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들어서며 공주도 당 정식 조직 체계로의 출범을 준비했다. 원래대로 하자면 ‘공주연기 지구당’ 쯤 되었겠지만 법적으로 지구당이 폐지될 예정이라 ‘민주노동당 공주연기 17대 총선 대책위원회’로 발족식 겸 당원총회를 가지기로 했다.

이제껏 ‘초짜’들이 설렁설렁 놀듯 당 활동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충남 공주 땅에서 ‘민주노동당’ 깃발만 꽂고 있어도 ‘잘한다’는 과분한 소릴 듣던 우리에게, 당 정식 조직 체계로의 출범은 책임감의 무게를 더 크게 가지게 했다. 발족 총회준비, 당원들에게 나누어 연락을 하고 ‘총선 대응 논의 제안서’를 토론해 만들고 당일 판도 짜고. 이전과 비슷한 일들이었는지 모르지만 마음가짐은 새로웠다.

탄핵 반대는 해도, 당원총회는 안 오던 당원

▲ 손은숙(29) 민주노동당 부산 해운대구위원회 조직부장은 4·15 총선 이후인 2004년 8월부터 민주노동당에서 상근활동을 시작했다. 직장인이며, 열혈당원으로 활동하던 그가, 지역 상근자를 시작하기까지 과정, 지역상근자로 활동을 시작한 후 겪는 일상사업의 난맥과 보람들을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털어놓을 것이다.
3월13일 발족식 총회 하루 전날, 그날은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된 다음날이었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 경선 마지막 날이었다. 비례대표 후보 경선은 중앙차원에서 보면 열띤 선거 분위기였지만, 공주연기 지역의 투표율은 저조했다. 투표 참여를 독려하고 다음날 있을 총회 참석을 다시 점검하러 전화를 돌렸다.

휴대폰 명의가 자신으로 되어 있지 않아 인터넷 투표가 불가능하다는 한 학생당원. 조치원에서부터 공주까지 직접투표를 하러 오라는 건 무리일 듯하여, 총회 참석 여부를 물었다. “내일 공주연기 지역에 정식 체계 출범을 위해 총회 있는 거 아시죠?” 그 학생당원의 대답. “오늘 탄핵 반대 광화문 촛불시위를 가는데, 내일 못 내려 올수도 있어서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민주노동당 당원이면 지역 당 조직 출범 총회인데 참석해야지요?” 했더니 “오늘 학생위원회 위원장도 광화문 같이 가니깐, 이야기 한번 해 볼게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 선출 선거에 당원으로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데는 조치원에서 공주까지 1시간 거리가 멀고 먼 길이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사태에 항의하기 위해선, 당원총회까지 포기해 가면서 서울 광화문까지 기꺼이 갈 수 있는 민주노동당 당원. 결국 다음날 발족 총회엔 그 학생은 오지 않았다. 민주노동당 당원으로서의 역할과 책임보단,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를 규탄하는 노란 물결 속에 합류하는 게 더 중요한 것으로 판단하는 ‘민주노동당 당원’. 민주노동당의 무기력함이 억울했다.

어쨌든 다음날, ‘민주노동당 공주연기 17대 총선 대책위원회’는 발족되었다. 당원 과반 참석이 안 되어 정식총회는 못됐으니, 지구당 체계로 보면 준비위원회로 출범을 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위원장엔 류근복, 사무국장엔 손은숙이 선출되었다. 공주연기 17대 총선 대책위원회 사무국장, 그렇게 나는 첫 당직을 맡았고, 민주노동당 평당원이라는 ‘벼슬’에서 물러났다.

