. 산업문명은 사회의 다수가 분업 하에 협조함으로써 획기적인 생산력을 발휘하는 데서 출발하는데 반드시 다수에게 부와 권력을 향한 욕망에 불이 붙어야 탄생할 수 있다. 영국이 19세기 돌연 세계의 강자가 된 것도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요행히 영국은 16~17세기에 지배층이 약화된 틈을 타서 이른바 자유농이라고 하는 다수의 일반서민들이 부를 축적할 기회를 얻었고 이들 다수 서민들의 욕망과 선망의 에너지가 분출할 수 있었다. 이 욕망은 산업기술과 결합함으로써 순식간에 영국을 세계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욕망의 사이클, 한국서는 이제 분출기

사람은 늙으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는데 지금이 영국은 바로 19세기 찬란한 대영제국에 대한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소수가 부를 독점하게 되고 대영제국이 쪼그라들어 기회가 줄자 사람들의 욕망도 시들었다. 죽어라고 뛰어보았자 거기서 거기라는 식으로 되자 사람들은 광적 열기에서 깨어났는데 문제는 영 기회를 잡기 힘든 사람들은 아주 자포자기하여 어지간해서는 뛰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욕망의 과소가 문제이다. 영국은 최고수준의 대학원 교육으로 유명하고 한국에서도 많은 유학생이 오지만 이곳의 초등, 중등교육은 그야말로 비참한데 그 이유는 공부에 대한 열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른바 20%정도의 중산층의 교육열은 한국을 능가할 정도이고 여기에 속하는 학생이나 부모는 욕망에너지가 넘치지만 2003년 현재 25~34세 인구 중 중학교 이하의 교육만 마치고 학업을 중단한 비율이 약 30%에 이르고(한국의 경우는 5% 이하) 사실상 문맹인 인구가 20%에 이른다. OECD 국가 중 이탈리아 다음으로 높은 비율이다.

이런 문명의 사이클을 볼 때 한국은 어떠한가? 이미 욕망 사이클을 한 바퀴 돈 영국의 한적한 시골에서는 너무도 분명한데, 한국은 그야말로 욕망의 분출기에 접어들었다. 수많은 비판이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적 업적은 한국인의 욕망에 불을 지른 것이라고 정리하면 아주 간단하고 정확할 듯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내부에서 관찰되는 특이한 광기, 부와 권력을 향한 저돌성, 온갖 형태의 과격함, 휴식과 놀이조차 전투적 자세로 임하는 경향, 성취를 위해서는 고유한 인간적 가치를 가차 없이 내던지는 태도, 황량한 사회적 환경에 오래 노출되어 발생하는 정신적 파탄의 위기에 처하여 광신자로 돌변하는 무수한 사례 등은 바로 한국사회가 이러한 국면을 통과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이다. 만약 한국의 주변국들이 모두 약소국이라면 한국은 벌써 과거 대영제국을 능가하는 제국주의적 팽창국가로 변해있을 것이다. 중국의 조선족 사회를 몇 년 내에 초토화 시킨 정도나 축구 변방국이 돌연 4강을 달성하는 정도로 끝날 리가 없다. 최근의 엽기적이기까지 한 황우석 논문조작사건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한국 정도로 발전기에 저돌성과 내적 긴장을 보인 경우는, 필자가 과문한지는 모르지만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미안한 얘기지만 진보세력이라고 해서 특별한 예외는 아니다. 여기도 지향하는 가치나 내용이 다를 뿐 마찬가지의 저돌성과 성과지상주의, 공격성 등이 보인다. 

문명의 연착륙이 중요하다

모든 문명은 이렇게 비슷한 경로를 걷지만 마무리가 좋아야 한다. 이른바 문명의 연착륙이 중요하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산업화를 상공시켰지만 이것을 적어도 20년 이내에 완성하고 이후 그야말로 ‘정상국가’로 탈바꿈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이 급속하게 다가오는 고령화 사회를 생각할 때 성장을 지속하되 우리의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여 안정성장의 궤적으로 하루빨리 진입해야 한다. 우리가 과거 대영제국처럼 내부에서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추구를 위해 외부로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은 그야말로 망하는 길이다. 주위 어디에 우리가 정복할 공간이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사회통합적인 체제를 구축하여 형평과 성장이 조화를 이루어 지나친 내적 긴장과 공격성을 누그러뜨려야 한다. 한국은 발전단계상 일정한 형평이 사람들을 게으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의 확장을 보고 더욱 노력하는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만큼 욕망과 선망의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이다. 사회적 대통합 논의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서 구할 수 있다.

욕망과 선망이 인간의 벗어날 수 없는 굴레라는 콜라코프스키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그는 이 에너지의 현실적인 작용이 중요함을 환기시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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