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지도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국회의원들이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처럼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데 해묵은 이념논쟁으로 낡은 정치집단의 이미지를 복원시켜 국민들의 원성을 살 것이 두려운가 보다. 더구나 예산안 처리까지 거부하면서 그깟 바지 입고 거리로 나서야 할 만한 명분이 없다는 판단이 들 것이다. 그런데도 한나라당 지도부는 비분강개의 연기를 멈출 태세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가? 손발가락으로 꼽을 만한 비리투성이 사학재단의 기득권을 방어하는 문제인가, 아니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와 국민들의 황폐한 삶을 개선하는 일인가? 당연히 후자이지 않은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는 하나같이 민생이 최우선이라고 주장하면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양극화 해소를 위해 국회의원들이 나서겠다”고 공언해놓고는 당사로 돌아가기만 하면 당리당략과 특권층 보호에만 열을 올리고 있지 않는가?
입으로만 민생 찾는 국회의원들
비정규법안은 벌써 5년째 국회의원들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비정규공대위가 입법청원을 제출한 것이 2000년 10월의 일이다. 2000년 8월 당시 758만명이던 비정규직 노동자 수는 2005년 8월 현재 82만명이 늘어난 840만명에 이르고 있다.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총액 비율은 2000년 8월 53.7%에서 2005년 8월에는 50.9%로 훨씬 더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 현재의 상태를 방치할 경우 비정규직 규모는 머지않아 900만명 수준을 훌쩍 넘어설 것이다.
필자는 2002년 3월 한국사회포럼이 주최한 <연대와 성찰 2002> 토론회에서 발표한 글을 통해 “우리 사회는 지금 과거부터 누적돼 온 각 부문의 양극화, 즉 대기업과 중소기업, 성장산업과 사양산업, 대도시와 지방의 격차 확대에 추가하여 각각의 영역 내부에서도 극단적인 차별과 배제의 구조가 거대한 시스템으로 정착되면서, 사회의 모든 영역이 중심과 주변의 관계로 위계화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사회운동의 반성적 연대에서 찾자고 호소한 바 있다.
당시 일부의 사람들은 비정규직 문제와 사회 양극화를 연결짓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2003년 7월 <개혁당> 노동위원회가 주최한 다른 토론회에서는 같은 요지의 필자의 발언에 대해 “양극화의 원인은 고용구조가 아니라 자산시장의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며 부동산 문제 해결에 초점을 둬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중앙은행은 물론 재벌대기업의 연구소들조차 우리 사회의 분절과 양극화를 우려하면서 “노동시장의 불평등이 구조화되고 있는 것이 양극화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국회가 빨리 매듭을 지어야 한다. 지난 9일 이후 중단된 국회 환노위 법안심사소위를 조속히 재개해야 하며 환노위 전체 의결을 거쳐 이라크파병연장동의안의 처리 이전에 국회 본회의에 상정해야 한다.
한국노총 안, 현실성과 실효성을 고려한 것
한편 이번 기회를 빌어 한국노총의 최종안에서 양보안으로 지적된 ‘사유제한 포기’와 ‘불법파견 고용의무’에 관해 해명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비정규직의 절대다수는 기간제 또는 임시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기간을 정한 경우가 255만명(17.0%)이며 기간을 정하지 않았으나 임시직 또는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는 경우가 321만명(21.4%)이다. 전체 임금노동자의 38.4%에 달하며 비정규직 노동자의 66.7%에 이르는 비중이다. 특히 기간제고용은 2004년에 비해 73만명이나 늘어나 급증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기간제고용의 남용을 규제하는 방식은 사유제한과 최장기간 제한, 반복갱신의 횟수 제한 등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참고로 유럽연합(EU)은 이 중 한 가지 이상을 각국의 법률에 명시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강력한 남용규제 장치는 사유제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정규직 고용을 원칙으로 하되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업무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기간제근로를 사용토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채용단계에서 이미 업무의 일시적 성격이 사전 입증돼야 하기 때문에 당사자인 노동자 개인보다는 조직된 노동조합의 힘과 잘 정비된 단체협약 등으로 뒷받침돼야만 그 실효성이 보장될 수 있다.