황색 협박, 그저 억울하고 분할 뿐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여파로 민주노동당 당원들마저도 흔들렸으니, 2002년 대선 때 노무현을 지지했던 시민사회 진영은 말해 무엇 하리. 더 큰 악(한나라당) 앞에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실정이 그들에게 없었던 일이 되고 있는 듯 했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을 찍었던 자신들의 한 표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1년간 가슴 아파했던 사람들은 망각의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들의 한 표는 여의도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떨구어진 농민의 눈물 한 방울이 되었고, 있지도 않은 ‘국익’의 이름으로 이라크 국민의 생명을 유린하는 파병에 총 한자루가 됐다.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 “분신으로 항거하는 시대는 끝났다”라는 망발했던 노무현 세치 혀의 운동에너지로 사용되었음을 잊고 또다시 ‘비판적지지’로 결집하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에 던지는 한표는 사표가 아니라 다음번 당선을 위한 종자돈이 되고 삶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연대해 싸우는 민주노동당의 활동 에너지로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됨을 잊어 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어차피 당선 안 되는 거 괜히 나와 한나라당 좋은 일시키지 말라’는 노란 물결의 협박은 힘없는 민주노동당의 힘없는 당원으로 정말 억울한 분노를 일게 했다. 민주노동당 총선 후보를 낼 역량이 안 되었던 공주연기 지역은 그 협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 차라리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예비후보 등록 전술

지난 공주시장 재보궐선거와 달리 총선에 ‘후보를 낼 수 있을지 없을지, 낼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논의는 할 수 있었다.(그것도 하나의 발전!) 그러나, 상근자도 없고 돈도 없고 조직도 활동당원도 얼마 안 되는 상황은 여전히 같은 결론이었다. ‘후보 못 냄.’

그러나, 지난 공주시장 재보궐때처럼 손놓고 넋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전국구 후보에 대한 정당투표제가 도입되어 1인 2표 중 한 표는 민주노동당에 행사할 수가 있었다. 그런 우리를 선거법이 도와줬다. 선거에 출마할 후보자들이 예비후보로 등록해 정식 선거기간 전에 일정정도의 선거운동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비후보 등록할 때 기탁금 같은걸 내지 않아도 되었다.

‘본 선거엔 등록 않을 거면서 예비후보 등록하는 건 공주연기 주민들을 속이는 거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사실 우리가 후보를 못내는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하여 예비후보 등록해 특별당비나 세액공제 후원금 모금 등으로 재정이 마련되면 그대로 ‘GO!’ 정식후보 등록을 하면 되었다. 또한 돈 없는 사람이 출마하기엔 기탁금 1500만원은 너무 큰 돈이어서 불합리하다는 걸 그걸 통해 주민들에게 알리는 기회가 되었기에 문제가 없다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류근복 선생님을 예비후보로 등록하고 홍보물을 제작해 각 면소재지별로 구해온 전화번호부 책의 주소를 골라 홍보물을 발송했다. 그거라도 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 우리에게 뜻밖에 기회도 찾아왔다. 지역의 신문, 방송에서도 인터뷰 요청이 들어 왔던 것이다. 2002년 대선에 이은 총선에서의 TV 토론회의 효과로 민주노동당 예비후보도 지역 언론에게 관심과 기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본판의 선거는 여전히 할 수 있는 게 적었다

선거전에 들어가자 후보자가 없는 공주연기는 할 수 있는 게 역시 별로 없었다. 옆 지역에 선거 지원을 나가거나,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자들이 내려오면 긴 정당명부 투표용지를 들고 1인2표제를 설명하며 기호12번 민주노동당을 선전했다. 우리 욕심으론 내내 함께 선거운동을 했으면 했지만 전국적으로 볼 때 민주노동당 지역구 후보가 출마 않은 곳이 많았으니, 3번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각자 개별적으로 1인2표제, TV 토론회 스타 노회찬이 당선되려면 기호12번 민주노동당을 찍어야 한다고 선전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평균 13.1%, 충남 10.5%, 공주 8.7%

선거 당일 공주 당원들은 투개표 참관인을 하며 일당을 벌고, 함께 모여 전국 개표상황을 지켜봤다. 2004년 총선으로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이 되리라 누구나 이야기 했지만 그것이 사실로 다가오자 우리 모두는 감동으로 함박웃음이었다. 더욱이 공주가 안방인 자민련 비례대표 1번 김종필이 누구도 아닌 민주노동당 노회찬에 의해 꺾이는 것은 짜릿한 전율이었다. 전국평균 13.1%와 충남평균 10.5%를 까먹는 8.7% 지지를 받은 공주 당원들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뻔뻔스레 기뻐 날뛰었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10명 당선은 떨어질 걸 알면서도 ‘민주노동당’이라는 감독의 사인아래 ‘희생번트’를 친 전국의 지역구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후보들의 공이 컸으리라. 이제 공주도 더 이상 민주노동당 후보 없는 선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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