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어느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어린이집은 야간까지 근무하는 부모들이 많아서 오후부터 야간까지를 담당하는 보육교사가 별도로 배치되어 연장운영을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부모들과의 간담회에서 낮에 아이들을 돌보는 담임교사가 야간까지(아이가 집에 가기 전까지) 아이들을 봤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를 오랫동안 돌봐온 잘 아는 교사가 내 아이를 끝까지 책임져 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런 제안을 한 것이지만 이는 보육교사의 장시간 근무가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제안이다.

초과근무 수당도 없이 월 100만원 이하의 월급으로 일하는 보육교사들의 처지와 조건은 ‘내 아이’에 대한 끝없는 애정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육교사도 노동자이건만…

노동자로 일할 때는 초과근무나 수당에 대해 민감하던 부모들도 아이를 맡기는 입장이 되면 보육교사 역시 직업인이고 노동자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고 만다.

물론 아이들은 필요한 시간동안 충분히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보살핌은 좋은 보살핌이어야 한다. 그러나 장시간 근무로 피로가 누적된 보육교사가 다음날 아침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맞이할 수 있을까? 또 자신이 일한 대가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상태에서 일에 대한 의욕이나 열정이 싹틀 수 있을까?

많은 부모들이 종종 보육교사가 노동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보육교사는 항상(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사랑에 기초한 전문성이 있다면) 아이와 관련된 모든 종류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많은 아이들을 동시에 돌보는 일이 힘들겠다고 입으로는 인정하지만 그와 별개로 매 순간 한명 한명의 요구를 충실히 들어주고(특히 자기 자녀의 요구는 무시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전문적인 교육과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자신이 필요한 시간동안 한 결 같이 내 아이를 돌봐주기를 원한다. 보육교사는 아무리 피곤해도 항상 웃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는 무능하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보육교사의 가장 큰 전문성인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사랑할 기력이 있을 때 발휘될 수 있다. 그 기력을 보충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가진 보육교사라 하더라도 자신의 전문성을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없다.

자기 일터에 CCTV가 설치돼 일하는 내내 감시당하길 원하는 노동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들은 어린이집이 생중계되길 원한다.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전혀 아이를 위한 환경이 될 수 없는데도 말이다.

노동자 연대의 정신을 보육노동자에게도

부모가 서비스 이용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보육노동자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정부를 향해야 한다.

마치 사업장에서 사용자들이 화장실 가는 시간을 줄여서 생산성을 높이라고 요구할 때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라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쳐야 되는 것처럼 아이들이 제대로 보육을 받을 수 있도록 어린이집 현장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전문적이고 좋은 보육교사에게 아이를 맡기고 싶다면 보육노동자들의 생활임금보장과 정부의 인건비 지원을 함께 요구해야 한다.

보육교사가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권리를 주장하면 자기 자녀에게 무슨 피해가 갈까 걱정하여 원장에게 보육교사의 해고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 권리가 지켜질 수 있도록 지지하고 연대해야 한다.

보육교사가 당당한 노동자로 설 수 있다면 우리 아이들 역시 당당한 노동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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