어떤 노동자가 자신을 고용하는 사용자를 상대로 “내가 할 일은 상시업무인데 왜 계약직으로 쓰는 겁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또한 민주노동당의 수정안대로 사유제한의 폭을 10가지 정도로 대폭 넓히고 탄력적으로 운용하게 될 경우 정당한 사유의 입증 문제는 더욱 모호해질 가능성이 높다. 근로계약의 체결 시점에서 다툼이 발생할 경우 그 해결 절차 역시 마땅하지가 않다.
나아가 정당한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결국 정규직이나 간접고용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열린우리당에서는 사유제한을 할 경우 중소기업의 실업이 급증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정작 현실적인 문제는 해고나 실업의 문제가 아니라 수십만 개의 기업들이 법으로 강제된 사유제한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지 암담하다는 점이다.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가. 결국 엄청난 편법과 불법계약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잘못된 현실을 방치하자는 것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기업을 범법자로 만드는 법률은 도입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선진국의 경우 비정규고용을 규율하는 수단은 크게 법률과 단체협약으로 나뉜다. 예컨대 스웨덴의 경우 법률상 아무런 제한이 없지만 산업별 단체협약에 의해 사유와 최장기간 등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비교적 조직률이 낮은 네덜란드의 경우에도 단협을 통한 규제가 중심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향후 사유제한의 문제는 추가적인 입법과제로 남겨 놓되 초기업 수준의 단체협약을 통해 기간제근로가 허용되는 범위를 해당 산업이나 지역의 노사가 합의하도록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간 만료 이전에 비정규직을 해고하고 또다른 기간제나 파견으로 대체하는 것을 금지하는 문제도 단협 내용에 포함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불법파견에 대한 고용의제를 포기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변명의 여지가 없다. 법으로 금지된 업무에 파견근로를 사용했다면 그러한 근로계약은 당연히 무효로 돼야 하고 해당 노동자를 사용업체가 직접 고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불법파견에 대한 처벌조항만 둔 채 직접고용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기업에 대해 과태료 처분만 하도록 하는 것은 규제의 실효성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한국노총이 고용의제를 양보한 것은 독점자본의 강력한 영향 하에 있는 국회 상황을 고려한 것이 분명하다.
국회, 비정규 입법화를 최우선 순위에 둬야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사유제한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는 민주노동당이 불법파견에 대한 고용의제를 관철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본다. 두 가지를 모두 얻기가 어렵다면 사유제한을 포기하는 대신 시민단체와 여성노조, 노동계 모두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불법파견 문제에 집중하는 방안을 선택하자는 것이다. 법 논리적으로나 실효성 면에서 정당성이 두루 인정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유제한이 꼭 포함돼야 한다면 2년을 초과하는 기간제근로에 대해 적용하는 방안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장기프로젝트로 추진되는 사업의 경우 2년이라는 기간제한이 기계적으로 적용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현재 장기간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사유가 정당할 경우 2년 이상 근무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초기업 노사간의 합의가 있는 경우 2년을 초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안도 반드시 악용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필자의 부끄러운 결론은 다음과 같다. 비정규법안의 53개 쟁점 가운데 42개가 이미 합의되었다. 국민들의 비난과 원성을 자초하지 말고 한나라당은 비정규법안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국회에 복귀해야 한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외투쟁을 접는다고 선언한다면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의 인기는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전략적인 선택지를 다시 한번 고민해주기 바란다. 민주노동당이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괄하는 명실상부한 진보적 대중정당으로 발전하기를 원한다면 전략적 고민과 현실적 선택을 조화시키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국민의 대표가 국민을 외면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