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황우석 교수가 지식과 과학의 사기꾼이고, 거짓 근거를 갖고서 국고를 낭비하고 과학계의 윤리 질서를 어지럽힌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또 다른 많은 황우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김 본부장은 이번 홍콩 WTO협상에서 “협상의 진전을 위해 농업부문에서 신축적일 용의가 있다”는 내용의 연설문을 언론에 흘렸다가 여론의 반발을 샀던 인물이다. 그는 “미국에서 대학교육까지 마치고 현지에서 변호사 업무를 하다 귀국한 국제통상 전문가”다.

황우석과 김현종

필자가 장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있는 그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지난 5~6월에 국회에서 있었던 ‘쌀 관세화 유예 연장 협상의 실태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를 통해서였다. 모내기 한번 하지 않았을 그는 국회의원들 앞에서 국제통상에 대해 ‘복잡하고 화려한’ 강의를 해주었다. 왜 관련 내용을 모두 국회에 보고하지 않느냐, 모든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어떻게 국회 비준을 받으려 하느냐는 의원들의 단순명쾌한 지적에 대해, 그 ‘유식한’ 경제 관료는 ‘복잡하고 화려한’ 이론을 늘어놓으면서 이리저리 빠져나갔다.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면서 ‘복잡하고 화려한’ 설명을 갖다 붙인다는 점에서, 하는 말들이 진실이든 아니든 황 교수나 김 본부장이나 관련 분야에서 최고의 지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두 사람 모두 신분상 보통 사람들이 아닌 상류층으로 분류된다는 점(한 사람은 대학교수이고, 한 사람은 장관급)에서 두 사람은 비슷한 이미지로 내게 다가왔다.

‘황우석 현상’을 돌아보면서 필자는 노동학계에는 황우석 같은 이가 없는가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걸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노동자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면서 복잡하고 화려한 이론을 늘어놓는 유식한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해본 것이다. 그리고 <매일노동뉴스> 12월22일자에 실린 노중기 교수의 글을 읽고서 필자 스스로가 황우석 같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사실’에 작은따옴표를 친 이유는 당연히 필자는 황우석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노동조합과 관련하여 장밋빛 미래를 제시한 적도 없고, 복잡하고 화려한 이론을 늘어놓은 적도 없으며, 교수나 장관급 본부장 같은 사회지도층의 위치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 교수의 글을 읽어보면 노 교수가 시비를 걸고 싶어 하는 사람이 황우석 교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남아공 최대 노총인 코사투(COSATU)의 ‘사회적 조합주의’를 운운한 대목이나 “코사투를 따라 노사정위에 참여해야 하고, (신자유주의와의) 타협은 불가피하며, ‘최대강령주의’를 하루 빨리 버려야 하며 … 또 가능하다면 여러 노총들은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대목에서 그가 시비를 걸고 싶은 사람이 다름 아닌 필자라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노 교수는 애써 “이들”이라고 복수형을 쓰고 있다. 하지만, 필자 외에 코사투의 ‘사회적 조합주의’, 남아공의 노사정위원회(NEDLAC) 따위를 요즘 와서 ‘노동판’에서 공개적으로 거론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노 교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기 입장을 밝히면 될 것을…

글이 옆길로 새는 걸 막기 위해 노중기 교수가, (황우석 교수가 주도한 “희대의 사기극”에 빗대 “허위와 거짓”으로 비아냥거린) 몇 가지 사안에 대한 필자의 입장부터 먼저 밝혀보자. △필자는 한국 노동운동이 사회적 조합주의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양대노총이 노사정위에 참여하는 걸 꺼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현재 국면에서 힘 관계를 고려할 때 신자유주의(더욱 분명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와 타협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타협을 배제하고 최대치를 요구하는 ‘최대강령주의’로 얻을 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가능하다면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통합하는 게 ‘노동자는 하나’와 ‘1국 1노총’이라는 노동운동의 대의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필자의 생각들에 노중기 교수는 동의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그가 여기저기에 쓴 글들을 읽어보면 동의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자기 생각과 다른 견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건 큰 문제가 아니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다. 하물며 학문과 이론의 영역에서야 말해 무엇 하랴.

그런데 노 교수의 글에서는 자신이 동의하지 않거나 혹은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필자의 인터뷰와 방문기)를 두고 쓸데없는 악담을 쏟아내고 있다. 마치 황우석 논문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한 MBC의 과 <프레시안>을 두고 네카시즘(‘네티즌’과 맹목적 반공주의 마녀사냥 캠페인인 ‘매카시즘’의 합성어)이 설쳐댄 것처럼.

