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월급은 80만원 가량이다. 우리 월급날이 25일임을 감안하면 이제 곧 6개월째 체불이 된다. 집에다 손 벌려 얻어 쓴 돈과 동생에게 빌린 돈. 재정과 관련해선 할 말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노동일보의 발전과 미래, 노동자언론의 사명 공동대표제에서의 편집권독립 등을 염려한다.”(2002년 1월 우은식 전 노동일보 노조위원장)

“1억여원 빌린 돈을 아예 갚을 생각을 안해서인지, 4억여원의 돈이 됐다. 돈의 액수보다 마음보가 괘심하다. 아버님 산 명의로 대출받은 것도 내가 그만두고 나서는 아예 이자를 갚지 않아 억대의 돈을 개인적으로 갚아야 했다. 주간지 초기 때부터 고생했던 이들을 쫒아냈던 이들이 결국 그 손으로 폐업신고까지 하고서 신용불량자라는 딱지까지 내게 붙이고 있는 것이다. (중략) 노동일보가 폐업했다는 정말 믿을 수 없는 말을 작년에 듣고 그 자리를 기웃거렸던 기억이 어제일 같다. 가슴 쓸어내린 적이야 한 두 번이 아니지만, 허물어 내리는 기분은 처음 느꼈다.”(2004년 10월 심복자 전 노동일보 편집인)

노동일보 노조게시판과 심복자 전 편집인(이태복 발행인의 아내)의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내용의 일부이다. ‘실패’라는 쓰라린 상채기는 오랜 세월 핥아도 핥아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과도 같이 남아 있다. 박봉과 열악한 환경에서도 임직원들은 저마다의 희생과 열정으로 노동언론을 뿌리내리기 위해 노력했고, 그만큼 좌절감도 클 수밖에 없다.


노동일보, 노동계를 올곧게 대변했나?

노동자언론은 과연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며 의식화, 조직화에 복무했는가? 숱한 노동관련 매체들이 생성, 소멸을 거듭하고 가운데 노동자에 기반한 종합일간지를 표방했던 ‘노동일보’를 다시 살펴보는 것은 노동언론의 미래를 열어갈 유의미한 작업일 것이다. 99년 7월 창간해 2003년 6월 폐간까지 4년여의 노동일보 실험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화두는 작지 않다. 노동일보의 전신인 ‘주간노동자신문(이하 주노신)’을 포함하면 14년이란 엄청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임직원의 퇴사와 사무실 이전 등 내부의 뒤숭숭한 분위기는 평가할 근거자료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만들었다. 몇몇 개인들의 평가만 있을 뿐 노동일보 (대표)이사진 또는 노조라는 책임단위에서의 공식적인 평가는 아직 없다.

자료의 빈곤 속에서 애초 정확한 평가를 기대하기란 역부족이었다. 또한 주노신과 노동일보를 창간한 이태복 전 발행인은 <매일노동뉴스>의 수차례 인터뷰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사측과 노조원들의 구두증언과 노동조합 게시판을 통해 노동일보의 실패와 교훈을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99년 노동일보의 출발부터 살펴보자. 창간정신의 하나인 ‘IMF 관리체제 조기 극복’아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반대하며, 해외매각이 능사가 아님을 지적한 것은 노동일보의 존재이유를 확실히 드러냈다. 해외매각 반대 주장은 이후 노조의 투쟁목표로 설정되는 등 노동일보는 노동계 내에 일정한 방향성과 의제를 제시하며 영향력을 드러냈다.

지난 89년 창간한 주노신까지 연장하면 그 의미는 실로 대단하다. 주노신은 당시 전국의 사회과학 서점 등에서 광범위하게 배포되면서 학생과 노동자의 벗으로 다가간다. 전노협 신문과 경쟁체제를 이루던 주노신은 한때 이익잉여금 2억여원을 확보하는 등 성공을 거두며 지난 93년부터는 주2회 발행을 하게 된다.

당시 주노신에 근무했던 한 기자는 이태복 당시 발행인이 “‘95년도에는 일간지를 만들겠다’며 호언장담했다”고 말했다. 일간지에 대한 전망은 허황된 꿈만은 아니었다. 99년 7월 마침내 노동자에 기반한 종합일간지 ‘노동일보’가 만들어진다.

그간 노동일보의 숱한 특종은 노동언론의 존재이유를 잘 보여준다. 2001년 5월 노동일보는 ‘정관계 인사 아들 병역면제 명단’이 담긴 문건을 폭로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2002년 11월 ‘한국은 노조공화국인가?’라는 매경의 기획기사가 대한상공회의소의 돈을 받고 쓴 대가성 기사임도 폭로했다. 또 산자부가 발전산업노조의 해체를 유도하는 문건을 작성한 사건 등의 기사화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발행인의 정계진출 노동계 ‘끊임없는 경계’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노동일보는 전신인 주노신 때부터 줄곧 발행인인 ‘이태복의 신문’으로 불렸다. 이태복씨가 2001년 3·26 개각 때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으로 정치권에 들어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재야운동가인 오충일 목사(현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 위원장)가 새 발행인으로 나섰지만, 이태복 회장의 그림자는 짙고 무거웠다. 이태복씨 개인의 정치적 행보에 따라 ‘친한나라당’, ‘친민주당’, ‘친한국노총’, ‘반민주노총’ 등으로 규정 당했기 때문이다.

