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1일자로 노조결성과 계약직 전환에 반대한 이유로 해고된 여주장례식장 노동자 2명이 새해 첫날 다시 출근을 시작했다. 복직투쟁 6개월여만에 얻어낸 승리였다. 지난해 12월12일 경기지방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결정과 ‘복직’ 판결을 사측이 받아들인 것. 영세사업장인 탓에 수천만원에 이르는 체불임금에 대한 부담을 털고, 해고자들을 복직시키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2월말 임단협 협상을 마무리하고 새해 첫날 복직해 일주일여 출근중인 두 명의 노동자를 만났다.

천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는 ‘노동자의 자존심’

9일, 근무를 마치고 쉬고 있는 김재성(38) 조합원은 기자의 늦은 축하인사에 만면에 웃음을 띤 얼굴로 답했다. “힘든 싸움에서 이겼고, 우리를 도와준 분들에게 얼굴을 들 수 있었다는 게 행복이죠.”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처지인 듯 보였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기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무거운 마음이에요.” 무겁다는 것은 인간관계의 문제였다.

“근무지침에 따라줬으면 좋겠으나 하기 싫으면 하지마라.”
“노조도, 조합원도 없으니 교섭을 하지 않겠다.”
“노조 만들면 다음 사장이 쓰겠냐.”

민주노동당 전직 위원장 출신의 사장과 당원들인 임원들과의 그간의 마찰. 복직투쟁을 하면서 겪었던 직장동료, 상사들과의 문제는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들었으리라. ‘비정규직 차별철폐 연대가’로 유명한 친형인 민중가수 김성만씨를 폭행당사자로 지목한 이도 친분이 두터웠던 사이였다. “과연 내가 저 사람들과 다시 웃으며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시간이 약이겠지’하며 마음을 다 잡았다.

출근 일주일여만에 처음의 서먹서먹하던 관계도 조금씩 풀려갔다. “들어올 때의 걱정보다 편안한 부분이 있더라구요.” 해고기간에 금연을 실천할 정도로 털털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김씨. 그간의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요로결석으로 옆구리가 끊어질 듯 아픈 통증을 견뎌내고, 생계곤란에 직면했을 때도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견주면 약과였다.

“왜 굳이 다시 (복직해) 들어가려 하느냐.”
“허구한 날 고생하면서 왜 그렇게 싸우냐.”
“다른 일을 하던가. 언제든지 말만하면 알아봐 주겠다.”

주변지인들조차 장례식장에서 염습을 하는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부당한 해고에 맞서 복직을 쟁취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노동자의 자존심’ 문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길고 힘든 투쟁의 과정 속에 ‘죽어도 안 된다는 쪽과 생각 좀 해보자’는 식으로 의견이 갈리게 된다. 돈 조금 쥐어주면 그걸로 투쟁은 정리되는 상황을 다른 사업장에서 적잖게 보아왔다. “자기 소신과 자존심을 갖고 싸우지 않으면 복직투쟁의 의미가 없죠.” 몇천만원 줄테니 노조 덮고 물러가라는 수차례의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았던 이유였다.


투쟁의 처음과 끝…‘형’이 있었기에

그가 이렇게 굳건히 싸워올 수 있었던 데에는 큰형인 김성만씨의 도움이 컸다. 노조에 가입하고, 상담하고, 단계별로 절실히 필요한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형이 아니었으면 이런 일 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비정규직 투쟁의 현장이면 언제든 달려가는 민중가수 김성만. 그는 동생의 복직과 관련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게시판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제 동생이 여주의 한 사업장에서 일했는데 비정규직 전환을 거부하다 해고당해 5개월 투쟁 끝에 드디어 복직에 합의했습니다. 기륭동지들 투쟁도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추운 날 힘 잃지 말고 서로 따스히 안고 갑시다.”

그는 삼형제가 비상용으로 모으고 있던 통장(450만원)을 선뜻 막내에게 줬다. “아무 걱정 말고 투쟁하라”는 형의 물적, 정신적 도움은 ‘지주’의 역할이었다. 연대 요청과 각종 부탁에도 형의 존재는 큰 도움이 되었다. “형 얘기를 하면 호감도가 2~3백 퍼센트 올라가니까요. 형님이 없었으면 이 싸움은 없었을 겁니다.”

