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당 이후 두번째 맞는 국회의원 총선은 이전의 2000년 총선과는 분명히 다른 조건과 준비 속에 치루어졌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그 효과를 증명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민주노동당의 든든한 우군으로 버티고 있었고 2000년 울산 북구에서의 뼈아픈 석패로 인한 실패의 경험을 딛고 원내진출의 염원을 반드시 푼다는 민주노동당의 각오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에 우리들의 준비 정도도 이전 총선과는 확연히 달랐다.

사실상 2004년 초부터 선대본 체계 속에서 중앙당 운영이 이루어졌고 좀더 효과적인 선본 구성을 위해서 다양한 구상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확연히 나아진 조건에도 불구하고 암초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어, 정당홍보물이 왜 빠졌지?”

▲ 조승범(38) 민주노동당 선전편집실장은 과거 민중의당, 민중당 시절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청운의 꿈’을 접고 생업전선으로 향했다. 정치기획사에서 일하던 그는 2002년 지방선거에서 이문옥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 홍보팀장을 역임했고, 2002년 대선 때 권영길 후보의 홍보팀장을 맡는 것으로 당 상근활동을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당 홍보물을 만들어온 그가, 지난 3년여간의 활동기간 동안 느낀 고민들을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털어놓기로 했다.
수많은 비리와 각종 스캔들로 유례없이 많은 구속자를 내며 국민들의 엄청난 지탄을 받았던 16대 국회는 끝까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정치개혁을 위한 국민들과 시민단체들의 빗발치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비례대표의원수를 줄이려 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거구 획정을 위해 법적 시한을 넘겨 가면서까지 개정 선거법을 통과시키지 않더니 결국은 선거가 코앞에 닥쳐서야 선거법을 개정시켰다.

선거법의 개정 과정에서 선관위에서 공지한 개정 법 조항을 살펴보던 필자는 아무리 살펴봐도 비례대표 홍보물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시다시피 민주노동당이 아무리 이전과는 다르게 많이 알려져 있다 하더라도 지역구에서 많은 당선자를 낸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무리였고 당연히 선본의 실제적인 목표는 정당명부투표에 의한 비례대표 의석의 다수 획득이었기에 홍보의 많은 부분도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중앙선관위에 전화를 해서 비례대표 홍보물 조항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문의했더니 처음에는 선관위 직원도 그 조항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잠시 후 전화를 해서는 비례대표의 홍보는 TV광고를 할 수 있도록 되었기 때문에 홍보물 규정은 선거법 개정 과정에서 빠졌다는 것이다. 정당명부투표제가 적용된 직전의 2002년 지방선거에서는 정당 홍보물 제작 규정이 있었고 그로 인한 효과를 어느 정도 보았던 민주노동당인지라 선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매일 아침8시에 열리던 선본 기조회의에서는 선거 비용이 그만큼 덜 들게 됐으니 차라리 잘 된 게 아닌가 하는 소수 의견도 있었지만 반드시 정당 홍보물 조항을 살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선거벽보 디자인도 통일시키는 마당에…”

지금은 원내정당들에게 고유번호가 부여되어 내년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의 모든 후보가 기호4번으로 확정지어 출마하게 됐지만 당시의 우리는 원내 의석 하나 없는 상태였기에 지역구 후보자들의 기호는 물론이고 정당 기호도 도대체 몇번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TV광고가 보장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어마어마하게 비싼 광고료 때문에 우리의 재정 상태로는 허용된 광고 횟수를 채우기는커녕 기껏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방영만 겨우 가능할 정도인데 그 광고를 볼 수 있는 유권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여전히 당을 최대한 많이 알려야 한다는 과제 때문에 당선이 힘들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당득표의 제고를 위해 희생하는 소총수의 심정으로 출마하는 지역구 후보자들이 대다수이고 이들의 선거벽보의 디자인과 색상도 강제로 통일시키려 하는 마당에 모든 유권자에게 당을 홍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인 정당홍보물이 아예 없어지게 되었으니 민주노동당 입장에선 치명적인 타격이 될 상황이었다.

또한 비례대표 의원을 한명이라도 당선시키면 거기에 소요된 비용은 다 돌려받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계산도 작용했다.