노동일보는 93년 이태복씨의 신한국당 입당 파동 무렵, 한나라당에 우호적인 기사가 많이 나온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다 이태복씨가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으로 입각하자 이제 얼마 뒤에는 민주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사가 지면을 메우기 시작했다.

논조의 불명확성과 관련 김보헌 금융노조 외환은행지부 전문위원(당시 사회부장)은 “노동일보의 논조는 일부 경영진의 정치적 입지에 따라 오락가락 했다는 일각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며 “확실한 이념적 지향을 노동자들에게 제시하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발행인의 여러 차례에 걸친 정치권 저울질 및 정계진출이 불러온 파장은 엄청났다. 노동계는 ‘배신자’ ‘두 번 속지 않는다’ ‘그럼 그렇지’라며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노동계 일각에서는 보도자료나 취재요청조차 하지 않아 노동일보가 물먹는(기사화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생겨났다.

노동계로부터도 외면당하는 노동언론의 기자. 당시 노동일보 한 기자의 애환은 이를 잘 보여준다. “노동일보가 웬일로 여기까지 왔느냐, 노동자의 목소리도 대변하지 않고 이태복이 청와대 들어가면서부터 노동일보는 변했다느니. 30분여 욕을 먹었다. 난 이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나와 버렸다. 한참을 울고 나서 그래도 취재는 해야겠다싶어 다시 올라갔다.”

노동일보는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노동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는데 실패했다. 창간당시 발행주식은 주노신 5만주를 포함해 12만주에 머물렀다. 주주구성도 금융 3만주, 도로공사 2만주, 한전 1만주, 정투연맹 산하 1만주 등 ‘범노동계’란 말이 무색했다. 대주주의 대부분은 한국노총 산하 조직이었으며, 민주노총은 개인별로 소액주식을 구입하는데 그쳤다. 민주노총의 조직적 결의를 모아내지 못한 것은 당시 이태복 발행인의 정치적 입지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동일보 출범 초기의 종자돈 부족은 이후 ‘저임금, 저성과, 저효율’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었다. <상자기사 참조> 

재정·인력의 한계, 구구주먹식 경영·편집권 침해

기자들은 70~80만원대의 활동비조로 지급되는 월급으로는 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이마저 체불임금이 생기면서 기자들은 하나둘씩 노동일보를 빠져 나갔다. 빈 자리는 신입기자들로 채워졌다. 창간초기 몇몇 부장급 기자를 제외하면 5년간 경력직원의 유입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는 것이 당시 직원들의 설명이다. ‘맨파워’가 중요한 신문사로선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적은 인력으로 면을 메우다 보니 무리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마감시간은 2시30분. 데스크는 오늘부터 현장취재(기자회견 등)를 되도록 하지 말라는 고육책을 내놓았습니다. 터무니없는 마감시간은 조간신문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현장취재를 마음껏(?) 할 수 없는 취재환경은 노동일보라는 회사가 기자에게 선사한 선물이지요.” 2002년 월드컵 당시 한 취재기자의 고충이었다.

경영이 어렵다보니 경영진은 창간 이후 줄곧 영업과 기사를 연동할 것을 직간접적으로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와주지도 않는 OO들, 기사 넣어서 뭐하나?” “이건 빼고, 이건 키워라.” 경영진의 편집권에 대한 침해도 공공연하게 벌어졌다다는 것이 당시 기자들의 설명이다. 또 이태복 전 발행인이 친인척을 인사회계 책임자로 앉히고 직접 수입, 지출을 챙기면서도 제대로 된 회계감사 한번 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구구주먹식 경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동일보 노조가 설립되기 전 “사용자는 할 수 없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던 이태복씨는 2000년 3월 결국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후 2000년 11월 노조 설립 무렵 이태복씨의 아내인 심복자 편집인도 회사를 그만둔다.

2002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우은식 노조위원장은 “우리는 ‘이태복의 노동일보’가 아니라 환골탈태한 우리의 노동일보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했지만 환골탈태는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정보통신면을 강화하겠다면서 편집부국장이 대뜸 하는 말이 광고 얼마나 되겠냐고 묻더라. 회장이란 사람도 입사할 때 ‘신용거래증명서’를 떼어 오라고 합디다. 불쾌해서 안갔죠.” 2002년 가을 노동일보 취재기자 면접을 본 이 아무개씨의 증언은 추락하는 노동일보의 끝을 예견하고 있었다.

경영악화, 신임 회장의 정계진출 시도, 노조의 악수

2001년 오충일 발행인 체제에서 경영악화는 계속되었고, 노동일보는 결국 마지막 카드를 빼든다. 오충일 발행인과 노조는 상무직업전문학교 회장인 김휴섭씨를 영입하려 애쓴다. 전문경영인이 오지 않으면 노동일보가 문 닫을 위기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소위 '친이태복 3인방'으로 불리던 조자명, 이용수, 박태준 이사 등은 ‘부적격 인사’라며 반대했다.

