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확산되고 그 비정규직이 정규직에 비해 불리한 대우를 받고 있는 현실은 유럽이나 한국이나 같다. 하지만 ‘현대판 노예’라고까지 불리는 한국의 비정규직과 달리 유럽에서 비정규직은 수요가 있을 때 활용되고 적어도 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규범이 있다는 점에서 아주 다르다. 이윤을 좇는 자본의 속성이야 국적을 따질리 없지만 누가, 어떤 방식으로 제어하느냐에 따라 비정규직 규모나, 임금·노동조건, 고용안정성 등에 주는 영향은 달라진다.

아시아지역 비정규직 문제 논의(28일)에 이어 29일 진행된 ICEM(국제화학에너지광산일반노련) 주최 ‘유럽과 한국의 비정규노동 국제비교’ 토론회<사진>에서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유럽노조들의 경험이 소개됐다.


근로계약 체결과정에 노조가 개입

유럽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규모가 확대되는 추세다. 유럽연합(EU)의 전체 취업자 중 파트타임 고용비율은 지난 91년 13.9%에서 2000년 17.7%로 늘었다. 나라별로는 덴마크(23.3% → 21.3%), 스웨덴(24.2% → 22.6%)처럼 줄어든 경우도 있었지만 스페인(4.6% → 8.0%), 독일(14.1% → 19.4%), 프랑스(12.3% → 16.9%) 등에서처럼 대체로 증가추세였다. 비율로는 네덜란드가 압도적으로 높았는데 91년 33.1%에서 2000년 41.1%까지 늘었다. 임시직 비중 역시 유럽 평균 90년 10.1%에서 2000년 12.5%까지 늘었다.

이처럼 증가추세인 비정규 규모에 대한 유럽노조들의 대처방식은 업체와의 단체교섭을 통한 비정규직 증가 억제, 비정규직 권리보호다.

전 영국일반노조(GMB) 사무총장이자 ICEM에서 비정규직 부문을 담당하는 제리 비아트씨는 “노조가 근로계약 체결과정에 개입해 불가피하게 비정규직으로 채용되는 경우이더라도 동등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업체가 각종 노동기준, 보건안전환경기준, 생산성 기준 등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교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특히 청소, 보안, 운송, 유지보수 등 서비스공급 부문의 노동자들은 임시직, 파트타임이 많아 각종 사회보장 혜택도 미흡한데, 이때는 취업을 알선하는 전문고용알선업체가 아닌 원청업체에 직접, 노동 관련 각종 기준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여기서 전문고용알선업체는 우리의 파견업체가 아니라 리크루트 같은 취업알선기관이라 생각하면 된다. 유럽 노조들은 일부 전문고용알선업체들과 고용조건, 최저임금 보호 등을 담은 공동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ICEM은 “모든 고용주가 3자와 함께 계약을 체결할 때 직접 고용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항에 대해서는 반드시 노조 대표와 협의토록” 하는 국제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물론 여기서 ‘노조’는 개별 기업이 아닌 해당 업종, (초)산업 단위 등으로 조직된 산별노조이다.

“유연노동 필요하면 사용자가 비용 지불하라”

전체 노동자의 거의 90%가 노조 조합원인 덴마크의 사례는 산별노조운동의 거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듯했다. 덴마크전기공노조(DEF) 사무차장인 조르겐 주울 라스무쎈씨는 사용자단체와 전국노조 간의 중앙단체협약을 통해 노동시장에 관한 각종 기준을 결정한다고 소개했다. 물론 중앙협약에는 외주하청사들도 포함되고 파트타임, 파견노동,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는 특별조항까지 두고 있다.

실제 제조업노조교섭카르텔(CO Industry)과 제조업사용자총연맹(DI)이 맺은 단체협약에는 해고와 고용에 관한 규정, 노동시간 규정이 있고 부속문으로 파견, 이주, 파트타임 노동자 관련 규정을 담았다. 이 협약은 ‘구역(area)협약’으로 정규직이든, 파견노동자이든 관계없이 회원사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적용된다.

