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노동운동의 화두는 단연 비정규직이었다. 필자가 기억할 수 있는 대부분의 투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만들어 냈다. 하이닉스매그나칩, 현대자동차비정규노조, 울산지역건설플랜트노조, 현대하이스코비정규노조, 이마트, 한원CC, 기륭전자, 덤프연대, 산업인력공단비정규노조투쟁. 청소용역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최저임금투쟁 등 2005년 노동운동은 비정규직에 의한 비정규직의 투쟁이었다.

투쟁이 끊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투쟁의 전투성도 단연 돋보였다. 최저임금심의위원회 점거농성, 현대하이스코 노동자들의 고공 농성, 경찰을 완전히 무력화시킨 울산지역건설플랜트노조의 전투성 그리고 현대자동차비정규노동조합의 완강한 저항 등은 전노협 시절성을 연상하게 하는 치열한 모습이었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던 필자와 같이 힘 빠져 있던 노동운동가들에게는 크나큰 용기와 감동을 준 투쟁들이었다. 

대비되는 두 노동운동의 모습

그것은 단순히 전투성의 부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2005년 전체 한국사회의 심각한 의제로 부상했던 신자유주의 양극화의 주요 축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이 부각되면서 동력의 측면에서는 노동자 계급 내부 동력에 기초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 의제가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사회운동성 회복의 단초를 연 투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2005년은 87년 대투쟁을 통해 성장해온 민주노조운동의 구심,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구심인 민주노총이 극한적인 위기감에 휩싸인 한 해로 기록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기아자동차 입사비리로 시작되어 마침내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의 구속 사태로까지 치닫게 된 노동계 비리 사건으로 노동운동은 도덕성마저 의심받는 지경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노사정교섭 방침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연이은 무산과 그 과정에서 발생했던 폭력사태는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민주주의 작동이 극단적으로 마비되어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았다.

또한 남한 민주노조운동의 몸통이라는 현대자동차노동조합이 보여준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철저한 외면은 실리주의에 빠진 대기업 노동조합운동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곳곳에서 노동운동이 위기에 빠졌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실제로 민주노총 10주년을 기념해서 열린 ‘민주노총의 현재 그리고 미래’ 라는 주제의 토론회에 제출된 민주노총 발제문의 제목조차 ‘민주노총의 위기 요인과 혁신방안’이었다.

이렇게 대비되는 두 노동운동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전투성과 사회운동성이 회복되는 추세를 보이는 희망적 메시지와 민주노총의 비리, 대기업 노동조합의 협조주의, 실리주의화 경향, 노동운동 내부의 민주적 의사소통의 해체와 난무하는 분파주의 등에서 드러나는 절망적 메시지가 동시에 나타나는 이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005년 노동계 투쟁의 화두였던 비정규 투쟁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비정규보호입법 쟁취 투쟁’이 진행 중인 여의도 국회 앞 천막촌의 모습에서 필자는 이러한 의문을 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민주노총 단기 정세 대응에만 익숙

주지하다시피 지난 1년 동안 ‘비정규 법안’은 비정규 노동자들의 강화된 투쟁 역량, 조직역량의 성장에 힘입어, 그리고 객관적으로는 사회 양극화와 빈곤층 증대라는 조건 속에서 핵심적 사회 이슈로 제기될 수 있었다. 850만명의 이해관계가 걸린 법인만큼 노자간 대립도 첨예했고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다른 노동 사안에 비해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이러한 정세를 예상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능동적으로 준비하지 못했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비정규 노동자의 투쟁 동력을 중심으로 정세를 읽고 힘을 집중해서 큰 투쟁 판을 짜려는 노력 자체가 매우 불충분했다. 자본과 정권은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형성되는 대중 동력과 조직화된 투쟁의 구심 민주노총이 결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민주노총을 때로는 ‘부패한 비리집단’으로 때로는 자기 실리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집단’으로 매도하면서 공세를 퍼부었고 이를 통해 조직화된 노동운동과 비정규직 투쟁과의 연대를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이러한 자본과 정권의 전략에 대한 정세 인식 자체가 매우 취약했다. 그저 주어진 단기 정세에 대한 대응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비리가 터지면 사과, 핵심지도부가 연루되면 사퇴, 투쟁이 일어나면 그 때 그 때 지원하는 식의 단기적 대응이 반복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단기 대응을 둘러싼 전술적 차이를 극단적으로 갈라쳐 도저히 같이 할 수 없는 정도의 차이인 양 부풀리는 고질적 분파주의도 단기주의를 더욱 부추겼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정부가 비정규법안 강행을 준비하는 동안 민주노총은 사퇴공방을 벌이고 있지 않았던가!