부랴부랴 선관위에 항의했지만 이 안은 선관위의 안이라기보다는 국회의 정개특위에서 기존 정당 의원들이 사실상 합의해서 제출한 안이었기에 선관위가 이를 수정·보완하기는 힘들었다.

생각다 못한 필자는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민주당의 홍보 담당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확인했더니 그들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황당해 하는 것이었다. 각당의 홍보 담당자들 모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내친 김에 우리를 포함한 4당의 홍보 책임자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각당 홍보 책임자들의 태도는 처음의 반응과 달라졌고 결국은 비례대표 홍보물은 개정 선거법에 반영되지 않았다.

아마도 유권자들의 알 권리 등의 당위적 명분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인지도 등의 기득권을 고려해 봤을 때 자신들에게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명분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대세를 뒤집을 수 없었기에 이제 당을 홍보할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당원임을 알리고 싶어 ‘환장’한 당원들

당시의 선거법에 의하면 엄연한 불법인데도 대선 때 열린우리당은 노란색, 한나라당은 푸른색 점퍼를 입고 다니며 선거운동을 했고 후보선출대회 등의 행사를 통해서 이번에도 똑같은 유니폼으로 자신들의 세를 이미 과시하고 있었다.

인지도 제고와 세 과시의 필요성이 누구보다 더 절실했던 우리도 유니폼을 비롯한 소품의 기획에 착수했다.

넥타이와 재킷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가장 대중적인 점퍼만 제작하기로 결정하고 필요한 벌수를 추산해 보기로 했는데 문제는 단가와 활용 방법이었다.

다른 당들처럼 후보들만 입자니 지역구 출마 후보자가 타당의 절반밖에 안 되고, TV 등 미디어에 노출되는 빈도수도 훨씬 낮을 게 뻔한지라 효과와 활용도가 너무 떨어질 것이었다. 그렇다고 후보뿐만 아니라 운동원들까지 입기에는 재정이 너무 많이 소요되었다. 안 그래도 선거 때만 되면 특별당비를 내고, 월차휴가까지 내서 선거운동을 하는 우리 당원들에게 점퍼까지 사 입고 선거운동을 하라고 하기에는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게다가 당의 상징색인 주황색은 평상시에는 입고 다니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운 색이 아니던가. 하지만 선본은 민주노동당의 당원들을 믿기로 했다. 우리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회사 배지는 안 달고 다녀도 민주노동당 배지는 자랑스레 옷깃에 달고 다니며, 누가 ‘무슨 배지냐’고 묻기라도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민주노동당을 홍보하는 사람들. 이라크 파병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당명을 크게 넣어 자비로 제작해서 아파트 베란다에 걸어두는 사람들, 한마디로 자신이 당원임을 알리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이 우리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아니던가. 아니나 다를까?

가슴팍과 등판에, 그것도 등판에는 형광색으로 큼지막하게 민주노동당 글자가 새겨져 있는 누가 봐도 촌스러운 주황색 점퍼를 우리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참으로 줄기차게도 입고 다녔다.

주차위반도, 과속도 할 수 없었다

치량용 스티커의 제작도 마찬가지였다. 자가용을 이용하는 당원들이 상당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차량의 뒤쪽에 붙이고 다닐 수 있는 ‘사랑해요! 민주노동당’ 이라는 주황색 스티커를 제작해서 배포했는데 처음에는 주차위반이나 과속, 일정정도의 난폭 운전 등 평범한 대한민국 운전자들의 일상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부착하고 다닐 당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하고 그 효과가 의심되었지만 그 역시 기우였다.

전국의 곳곳에서 ‘사랑해요! 민주노동당’이라는 어찌 보면 뜬금없고 황당하기까지한 내용의 스티커를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는 차량들이 목격되었고 차가 없는 당원들, 특히 학생당원들의 경우에는 들고 다니는 가방에다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면서까지 지신들이 민주노동당의 당원임을 ‘커밍아웃’하였던 것이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민주노동당은 당원들의 피와 땀을 먹고 자란다. 당원들이 흘린 땀과 기꺼이 뽑아준 피에 의해 민주노동당은 드디어 진보진영의 오랜 숙원이었던 국회입성을 당당히 이루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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