이용수 전 이사(현 <참여와 혁신> 발행인)는 “본인이 인정한 경제사범 외에도 상당히 악랄하고 파렴치한 범죄사실이 또 있었다”며 “아무리 (노동일보가) 어렵더라도 노동언론의 대표자로서는 ‘부적격’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충일 대표와 노조쪽은 생각이 달랐다.

정희윤 노동일보 초대 노조위원장(현 한국금융신문 기자)은 “악랄한 자본가가 노동일보를 장악하려 한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김휴섭씨가) 오지 않으면 회사는 문 닫을 위기였다”며 “당시 회사는 망하기 일보직전인데도 이 이사 등은 노조의 주식매각 요청 등을 무책임하게 거절했다”고 말했다.

경영정상화를 위해 돈은 필요하고, 뾰족한 대안이 없는 속에서 노조는 위험을 무릅쓰고 김휴섭씨를 대표로 영입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휴섭씨는 2002년 6월 이사회에서 해임통보를 받자마자 다음달인 7월 민주당 광주북갑 출마의사를 밝혀 물의를 일으켰다.

“취임 3개월 만에 8.8재보선 광주 북구갑 민주당 공천에 응모해 자신의 정계진출에 노동일보 회장직을 활용하였다는 비난을 산 김휴섭 사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휴섭은 노동자 언론을 단지 주식 1만주(5천만원)에 사들였고 결국 사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사진들 가운데 양형승 전 벽산건설노조위원장은 2002년 7월 29일에 작성된 글에서 “처음 그를 신문사에 책임지고 끌어들였던 오충일 발행인이 대표이사직 사퇴를 표명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며 “대표이사는 노동일보 경영보다는 시민단체 활동에 주력하고 있고, 경영자문역을 맡고 있는 명예회장(김휴섭)은 도덕성에 상처를 주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02년 11월 김휴섭씨는 출마로 물의를 빚은 것을 사과하고, 노동일보에 대한 ‘투자이행각서’를 제출하면서 다시 대표로 선출된다. 하지만 그가 투자한 돈은 3~5억여원 정도에 머물렀다. 투입된 돈은 대부분 직원들 체불, 급여로 나갔다. 경영권 보장 없이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투자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 시기 부채는 14억원에서 20억원으로 더욱 늘어났다는 것이 이용수 전 이사의 설명이다. 이 이사는 “(김휴섭씨는) 3억여원의 금융권 부채조차 승계하지 않고 경영권을 잡기를 원했다”며 “이후 직원들 월급은 지불했겠지만 인쇄소 보증금이나 각종 세금 등을 내지 않아 결국은 빚이 더 늘게 되었다”고 말했다.

2003년 3월 또다시 이사회에서 해임된 김휴섭씨는 결국 2004년 4월 총선 때 민주당 비례대표 24번을 받는다. 노동일보 회장이라는 명함으로였다.


노동언론이 새롭게 꽃피기 위해

노동일보의 좌초에는 여러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태복 전 발행인의 정계진출과 새로운 발행인의 또 다른 정치권 진출 행각은 신문의 신뢰도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발행인의 의지에 따라 신문논조는 흔들렸다. 경영난 앞에 이사진은 무기력했고, 대안마련에 실패했다. 노동언론을 키워줄 노동계조차 의혹의 눈초리를 떼지 않았다.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신임 대표 선정)을 하고야 만 노조의 패착 등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금융권의 부채를 안고(임금 등 다른 채권은 탕감), 3억여원을 투자하겠다는 이용수 이사(당시 업무부국장)의 제안은 먹혀들 상황이 아니었다. 노조와의 신뢰관계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수십 차례 이사회가 열렸지만 뾰족한 경영정상화 방안은 마련되지 못했다. ‘새로운 인물’ 제시도 더이상 누구에게도 없었다. 구성원 모두가 좌초하는 노동일보를 그저 넋 놓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 노동일보 폐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당시 노와 사를 대표하는 이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정희윤 노동일보 초대 노조위원장은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이사진과 이를 방관했던 주주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이용수 전 이사는 “대표부터 구성원까지 노동언론에 대한 대의에 충실했어야 했다”며 “차라리 문을 닫더라도 돈 때문에 아무하고나 동거하려는 구성원들의 판단도 대의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노동일보 폐간 후 2년이 지난 지금 임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멀어져 간 노동일보를 추억할 뿐이다. 그러나 떠나간 이들이 남긴 공통된 말은 “노동언론은 절대 꿈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노동자의 ‘희망의 기관차’가 되겠다는 약속은 한번 멈춰 섰지만 또 다른 희망의 기관차는 철로가 놓이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꿈을 다시 현실로 승화시키기 위한 길목에서 노동일보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와 엄밀한 반성이 필요하다. 노동일보의 실패가 던져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노동언론을 꿈꾸고 준비하는 이들이 수십, 수백번을 되뇌어야 할 화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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