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인 출생 신고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또 겪고 있기는 했지만 진보정치연구소는 2004년 9월8일 법제도적 절차에 따라 비영리재단법인으로 공식적인 출생신고를 했다. 9월말을 넘어가면서 난항을 거듭했던 소장 인선도 마무리 되었다.

국민승리21 시절부터 오랫동안 정책위원장을 지낸 바 있는 장상환 교수가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사회의 추천에 따라 최고위원회의 협의를 거쳐 당대표가 임명하는 절차를 거친 것이었다.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그것을 헤쳐나가며 진보정당의 싱크탱크로서의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만 하는 시점이 온 것이었다.

초기 활동 진용과 체계의 구축

 

▲ 김윤철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한국정치연구회 연구원으로 일하던 중 2002년 지방선거 이후에 민주노동당에서 정책상근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 등 주요 선거에서 당의 공약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왔으며, 4·15 총선 이후에는 연구소 추진위원을 맡아 실무총괄 책임자로 활동했다.

2004년 10월~11월 사이에 진보정치연구소는 활동 진용과 체계를 갖추는데 주력하였다. 일단 의사결정 및 소통, 그리고 집행체계로 이루어지는 주요 활동체계를 연구소 외곽의 교수 연구 역량으로 구성된 연구기획단(각 분야 연구기획위원들로 구성된 연구기획회의와 비상임연구위원(진)-소장·부소장3인-연구기획실(실·국장)-각 분야 상임연구위원(진)으로 짰다. 이 체계에서 핵심적인 활동 축은 상임연구위원들을 중심으로 일상적으로 실제적인 연구 구상과 기획 및 실행을 조직하는 실무 총괄 단위인 연구기획실이었다.

연구기획실은 실·국장과 각 분야 상임연구위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진보정치연구소의 주요 활동 진용이 되었다. 진보정치연구소는 11월 이사진과 소장단, 연구기획실장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 주관으로 총 4명의 연구 및 사무활동 인력을 선발하였다.

경제와 사회(복지), 평화군축 분야 전공자 조직운영 전문가들이었다. 당의 핵심 정책 연구 과제 수행과 연구소와 당과의 연계성 등을 고려한 선발이었다. 이로부터 연구소는 운영관리 상근 부소장 1명과 연구기획실·국장을 포함한 상임연구위원 5명, 사무국장과 총무부장 각 1명 등 총 8명의 초기 멤버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이후 2005년도에 들어 제도정치-정당·선거 분야 전공자 1명, 통계 및 사회조사 요원 1명이 추가 선발되어, 현재 총 상근 인원은 10명이며, 이후 경제분야 전공자 1~2명의 추가 선발을 계획하고 있다).

멀티플레이어를 기용 유연성을 확보

이때 흥미로운 것은 연구소 준비 과정에서 조언을 듣기 위해 만난 선진 정치재단법인인 에버트재단 한국사무소 측의 이야기였다. 에버트재단측의 이야기는 8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의 경험 속에 체득된 지혜에 바탕해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이었는데, 이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운영의 ‘유연성’ 측면이었다.

그러니까 연구의 조직과 성과의 도출, 그리고 고용의 측면에 있어서 주위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할 것과 분야별로 특화된 인력채용 등과 같은 경직된 운영 및 조직구조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던 것이다.

에버트재단측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 철폐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모든 분야의 연구역량을 정규직 형태로 다 고용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이 부분은 고용의 유연성을 위해 비정규직을 채용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규직을 고용하되, 그 부분은 ‘멀티플레이어’를 기용하고 이들의 기획력과 실행력에 바탕해 주위의 연구 역량을 다양한 내용과 형태의 프로젝트 베이스 등으로 최대한 활용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가슴 속 깊이 간직했다. 왜냐고? ‘진보판 헤리티지’를 구상하는 나에게 딱 맞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진보정치연구소는 여느 대학의 학술연구소도 아니며, 국책연구기관도 아니다. 그렇다고 선거 전략 짜는 데에만 골몰하는 정치기획사도 아니다. 각 전공분야별로 자기 논문 쓰기에만 집중하면 되는 대학원은 더더욱 아니다. 이 모든 것을 가로지르면서 대안사회의 상과 진보정당의 지속 발전을 위한 전략을 제시하는 곳이다. (당비가 아닌 -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면서도 진보정당의 부설 연구기관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진보정치연구소의 재원은 타 정당의 연구소(한나라당의 여의도 연구소, 열린우리당의 열린정책연구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재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연구인력 채용 등에 있어서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이런 점에서 진보정치연구소의 초기 활동 진용은 모(母)조직인 민주노동당의 정치 사회적 위상 등과 주객관적 한계 등을 고려할 때, 개선해나가야 하는 각고의 노력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의 라인업을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당내외 공론장과 인용의 회로망에 있어서 기존에 쌓아온 공부와 연구성과 등에 바탕해 진보정치 진영의 주요한 발언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연구소 홈페이지 http://ppi.re.kr의 연구소 관련기사 메뉴를 참조하시기를).