해고되었을 때도 난감하다기보다는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싸워서 이기면 된다는 생각도 그 때문에 가능했다. 무엇 때문에, 왜, 어떤 정신으로 싸워야 하는지, 깨우치게 되었다는 김씨. 그는 향후 열악한 조건에서 비슷하게 일하고 있는 다른 장례식장에 많은 것을 알리고 싶다고 했다.


동료들과 어울리고, 노동자와 연대하고

“날아갈 기분입니다. 얘들이 더 좋아하더라구요.” 권영식(47) 조합원은 복직된 뒤 아이들을 학원에 다시 보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했다. 그는 해고 6개월여 동안 팔저림 등 몸에 이상이 왔고, 밤잠을 설치는 등 정신적 스트레스가 컸다. 하지만 제일 힘든 고통은 따로 있었다. “당장 해고되니까 아이들이 ‘학원 그만둔다’고 하더라구요. 휴~.” 아이들 성적도 뚝 떨어졌다. 그에게는 그것이 더 큰 스트레스였다. 아내도 그의 해고와 함께 미싱일을 시작해 가계를 꾸려 나갔다. 그러나 카드 대출과 친척에게 빚을 져야 했다. 총 5백여만원이었다. 해고기간이 더 길어졌다면 그의 의지도 많이 꺾였을지 모를 일이다.

복직 뒤 일주일여. “사장이 너무 잘해주니까 그게 오히려 불안해요.”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던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요구사항을 더 들어주고 싶어하는 모습이라는 설명이다. 친절한(?) 사장님으로 변하다 보니 복직한 노동자들은 무슨 ‘꿍꿍이’인지 그것이 외려 불안하다는 눈치다. 작은 장례식장을 슈퍼, 식당, 장례부로 나눠 5인 미만의 분사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여전한 불안 요소다. 업무분장이 명확해지다 보니 직원들 간에도 대화가 어렵다.

노조 활동도 장기적으로 내다볼 수밖에 없는 상황. “현재는 직원들과 가볍게 소주 한잔 기울이지도 못하는 처지입니다. 앞으로 회식 등 자연스레 다가갈 기회가 생기겠죠.” “천천히 해나갈 생각입니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김재성, 권영식 조합원은 복직 뒤 망자와 가족에게 세심한 배려와 예의를 갖추듯,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과 함께 하려는 ‘연대’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주장례식장 '부당해고에서 복직까지'
지난해 4월 한시계약직이 명시된 ‘고용계약서’ 및 업무규율이 강화된 ‘취업규칙’에 서명을 거부한 이유로 권영식, 김재성씨는 그해 7월 해고예고통보를 받게 된다. 8월1일자로 해고된 두 조합원은 8월초 경기지노위에 부당해고 및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했고, 12월초 지노위는 부당해고 판결을 내렸다.


권영식, 김재성씨는 지난해 5월26일 전국시설관리노조에 조합원으로 가입한 뒤, 시설노조와 함께 6개월여 복직투쟁을 전개했다. 장례식장과 여주장날을 이용해 선전전을 벌이고, 사장집 앞에서 피켓팅을 벌이기도 했다. 가장 큰 힘은 ‘연대’였다.


“해고자 두 명을 위해 이렇게 (지역)연대하며 싸운 것은 드물 정도였다.” 김재성 조합원의 말처럼 시설노조, 여주이천지구협, 전비연, 민주노동당 등의 연대투쟁은 두 명의 해고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여주장례식장(이하 회사)과 전국시설관리노동조합(이하 조합)은 지난해 12월 12일 해고 조합원 2명에 대한 재취업과 함께 부당해고에 따른 위로금 및 체불임금 3천만원을 지급할 것을 합의했다. 합의서에 따르면 노조는 부당해고에 따른 고소를 취하하고, 회사는 복직투쟁 중에 있었던 모든 사항에 대해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또한 회사는 이후 부과될 벌금도 전액 지급하고, 노조 활동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했다.


회사와 조합은 12월말 임금 및 단체협약을 맺어 한시계약직 고용계약서를 파기하고, 근로조건도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3조(3명) 2교대제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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