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끝나고 나는 회사를 관두었다. 학교를 졸업하며 소시민의 길을 택했던 나는, 스물아홉 해를 맞이하며 민주노동당 상근활동가가 되고 싶었다.

낯선 길로의 첫 진입로로 충남 공주가 아닌 부산을 택했다. 충남 공주에도 상근활동가가 필요했지만, 아무래도 25년을 살았던 ‘나와바리’이니 좀 덜 낯설 것 같았고, 회사 다닐 때에 비해 반밖에 안 될 수입으로 자취하며 산다는 것은 무리였다.

더 주요하게는 좀 체계적인 지구당 속에서 새맘으로 당의 기본부터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나 또한 진보정당운동에 ‘초짜’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 (물론 별로 한 건 없이 깃발만 잡고 있었지만) 그것은 큰 부담스러움이었다. 다행히 공주엔 상근하겠다는 사람이 있어, 미안한 마음을 품고 부산으로 왔다.

민주노동당 상근자 되기

▲ 손은숙(29) 민주노동당 부산 해운대구위원회 조직부장은 4·15 총선 이후인 2004년 8월부터 민주노동당에서 상근활동을 시작했다. 직장인이며, 열혈당원으로 활동하던 그가, 지역 상근자를 시작하기까지 과정, 지역상근자로 활동을 시작한 후 겪는 일상사업의 난맥과 보람들을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털어놓을 것이다.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은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을 전국 최고의 득표율로 당선시키는 저력(?)을 보여준 지역, 부산 북구였다. 그곳엔 이미 상근활동가가 있었고, 한명 더 채용할 재정적 여건은 안 됐다. 민지네나 진보누리를 통해 알게 된 부산당원들의 고급정보(?)에 따르면 세 군데 지구당에서 상근활동가를 구하고 있었다. 그 중 정파적 대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해운대·기장 지구당을 택했다. 내게도 정치적 경향성은 있으나, 상근활동을 처음하면서부터 거기에 얽매여 자의든 타의든 활동의 제약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3대1의 경쟁률 속에 당당히(?) 합격했다. 거주지가 해운대가 아닌 내가 합격된 건, 다른 지원자들이 입당한 지 얼마 안 되어 당 활동의 경력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주노동당도 경력자를 우대했던 것이다.

출근 후 일주일 뒤 사무실 개소식이 잡혀 있었다. 나의 직책은 조직부장. 당원명부를 뽑아드니 당원이 무려 280여명, 부산에서 꽤 규모 있는 지구당이었다.

상근 인사와 함께 개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쭉 돌렸다. 상근자도 사무실도 없어 ‘사고지구당’이라 불리던 오명을 벗고 새롭게 출발하는 해운대·기장 지구당 개소식엔 많은 외부인사와 지구당 당원들이 참석했다. 낯선 사람들의 홍수 속에 정신없고 긴장돼 그날의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수지는 맞았고 그때부터 민주노동당 지구당 상근자로서의 나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지역 내 연대에서 지구당의 역할은?

아직도 태양이 뜨겁기만 한 8월의 마지막날 해운대 당원이자, 부산지역 일반노조 위원장인 이봉주 당원이 해운대구청 앞에서 16일째 단식농성 중이라 방문했다. 해운대구는 지역의 쓰레기 수거를 대부분 청소용역업체에 위탁·관리하는데(부산의 모든 구가 그렇게 용역이다) 그 중 한군데인 ‘해동환경’이라는 사업장이 구청에 용역보다 낮은 임금을 노동자에게 지급하고 있었다.

황당한 것은 그 청소용역 회사의 실질적인 소유주는 해운대구 구의원이라는 것이었다. 지방의 기초의원이라는 자리는 그렇게 자신의 이윤추구의 자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그 구의원은 “구청용역대로 임금을 지급하라”는 노동자들의 상식적인 요구에 직장폐쇄로 답을 했다.

주민세금으로 용역을 주면서 해당 업체를 제대로 관리감독 않았던 해운대구청은 사실관계가 밝혀졌음에도 규정상 처벌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수수방관하고 있어 해를 넘겨 지난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 곳곳은 비상식이 힘의 논리로 관철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합원이 12명밖에 되지 않는 해동환경의 투쟁에 민주노동당 해운대·기장 지구당이 할 수 있는 일은 생수 한 통 사가서 진행상황을 들어보고, 집회가 있으면 선전물 만들어서 참여하고, 민주노동당 명의로 구청 앞에 현수막 하나 내거는 거였다.