그 결과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비정규 동력을 모아 입법 투쟁으로 집중시키는 지도력은 전혀 발휘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상하게도 치열한 비정규 단위들의 투쟁과 우호적인 사회적 분위기에도 비정규입법안의 주도권은 자본과 정권이 쥐게 되었다. 국회가 열리는 때만 되면 비정규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정권의 위협이 어김없이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노동운동은 이를 막는 수세적 위치에 놓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기국회에서 정부가 법안통과를 밀어붙이는 상황이 조성되자 이제는 노동운동의 목표가 ‘개악저지’인지, ‘입법쟁취’인지 조차 매우 모호한 것이 되었고 정작 법안 처리가 구체화될 때는 총파업을 단행했지만 투쟁 동력은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실제로 여의도 총파업 집회에 나온 민주노총 지도부들의 연설은 대부분 투쟁의 불가피성을 강조할 뿐 이 파업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명료하게 얘기하지 못한다. 반대, 저지, 분쇄를 위한 투쟁에 익숙해 있던 민주노총의 지도부들로서는 이 법안의 문제점을 성토만 할 뿐 지금의 힘 관계를 변화시킬 그 어떤 투쟁의 플랜도 제출하지 못했다. 투쟁 동력을 모아서 집중된 힘을 바탕으로 얻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지 않을 때 운동은 대중화 되지 못한다. 그래서 투쟁은 불가피성으로 출발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대중화 되지 못한다. 

민주노총의 위기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동력
이 지점에서 민주노총 지도력의 위기가 놓여있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투쟁동력을 모아 입법쟁취와 같이 한 단계 높은 투쟁으로 끌어올리려는 목적의식 없이 국면의 주도권을 자본과 정권에 빼앗긴 채 끌려다니며 반대, 저지 하는 식의 수세적 대응, 단기적 대응이 실천적으로 본다면 위기의 일차적 원인이다. 물론 지금 세계적 수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노동운동 위기의 모든 원인을 민주노총의 지도력 탓으로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때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자랑하던 한국의 노동운동이 이렇게 빠르게 신자유주의에 맞선 대응력을 상실한 데는 민주노총 지도력의 탓이 크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기업별노조 체계, 변혁적 정치 전망의 취약함 등 보다 근본적인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러한 장기적인 과제 이전에 당장 투쟁의 구심으로서의 역할조차 버거워하는 민주노총의 지도력의 문제는 심각하다.

물론 이것이 민주노총 지도부 개개인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시스템과 기풍의 문제일 것이다. 그 때그 때 자본과 정권이 조성한 국면이 속에서 반대하고 저지하는 단기적 대응방식으로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투쟁을 중심으로 동력을 키워 내고 그 힘으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강화하지 못한다. 따라서 민주노총이 투쟁 동력 중심으로 운영되고 지도될 수 있도록 시스템과 기풍을 바꿔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주노총의 지배구조부터 투쟁 동력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전체 노동자의 57%이며 민주노총 투쟁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가 민주노총의 의결구조 및 집행구조에 충분히 포함되도록 민주노총 지배구조를 바꿔야 한다. 아무리 투쟁해도 돈 안 내면 대의원 배정을 하지 않지만, 투쟁 한 번 안 해도 버젓이 돈만 내면 권리 행사 하는 데 아무런 지장 없는 지금의 기풍, 투쟁 따로 의사결정이 따로 노는 현실 반드시 혁신해야 한다.

그람시가 얘기했듯 위기는 낡은 것이 소멸하는데 새로운 것이 출현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의 민주노총의 위기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동력이 형성되고 있는데 이를 민주노총이 받아 안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한국노총과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투쟁을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점 아니겠는가! 이제 투쟁 중심의 민주노총이 되기 위한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진지한 혁신 노력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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