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올해는 참으로 다사다난한 한 해였으며 괴로운 한 해였다. 지금 황우석 교수의 전 세계를 상대로 한 희대의 ‘쇼’를 지켜보아야 하는 일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더 전개될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과학과 이론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회의와 불신이 더 커질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세상에는 그렇게 ‘과학적인 것’은 없으며 과학의 이른바 ‘진리’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회과학의 명제가 더욱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한편 이 난리 굿판이 전혀 무익한 것만은 아니었다. 과학과 이론이 터무니없는 애국주의나 오도된 민족주의라는 사회적, 정치적 요소에 접목될 때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가를 우리 모두 지켜보았다. 또 우리 사회는 과학을 과학답게 만들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배웠다. 이 깨달음은 그나마 교훈이자 소득이었다. 세계적인 과학학술지 <네이쳐>도 척박한 한국사회, 학문풍토에서는 여지없이 3류 잡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묵직하게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에 관한 ‘과학’과 ‘이론’의 사정은 얼마나 다른가?

노동운동 '이론'과 '과학'의 현실

올해 노동사회에는 갖가지 스캔들이 난무하였다.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커다란 화두로도 묶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소속 상급단체를 가리지 않고 대기업 노동조합 간부들의 부정 비리가 연초부터 터져 나왔고 총연합단체의 핵심간부들의 비리도 계속되었다. 그중에서도 민주노총 최고위급 간부의 부정비리는 압권이었다. 그가 비정규 사업, 조직혁신 사업에서 설파했던 그 수많았던 말들과 ‘이론’ 때문에 그렇다. 또 비정규노동자와의 연대, 연대투쟁을 강조하던 대기업 노조, 현장조직의 무기력과 자기기만도 잊어버릴 수 없는 스캔들이었다. 화려하고 화끈한 이른바 ‘이론’은 결과적으로 기업노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5년에 빠트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스캔들은 이른바 ‘사회적 교섭’을 둘러싼 민주노총 내부의 갈등이었다. 대의원대회 단상에서 일어난 멱살잡이는 연말에 이르러 4기 지도부의 중도사퇴라는 또 하나의 난장으로 마감하였다. 이른바 ‘교섭과 투쟁의 병행’이라는 노동운동 기초이론이자 4기 지도부의 ‘새로운 이론’은 이렇게 일단 파탄으로 막을 내렸다. 또 단체교섭과 노사정교섭은 마찬가지이니 꼭 참가해야 한다는 ‘새로운 이론’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론들은 노동부장관, 대통령을 필두로 한 ‘참여정부’의 ‘참여 거부’와 ‘교섭’ 커튼 뒤의 ‘공작과 투쟁의 병행’으로 실패하고 만 것이었다.

또 이 과정에서 잊혀져선 안 될 또 하나의 스캔들이 있었다. ‘교섭 있는 투쟁’과 ‘투쟁 있는 교섭’이 만난다는 또 다른 ‘새 이론’은 다시금 불신과 상호 비난으로 일단 끝나고 말았다. 비정규권리보호입법을 둘러싸고 한 해 동안 계속되었던 양대 노총의 공조는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양대 노총의 통합’을 주장했던 ‘이론가’들은 이제 보다 ‘새로운 이론’과 논거를 다시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수입된 이론'의 허구성

이렇게 2005년 운동의 위기 뒤편에서는 이론의 위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노동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이론’은 그 종류나 내용이 매우 다양하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론이랄 것도 없는 ‘이론’도 있으며 ‘잘못된 비유’를 ‘이론’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2005년 우리의 경험은 별로 이론 같지 않은 ‘이론들’과 그 발생 원인에 대해 진지하고 겸허하게 반성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런데 진정으로 ‘운동의 위기’를 몰고 오는 ‘이론의 위기’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올 한 해도 계속된 ‘이론의 수입’은 그중 으뜸이 아닐까 한다.

먼저 ‘이론의 수입’을 주도한 것은 국가와 자본이었다. ‘네덜란드 모델’을 칭송하고 ‘이탈리아’와 ‘아일랜드’의 노사정 합의를 ‘사회 통합적 구조조정’이라고 선언하고, 선전한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외환위기 직후부터 계속된 이런 ‘이론의 수입’은 엄청난 물량공세를 바탕으로 노동운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황 교수의 허풍과 거짓과 마찬가지로 ‘수입된 이론’의 허구성이 드러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였다. 그 ‘수입이론’은 곤봉과 정치공작이 난무하는 한국의 노동사회에서는 자랄 수 없는 불모의 이론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초점이 되고 있는 로드맵도 ‘이론 수입’의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노사관계 선진화방안’이라 일컬어지는 정부의 노사관계 ‘개혁안’의 내용은 ‘서구 사례’의 오용과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다. 서구에 어떤 노사관계 법제가 ‘일단 존재하면’ 곧 한국사회에서도 정당성을 갖는다는 식이다. 사례는 일본, 미국, 영국 중 한 나라만으로도 충분하다. 쟁의 시 대체노동도, 공익사업에 대한 파업 제한도, 작업장 복수노조의 교섭창구 단일화도 모두 같은 근거로 합당한 ‘선진화’, ‘글로벌 스탠더드’가 된다. 식민지 지식 논리, 지식 수입상(輸入商)의 ‘학문’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복제되고 이식된 논리의 '위기'

특히 ‘이론의 위기’가 심각한 것은 넓은 의미의 노동운동 내부에도 문제가 널리 퍼져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 형태가 ‘이론의 수입’으로 국가 자본의 행태를 충실하게 반복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다만 그 대상이 단지 서구사회 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제3세계 사회를 포함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 하나의 사례를 보자. 남아공 노동운동 이론을 수입할 때 논리는 간단하다. 노조 총연합단체 코사투(COSATU)의 ‘사회적 조합주의(social unionism)’는 바람직하며 우리도 그 이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복제, 이식의 논리이다. 코사투를 따라 노사정위에 참여해야 하고, (신자유주의와의) 타협은 불가피하며, ‘최대강령주의’를 하루 빨리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 가능하다면 여러 노총들은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하필이면’ 제3세계 중 남아공을 주목한다. 그리고 남아공에서도 사회적 조합주의를 적극 찬성하는 사람만을 찾아 인터뷰하며, 반대 이론과 이론가들을 애써 무시한다. 또 그 ‘이론’이 남아공에서도 힘을 못 쓰는 이유를 말하지 않으며, 우리 노동운동에 대한 함의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암시할 뿐이며 세뇌효과를 노리는 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는 코사투와 ANC정부, 남아공 합의기구 NEDLAC이 한국의 양대 노총과 열우당 정부, 노사정위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양 노동사회의 차이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다. 나아가 불모의 땅에 복제되고 이식된 그 ‘이론’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결국 이 땅에 황우석 교수가 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 다른 황 교수들의 경우는 그 허위와 거짓이 한 번에 드러나지 않았고, 그 결과도 대중에게는 여전히 모호하며,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제 ‘생명공학 선진국’, ‘난치병 해결’이라는 꿈은 희대의 사기극으로 마감하고 있다. 그런데 자연과학이 아닌 사회과학, 그중에서도 노동 ‘학문’과 운동 ‘이론’은 얼마나 다른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사회 통합’의 꿈은 무엇으로 마감할 것인가? 한 해를 보내면서 스스로에게 반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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