지난 2003년 덴마크 노동법원은 이를 입증해주는 하나의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당시 덴마크전기공노조와 사용자단체인 Tekniq가 단체협약을 체결했는데, 사용자들은 파견노동자에게 정규직보다 적은 임금과 연장근로수당을 줬다. 그러자 전기공노조는 노동법원에 제소했고, 법원은 “사용자단체인 Tekniq의 회원사가 파견노동자를 사용한 경우, 사용업체는 파견노동자가 협약이 유효한 구역에서 일한다면 이 협약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렇게 단체협약의 적용을 받도록 하는 것과 함께 전기공노조의 최근 전략은 파견노동자 조직화다. 최근 늘어나는 파견노동에 대해 전기공노조는 유연성 또는 결근노동자를 대신할 수 있어 유용한 측면도 있지만 사용업체의 조건을 악화시킬 수 있고, 파견근무가 끝났을 때 안정성이 없으며 일부 사회보장제도의 경우 자격에 미달되는 등의 문제가 많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파견노동 등 유연계약에 따른 새로운 노동자를 노조로 조직해 단체협약 적용과 함께 실업기금 및 직업훈련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사용업체 노동자들과 같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즉, 덴마크전기공노조의 전략은 사용자가 파견노동을 통한 유연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유연성이 필요하다면, 노동자가 아니라 사용자가 추가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3자 교섭 통한 ‘유연성 + 안정성’ 추구

‘네덜란드 모델’로 잘 알려진 네덜란드의 사회경제위원회 사례도 이날 소개됐다. 네덜란드FNV제조업노조 파견노동 담당자인 한 베스터호프씨는 “유연성과 안정성의 균형을 맞출 수 없었던 정부는 사회적 파트너에게 맡겼는데 3년간의 3자 교섭을 통해 유연성과 안정성에 관한 법(law)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 3자 교섭은 노동계 15명, 사용자 15명, 왕이 추천하는 자 15명 등 총 45명의 위원회로 구성된 사회경제위원회 논의를 말한다.

이 법은 기업에 대해서는 기간제 계약해지에 관한 더 많은 자유를 주는 등 유연성을 보장하면서도 노동자에 대해서는 3년 연속 기간제 계약 이후 무기근로계약 간주, 새로운 계약을 위해서는 3개월의 휴지기간 필요 등 더 많은 안정성을 부여했다.

또한 네덜란드에는 파견노동에 관한 규정도 있는데, 정규 사용자에게 적용되는 모든 규정은 파견업체 사용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간접고용에 관한 법률(WAADI)에 따라 △파견노동자에 의한 파업 대체근로 금지 △직무에 관한 적절한 (안전) 정보를 제공할 사용업체의 의무 △사용업체 노동자 대비 동등한 임금 등도 함께 보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파견업체가 사회보험료나 세금을 내지 않을 경우 사용업체가 책임지도록 하고 있다.

사회보장 전제 속 유연안정성 논의 가능

이같은 유럽노조들의 사례는 ‘유연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노조의 힘을 통해 안정성을 보장받고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을 텐데, 각국의 시장 상황과 노조의 조직 형태, 조직력 및 교섭력, 사회정치적 상황 등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종각 한국노총 정책본부장은 “얼마전 네덜란드 빔콕 전 총리와의 간담회에서 파트타임 중심으로 일자리가 창출되는 것을 사회협약의 성과로 얘기할 때 고용의 질을 악화시킨 것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빔콕은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다”며 “한국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유럽과는 전혀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주환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기획국장 역시 “유럽에 비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너무 심각하고 법적으로도 무권리 상태일뿐더러 노조 조직형태 역시 대기업, 남성, 정규직 등 기업별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유럽모델을 이해하는 데에는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업단위로는 노동계나 경영계 모두 비정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또한 산업 차원으로 영역을 넓히더라도 실업기금 등 각종 사회보장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2004년 현재 민주노총 조합원 중 산별노조로 조직된 비중이 47.4%나 되는 등 산별조직화가 확산되고 있다”며 “아직은 ‘무늬만 산별’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무늬라도 산별이어야 중소영세 비정규 노동자들을 담아내는 데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 소장은 “정부는 과도한 수량적 유연화를 막고 인적자원 개발 등 기능적 유연성을 제고하는 방향에서 노동시장 정책을 운영해야 한다”며 “또한 최저임금 수준 현실화, 정규직의 임금인상 자제가 중소영세비정규직 임금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 기업복지제도 수혜대상 비정규직 및 하청업체로 확대 등의 방안이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제리 비아트 ICEM 비정규담당은 “한 사회에서 결정해야 할 것은 국가의 부를 시민들 보호를 위해 어떻게 쓸 것인가이다”며 “노동력 사용의 유연안정성 논의에서도 실업수당, 병가, 연금 등 사회보장이 얼마나 탄탄한가가 전제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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