지역 내의 노동자 투쟁에 연대할 때 그거 이상 당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후 이어진 지역의 작은 사업장 투쟁의 연대 방식은 다 그러했다. 그렇게 밖에 못했음에도 그 투쟁과정에서 조합원들은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었다.


분회가 되니 사람이 모였다

말로만 듣던, 충남 공주에선 해보지 못했던 당의 기초조직, 분회를 가동시켰다. 동네별로 묶은 지역분회 8개와 대우정밀 직장분회 1개에 운영위원들이 임시분회장으로 하나씩 맡아 분회를 책임졌다. 각각의 상황과 처지가 다르지만 한달에 한번 분회를 정례화 시켰다. 시간 되는 운영위들은 이동네 저동네 할 것 없이 함께 쫓아다니며 당원들을 만났다.

분회모임 다음날 간단한 후기와 함께 사진을 올리니 자연히 게시판이 활성화 되어 갔다. 지구당의 모든 운영위원이 노동자여서 공장을 마치고 저녁 분회모임에 참석했지만 피곤한 기색 없이 다들 신나했다. 분회가 안정되어 가면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얼굴’이 한 사람이라도 나오면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 또한 아주 행복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또 아무 생각 없이, 손발을 움직여야 하고 말을 해야 하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아 되는 삶이 기뻤고, 나의 움직임으로 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게 행복했다. 그렇게도 나의 경제활동이 영위된다는 건 복 받았다 생각했다.

지역분회 당원들의 구성은 다양했다. 당 명부엔, 당 초기에 의무방어전으로 입당했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실제 지역분회 모임에 나오는 당원의 구성은 다양했다. 자동차정비 노동자, 장의사, 닭 도매업자, 영양사, 주부, 구청청소용역 비정규직노동자, 사진사, 화가, 단체활동가, 공무원 당우, 화물노동자 등등.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을 거치며 당의 확대 속에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민주노동당이라는 테두리로 묶였던 것이다.

분회모임을 통해 한달간 자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레 현안 투쟁 사업장 이야기가 나오고, 공무원에게도 노동3권이 왜 필요한지, 지금 영세 자영업자들이 얼마나 힘든지. 그렇게 각자의 생활이 이야기 속에 민주노동당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서로 공유되어 갔다.

주민과 함께 하는 사업은 어렵다

물론 잘 안되는 분회도 있었다. 특히나 직장분회였던 대우정밀이 그랬다. 조합원 당원이 한 50여명 있었고 다들 평균 근속연수가 15년이 되는 노동조합 활동의 베테랑들. 그래서 당 분회모임이나 활동이 더 어려웠다. 노동조합과 다른 당 활동이라는 게 선거 때 외엔 딱히 없었고 선거 때도 노동조합 활동의 일환으로 생각되었기에.

그래서 분회총회를 열어 직장분회를 해소하고 지역로 돌기로 결정했다. 거주지가 타 지역인 당원들은 해당 지역으로 당적을 변경하고 사원아파트에 사는 당원을 제외하곤 지역분회로 재배치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원아파트에 사는 당원이 다수여서 그 동네 분회는 어렵기만 했다. 더욱이 그곳은 기장군의 서쪽끝에 붙어 있고, 너무 멀어 한번 가기가 쉽지 않았다.

당 직장분회의 내용과 정형을 답을 찾는 것, 그것은 당원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노동조합 당원들을 더이상 돈만 내는 당원으로 전략시키지 않는 길일 것이다. 어렵다.

그렇게 해운대·기장 지구당은 당원들을 묶어세우는 사업들로 총선 이후 2004년을 보냈다. 즉, ‘당원’이 ‘대중’이 되는 사업이 지구당의 주 활동이었다. 지역별로 정도가 다르겠지만 4·15 총선으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생겨도 민주노동당의 기초 지역조직은 지역 주민과 함께 하는 사업을 벌여 내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우리 당원들은 다른 국민들처럼, TV와 신문을 통해 국감에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의 활약을 뿌듯해 하며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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