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도를 ‘위기’ 논란의 한 해였다고 하면 다소 과장된 것일까? 더욱 극심해진 빈곤 등 사회양극화 문제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면서 삶의 위기에 처하게 된 다수 보통사람들인 인민의 위기. 인민들의 복리증진을 총책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능력한 집권 세력으로 낙인찍히면서 더 이상 회복되기 어려운 총체적 불신에 직면한 노무현 정권의 위기.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의 폭력 사태와 재벌 대기업 노조와 민주노총 지도부의 각종 비리 사건 연루 등으로 표면화된 노동운동의 위기. 지속적인 지지율의 하락 속에 두 차례의 재보궐 선거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물론, 진보의 아성이라고 했던 울산 북구에서조차 패배하면서 지도부 사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은 ‘민주노동당의 위기’. 이러한 상황에서 다수 인민들이 다시금 민주주의보다 경제성장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무능한 민주주의 세력보다 부패한 산업화 세력에게 더 호감이 간다고 하는 민주주의의 위기.

2005년은 '위기'의 한 해

이 정도면 2005년도를 위기로 점철된 한 해로 규정해도 결코 과도한 것이라고 받아치기는 어려우리라. 다수 인민들이 생존이 위협받고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데 있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는 주체들마저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수익과 자산을 늘려가며 오히려 자신들이 세상의 주역이라고 외쳐대는 대재벌 기업 정도가 위기 논란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들 역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인민의 위기에 있어 핵심적인 고용과 소득의 위기는 결국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기반을 부식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들 중 대표주자로 꼽히는 삼성측은 근간에 들어 ‘매력한국’ 프로젝트를 추진해오고 있는 바, 이는 자신들마저 위기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지 않기 위한 방안을 ‘국가와 사회의 재설계(state & society rebuilding)’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모색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구제기(反求諸己)’가 필요하다


2005년 12월14일. 진보정치연구소는 이러한 상황인식으로부터 송년 심포지엄 “위기의 한국 사회, 대안의 모색”이라는 자리를 빌어 “한국 사회 위기 주범 Top10”을 발표했다. 아무리 구조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위기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 상황을 현재와 같은 양상으로 발현시킨 것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국가사회의 주요 정책결정 등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나 조직 등 특정 주체에게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구조는 항상 주체의 행위를 매개로 구현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책임을 묻고, 더 나아가 위기를 타파해 나가는 데 있어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야 할 의무를 갖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위기 주범 발표는 속된 말로 민주노동당 소속 모 의원의 말을 빌어 “한 건 했네”라는 평을 받았다. 주요 언론 매체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것이다. 물론 그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애초 기획의 취지처럼 노무현 대통령,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등 보수 양당, 조선일보, 사법부, 기획부동산업자, 국제투기자본, 대학사회 주류, 재벌 대기업 노조운동 진영 등 한국에서 커다란 정치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물들과 집단에게 직접적인 위기의 책임을 ‘주범’이라는 이름을 달아 공식적이고도 공개적인 차원에서 제기하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것이 연구소만의 생각이 아니라 연구소 주위에 결합되어 있는 진보적이며 양심적인 교수 및 정책 연구 역량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들 스스로도 자신을 위기주범의 한켠에 올려놓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송년 심포지엄이 끝나고 나자마자 진보정치연구소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했다. 민주노총(중집)이 재벌 대기업 노조운동 진영을 위기 주범에 포함시킨 것과 관련, 그리고 민주노총을 한국노총과 함께 부문별 위기주범으로 포함시킨 것과 관련, 민주노동당측에 진상규명을 요구해왔기 때문이었다. 현재 이 문제를 둘러싸고 당과 민주노총 내 직을 맡고 있는 이들 간의 논의가 솔찮게 분분한 듯하다.

하지만 나는 지면상의 제약도 있고 해서 단지 이런 말로 대신하고 싶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은 당분간 - 아니면 꽤 긴 시간 동안 다수 보통 사람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 요구를 하기보다는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으며, 진보운동진영 내에 대해서든 그 밖에 대해서든 간에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자신의 자세를 먼저 가다듬은 뒤 활을 쏘는 ‘반구제기(反求諸己)’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고. 물론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말은 위기 운운하는 진보정치운동 주체 모두가 귀기울여 들을 이야기이다.