그는 황우석 교수의 사례에 빗대 “수입된 이론”, “선진화”, “글로벌 스탠더드”를 거론하다가, 다시 “식민지 지식 논리”, “지식 수입상의 학문”, “복제, 이식의 논리”를 들먹이다가는 끝으로 “허위와 거짓”과 “희대의 사기극”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이런 표현들이 정부·자본이나 황우석 교수를 향한 것이라고 변명할지 모르나, 그의 글을 읽어보면 분명 필자를 향한 ‘상찬’(上饌)임이 분명하다.

그 하나하나마다 책 한권을 써도 모자랄 만큼 중요한 노동운동의 쟁점들을 거론하면서 노동을 연구하고 사회과학을 한다는 학자의 글이 이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못하는 현실은 노동조합 내셔널센터(National Center)의 대의원대회에서 폭력을 자행하고, 그게 폭력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노동운동 일부 정파들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NL과 PD, 최초의 이론 수입상들

노중기 교수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은데, 그 대표적인 게 있다. 필자는 남아공에서 이론을 수입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조합주의’라는 표현을 썼다고 이론을 수입했다고 말한다면, ‘정치적 조합주의’나 ‘경제적 조합주의’ 나아가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표현을 쓰는 이들에 대해서도 이론을 수입했다고 딴지를 걸어야 할 것이다.

필자기 보기에 노 교수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데 있다. 바로 사회적 교섭 테이블에서 노동과 자본 간의 계급 타협을 전제하고 있는 ‘사회적 조합주의’가 한국 노동운동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 어디에도 사회적 조합주의가 왜 한국에서 불가능한지에 대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언급한 대목은 없다. 다만 “곤봉과 정치공작이 난무하는 한국의 노동사회에서는 자랄 수 없는 불모의 이론이었기 때문”라는 표현에서 그의 의도를 짐작할 뿐이다.

한국에서 노사관계와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이론을 처음 수입한 쪽은 (노 교수가 잘못 알고 있듯이) 정부가 아니다. ‘식민지 시대’ 이론을 북한에서 수입하고, PD라는 ‘20세기 초반’ 이론을 러시아에서 수입한 ‘80년대 운동권들’이 최초의 이론 수입상들이다. 이들은 주로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이었는데, 이제 노동운동의 현장에 남은 이들은 별로 없다. 대부분 ‘소시민’이 되었고, 일부는 90년대를 거치면서 학위를 따 대학에 들어가 교수가 되었으며, 일부는 정치권에 들어가 관료나 국회의원이 되거나 정당에 몸담고 있다.

어쨌든 최초의 이론 수입상들은 대부분 사회적 평균 임금 이하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야 하는 노동자가 되기 싫었거나, 혹은 그 이유야 어쨌든 간에 정치인이 되거나 학자가 되거나 사장이 되거나 ‘뭔가’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노동운동을 비롯한 한국의 사회운동진영은 이들이 80년대에 수입한 낡은 이론과 정파의 유산에서 고통 받고 있다.

주장의 조잡함과 내용의 깊이 없음

‘사회적 조합주의’가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다면 왜 안 맞는지 자신의 글에서 밝히면 족할 것을 황우석을 빗대 “허위와 거짓”, “희대의 사기극” 운운하며 비난하는 글을 읽으며, “자신들의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며 “내용적 민주주의가 중요하지 형식적 민주주의가 뭐가 중요하냐”는 주장을 다시 접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다.

노 교수는 이렇게 썼다. “이들은 ‘하필이면’ 제3세계 중 남아공을 주목한다. 그리고 남아공에서도 사회적 조합주의를 적극 찬성하는 사람만을 찾아 인터뷰하며, 반대 이론과 이론가들을 애써 무시한다.” 노 교수가 주장하듯이, 필자는 남아공에서 사회적 조합주의를 적극 찬성하는 사람을 일부러 찾은 적도 없고, 그 반대 이론과 이론가들을 애써 무시한 적도 없다. 그리고 노 교수의 입장에서 필자의 인터뷰 내용이 그렇게 불만이었으면 “남아공에서도 사회적 조합주의를 적극 반대하는 사람을 찾아 인터뷰하고, 반대 이론과 이론가들을 소개하면” 될 일이다. 학위용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닌데, 필자가 생각하기에 방향도 틀렸고 내용도 조잡한 이론을 소개할 의무는 없다고 본다.

한마디만 덧붙이자. 이번의 남아공 방문에서 <엘리트 이행 - 아파르트헤이트에서 신자유주의까지>라는 제목의 “반대 이론의 대가”라는 사람이 쓴 남아공의 민주화 이행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솔직히 제목의 ‘화려함’에 비해 주장의 조잡함과 내용의 깊이 없음에 실망한 바 있다.

그리고 노 교수가 자신의 글 첫머리에서 밝힌 “진리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명제는 노 교수 자신의 명제이지, 일반적인 사회과학의 명제가 아님도 덧붙이고 싶다. 오히려 진리는 여러가지 사실적 측면을 갖는다. 이는 사회적 조합주의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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