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법 문제로 국회가 표류하면서 비정규직 법안의 국회 심사도 표류하고 있다. 이에 따라 비정규직 입법이 올해도 또 물 건너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가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있다. 특히 연내 입법이라는 전략적 기조를 설정하고 그 동안의 노사정 협상 결과와 국회의 정치지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수정안 형태로 ‘입법 마지노선’을 제시했던 한국노총으로서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그 누구보다 속이 상할 수밖에 없다.

비정규법안이 사학법에 밀리다니??

바보같은 질문 같지만 어떻게 비정규법이 사학법에 밀려 이렇게 표류할 수 있는가? 물론 사학의 공공성을 확보하고 사학의 비리를 해소하기 위한 제도적 틀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또한 한나라당 입장에서 보면 사유재산권 침해를 주장하는 재단(종교재단 포함)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도 의미 있는 ‘정치행위’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사학법 통과 문제로 비정규직 법안의 국회 심사가 표류해 연내 입법이 물 건너가서는 안 된다.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이야 여기서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당면 최대 과제가 빈곤과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라는 데에는 이제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빈곤과 사회적 양극화의 한복판에 아무런 법적 규제와 보호도 없이 극심한 차별과 남용에 시달리는 이 땅 850만 비정규 노동자들의 삶이 있다는 것도 이제 이념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사회적 사실로 자리 잡아 있다.

따라서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사회가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악화된 비정규직의 남용과 차별을 규제하고 보호하기 위한 비정규직 입법은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정작 속상한 것은 사학법 통과에 대한 반발로 비정규직 법안 심사를 하지 않고 장외투쟁을 벌이고 있는 한나라당이나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고 비정규직 연내 입법에 대한 집권여당의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등 이른바 ‘보수정당’들의 태도가 아니다. 이들이야 늘 우리의 투쟁대상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들을 투쟁대상으로 삼아 비정규법의 조속한 입법을 요구하고 싸워야 할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 민주노동당 등 ‘우리’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한마디로 그냥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사학법의 이른바 ‘강행 처리’에 반대하는 한나라당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그렇다고 재계의 속마음처럼 연내 입법에 반대하는 것인가? 누가 보아도 위의 두 가지 이유가 아님에도 그 어느 곳에서도 국회와 각 정당을 대상으로 연내 입법 요구와 투쟁을 하고 있지 않다. 물론 한국노총은 연내 입법을 요구하고 있지만 힘 있게 이를 위한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여야 정당보다 노동계와 진보정당 태도 더 속상해

이와 관련해 12월20일자 매일노동뉴스를 보면 <비정규법 심의 표류와 정당 손익 관계는?>라는 제목 하의 기사에서 소제목 형태로 열린우리당은 ‘손해’이고 한나라당은 ‘손익 0’이고 민주노동당은 ‘이익’이라고 붙였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도대체 무슨 이유로 민주노동당이 ‘이익’이라는 것인가? 기사 내용인즉 이렇다.

“민주노동당에게는 지금 상황이 더 낫다. 법안 소위에서 수적 열세에 밀려서 양보안을 강요당하는 것에 비해 국회 공전이 길수록 쟁점을 여론화시킬 시간도 벌고 정치적으로 해결할 가능성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한나라당의 등원을 촉구하면서도 비정규법 국면에서는 적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국회가 안 열리면 파병연장안도 처리하지 못하게 된다는 계산에 이르면 민주노동당은 내심 공전을 즐기는 표정으로 된다.”

정말 이것이 민주노동당의 '속마음'인가? 그렇다면 수적 열세는 언제 극복될 것이고 그 수적 열세가 극복될 때까지 비정규직의 남용과 차별에 대해 아무런 법적 규제와 보호가 없는, 지금같은 무법천지가 계속되는 것이 좋다는 뜻인가? 그리고 국회 공전이 길수록 ‘쟁점을 여론화시킬 시간’을 버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법 자체가 쟁점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작금의 상황이 잘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줄기세포나 황우석 논란 때문만이 아니다. 국회에서 입법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쟁점이 여론화되는가? 이는 지난 4월 국가인권위 의견 표명을 정치적 계기로 양 노총 위원장이 공동 단식농성을 하면서 국회에서 노사정 협상이 벌어지니까 비정규 법안이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가 국회가 끝나고 노사든 노사정이든 협상이 재개되지 않으니까 6개월 넘게 사회적 쟁점에서 사라진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시간이 흐른다고 조만간 국면을 획기적으로 돌파할 카드가 있는가? 더욱이 “민주노동당이 이라크 파병 연장안 처리 문제로 국회 공전을 내심 즐긴다”는 위의 기사가 사실의 일단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민주노동당 내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입법 저지’를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게 더 정직할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사학법 제정에 찬성하며 따라서 이번에 민주노동당이 자신의 원안에서 일부 후퇴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열린우리당 및 민주당과 국회 차원의 공조를 한 것을 적극 평가한다. 이는 전교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만약 민주노동당이 자신의 원안만을 고수하면서 사학법 국회 통과에 협조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국회 정치지형을 볼 때 사학법 자체가 통과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학법 제정 과정, 비정규법과 마찬가지

비정규법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누차 강조했지만 한국노총도 비정규직 사용사유의 엄격한 제한 등 노동계의 애초 요구가 100% 관철된 법안을 원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민주노총 및 시민사회단체, 민주노동당과 함께 나름대로 열심히 투쟁도 했고 협상 국면을 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결코 적지 않은 성과를 내었다. 따라서 이제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 민주노동당 등 ‘우리’는 우리의 투쟁성과를 일단락 하기 위한 타협을 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1997년 IMF 이후 신자유주의 및 노동시장 유연화 논리의 확산과 지배 하에 비정규직이 급속하게 확대되어 이제 전체 노동자들의 반이 넘는 850만의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되도록 그 남용과 차별을 규제할 수 있는 법 하나 만들지 못했다는 것은 의아할 정도이다. 무려 8년의 세월인데, 우리 노동계가 무심했던 것도 아닌데, 그리고 우리 노동계가 그렇게 힘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올해를 또 이렇게 보낼 것인가?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 민주노동당 등 ‘우리’가 한목소리로 요구하고 투쟁한다면 비정규직 연내 입법은 사학법처럼 가능할 텐데 또 이렇게 보내야 하는가? 지금은 한목소리로 연내 입법을 요구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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