‘행복한 나라 만들기, 10년의 희망 설계’ 그리고 ‘유능한 진보’를 향하여

최근 진보정치연구소는 10월 중순을 넘어가며 진행한 2005년도 사업 평가에 바탕해 2006년도 사업계획을 잡는데 여념이 없다. 연구소를 만들어 세운 지 첫 해를 보내면서 이래 저래 고민했던 것도 많아 연구소 안팎의 사람들과 의논할 것도 많고, 그만큼 이래 저래 신중하고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도 많아 그렇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2005년도의 위기가 결코 올 한 해에 그칠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게다가 2006년은 2007, 2008년 대선과 총선이라는 사실상 진보정치운동의 운명을 좌우할 빅매치를 준비해야 하는 해이다. 2006년을 잘 보낸 정치세력이 2007년과 2008년의 승부에서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이다. 이때 핵심은 다수 인민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으며, 그래서 앞으로의 세월에 대해 희망을 가지게 되는 비전의 제시이다.

현재 진보정치연구소는 ‘행복한 나라 만들기, 10년의 희망 설계’, ‘유능한 진보’ 등을 주요 화두로 하여 2006년도 사업 계획을 구상하고 검토, 논의하고 있다. 이 화두들은 2006년도 사업의 모토와 기조 및 방향인 셈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진보정치연구소는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보다 공세적이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대항담론을 생성, 유포하겠다는 의지를 가다듬고 있다.

이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대안적인 가치와 규범을 창출하고 그것에 동의하는 인식공동체를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나가겠다는 것이다. 그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지면상의 제약도 있고, 아직 보안 문제도 있고 하니, 이러한 사업모토와 기조 및 방향, 목표를 갖게 된 문제의식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첫째, 위기의 시대는 항상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최소 10년 이후의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거시적인 수준에서의 새로운 시야의 확보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시야에 바탕한 전체에의 통찰을 통해 국가와 사회를 재설계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이제 우리는 거대 담론 시대의 재개막을 앞두고 있다 하겠다.

둘째, 그러한 시야의 확보와 통찰력, 재설계에 필요한 것은 단지 인민에 대한 사랑과 같은 열정만이 아니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거나 그것을 학습하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셋째, 그 능력이란 다름아닌 대안 사회의 상과 그것을 실현하는데 있어 요구되는 가치와 규범을 창출하는 능력이며, 다수 인민들이 이를 동의하게끔 하는 능력이다. 덧붙여 그 역할을 진보정치운동세력이 해야 하며,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인정을 받아내는 능력이다.

이때 진보정치연구소는 추상적인 구조론과 계급 계층론 등에 국한하지 않고, 보다 구체적으로 위기 극복에 현실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장애가 되는 (거대)이익집단들과 같은 행위자들과 그들의 이해관계(망) 등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현실적으로 타파해나가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해나갈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국가와 사회의 흥망성쇠에 실질적으로 키를 쥐고 있는 핵심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노동당을 위시로 한 진보정치운동 세력의 실천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은 더 이상 국가와 사회가 회복될 수 없는 파탄의 상황에 처하게 될 최종 시한, 즉 10년 후의 예측 전망 가능한 최악의 상태를 감안하면서, 이를 막아내는 것은 물론 새롭게 국가와 사회를 재설계하기 위한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답을 만들면서 걷는다

이제 긴 듯했으나 결국은 짧았던 연재가 끝났다. 단편적이거나 혹은 홀로 너무 나아간 이야기를 소통을 유도하기보다는 독백에 머물고 말 형태로 내뱉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끝으로 압축적으로는 원내 진출 이후 현재에 이르는 1년6개월 동안 진행되었고, 에전에도 진행된 바 있으며 앞으로도 진행될 우리의 고민들에 답을 만들면서 가는 세월이 기다리고 있기를 소망해보자. “물으면서 우리는 걷는다”라는 사파티스타의 잠언에서 더 나아가 우리는 교정의 여지는 남겨두지만 “답을 만들며 걷는” 형성(making)의 관점에서 출발하고자 하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를 새롭게 설계해나가야 하는 거대 담론의 시대에 대한 화답에서 걸음을 재촉해본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