의원은 단지 ‘샐러리맨’이 되어서는 안 된다

2004년 11월4일 진보정치연구소는 민주노동당 의정활동평가 워크숍<사진> 개최를 통해 첫 공식활동을 개시하였다. 원내진출 반년이 지난 시점에서, 또 첫 국정감사를 경험해본 상황에서 성과와 한계가 무엇인지 짚어보는 논의의 장을 마련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참석한 발표자 등 패널들은 다음과 같다. 필자를 비롯해 민주노총 전 대변인이자 심상성 의원실의 손낙구 보좌관이 발표를 맡았고, 민주노총 전 정책연구원장이었던 김태현 정책실장과 조현연 진보정치연구소 부소장, 2004년 4.15총선 때 선대본 기조실장을 맡아 맹활약 했던 문명학 기획조정실장, 오랜 지역정치활동을 전개해온 문성진 인천시당 사무처장, 이 토론을 담당했다.

국회 본관 회의실에서 개최된 이 토론회에서 진보정치연구소측은 몇가지 주요한 제안을 했다. 즉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은 단지 상임위 활동에만 매몰되고 제도정치 영역에서 정해진 일정과 업무만 수행하면서 의회정치의 담장에 갇혀버리고 마는 ‘샐러리맨’과 같은 방식의 의정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즉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은 그것이 지역구 의원이든 비례대표의원이든 간에 유권자와 직접 대면하고 접촉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찾아내 정치적으로 의제화 하고 그것의 해결방안을 모색, 도출하고 그것을 법제화 하는 ‘현장기반형’ 정치활동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그럴때에만 진정한 ‘인민의 호민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들이 낯설은 의회공간에 들어가 초기 활동의 패턴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 단지 ‘적응’에만 쏠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문제의식에 바탕 한 것이었다. 어떤 참석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은 6개월밖에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5선 의원’처럼 노쇠한 기성정치인같다는 인상을 준다는 따가운 지적을 하기도 했다.

이후 이 문제는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 평가에 있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단지 적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정치질서와 관행을 ‘전복’하기 위한 진보정치의 현실적 계기 발굴과 창출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의 필요성을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이는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이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진보정치연구소를 비롯하여 전 당적인 고민과 토론이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이다.

아무튼 진보정치연구소는 이 워크숍을 통해 원내진출 이후 민주노동당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을 조직해내면서, 진보정당의 지속적인 발전과 전략적 행보를 위한 방향제시라는 본연의 임무 수행에 돌입했다. 이는 이후 진보정치연구소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외화된다.

분배와 성장의 이분법을 넘어서라

2004년 한해를 정리하기에 분주하던 12월15일. 진보정치연구소는 “사회경제적 대안의 모색-분배와 성장의 이분법을 넘어”라는 제목으로 연구소 창립기념 토론회와 개소식을 가졌다. “사회경제적 대안의 모색-분배와 성장의 이분법을 넘어”는 진보정치연구소가 세상에 내놓은 첫 화두이자 상당 기간 매달려야 할 거대 연구주제였다. 이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던 사회양극화 속에 극심해진 빈곤과 빈부격차로 다수의 인민이 고통받고 있는 시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보정치연구소는 이 화두에 근간하여 연구소의 실제 원년이 될 2006년도와 그 이후의 설계에 착수하니, 최근 어느 주요 일간지의 언급처럼 바야흐로 진보정치연구소가 ‘진보진영 싱크탱크의 한 축’으로 성장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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